베를린장벽 건설과 붕괴 그리고 통일

1989년 12월 25일, 세계적인 음악가 레오나드 베른슈타인(Leonard Bernstein)이 지휘하는 가운데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가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악보에는 ‘환희’가 들어갈 자리에 ‘자유’가 들어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단일팀이 아니라 서독과 동독 그리고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 혼성팀이었다. 이들은 모두 오랜 세월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서독과 동독,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축하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이었다. 1961년 8월 13일 동독이 쌓기 시작한 장벽은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주변 동독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콘크리트로 축조된 장벽을 따라 곳곳에 감시탑이 설치되었다. 동독 정부는 이 장벽을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방어벽’이라고 불렀다. 이에 반해 서독 정부는 브란트(Willy Brandt)가 베를린 시장 시절 만들어 낸 어법에 따라 ‘수치의 벽’이라고 일컬었다. 이름이야 어떻든지 세계인들은 베를린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이 장벽을 떠올렸고, 이 장벽은 철의 장막으로 여겨졌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5000여 명이 이 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100명에서 200명가량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1)

베를린장벽 건설은 소련의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동독의 사회통일당 제1서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 8월 12일 자정 동독군과 경찰이 전격적으로 국경을 폐쇄하고, 철조망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장벽의 길이는 43킬로미터였고, 서베를린 외곽 장벽은 156킬로미터에 달했다. 갑작스러운 조치와 더불어 동독 주민 대부분의 서독 방문이 불가능해졌고, 이산가족까지 생겼다. 서베를린은 적대 국가에 둘러싸인 섬이 되어 버렸다. 브란트 시장을 비롯한 서베를린 시민들이 항의했지만, 사태의 진행을 막지는 못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철조망이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1년 동독 장교 콘라트 슈만(Conrad Schumann)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고 있다.

 

1962년 6월에는 이미 축조된 장벽에서 100미터 이내에 있던 건물이 철거되고, ‘죽음의 지대(Death Strip)’로 불리던 무인 지대가 만들어졌다. 1965년에는 다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지고, 1975년에는 통일 때 붕괴된 형태의 장벽이 세워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벽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량된 ‘제4세대 장벽’이다. 높이는 3.6미터, 폭은 1.2미터였으며, 감시탑은 116개소, 벙커는 20개소에 달했다. 공식적으로 국경을 횡단할 수 있는 장소는 모두 아홉 곳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와 침머 거리(Zimmerstraße) 구석에 있던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다. 연합국 소속 요원과 외국인만 통행할 수 있던 이 검문소는 오늘날 베를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1987년 6월 12일 베를린 시 탄생 750주년을 기념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Ronald Reagan)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게 동유럽 진영의 자유를 확대하겠다는 징표로 베를린장벽 철거를 촉구했다.2) 그러나 이때만 해도 레이건 자신을 비롯해 장벽의 붕괴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사건은 갑자기 찾아왔다.

1989년 9월 헝가리 국경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동독 주민 1만 3000명 이상이 헝가리를 지나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다가 체포된 사람들은 부다페스트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동독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하고 서독 대사관을 찾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뒤이어 동독 내에서 대대적인 대중 시위가 일어나자 동독의 최고 지도자 호네커(Erich Honecker)는 사임했다. 그런데도 시위는 더 확대되어 갔고, 많은 주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서독으로 가고자 했다. 호네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크렌츠(Egon Krenz)는 사태 완화를 위해 난민들의 서독 방문을 허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상황이 와전되고 급기야 서독 방문이 즉각 허용될 것이라는 언론의 오보까지 발생했다. 이에 고무된 많은 동독 시민이 무력해진 국경 경비대를 뚫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베를린장벽 붕괴는 공식 연표에는 1989년 11월 9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장벽 전체가 철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무튼 이때를 기점으로 시민들은 해머와 곡괭이를 가지고 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동독 정부도 추가로 국경 초소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중에는 포츠담 광장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이 포함되어 있어 상징적 의미가 더욱 컸다. 동서독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린 것은 크리스마스를 며칠 남기지 않은 12월 22일이었다. 다음날인 23일부터 서베를린 시민을 포함해 서독 주민들이 비자 없이 자유롭게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 지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동독 정부가 공식적으로 장벽 철거를 시작한 것은 다음 해인 1990년 6월 13일이었다. 다음 달 1일 동독이 서독 통화를 수용하면서 국경에 대한 통제도 공식 종료되었다. 장벽 붕괴의 논리적 결과인 통일은 1990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고, 역사의 기념물로 남기기로 결정한 약간의 구간과 감시탑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1991년 11월까지 철거되었다. 오늘날 포츠담 광장에 남은 장벽은 살아 있는 기념물이 되어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각주

  1. 1 희생자들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Hans-Hermann Hertle, Maria Nooke, Die Todesopfer an der Berliner Mauer 1961~1989: Ein Biographisches Handbuch (Berlin, 2009)를 보라.
  2. 2 Hans-Hermann Hertle, The Berlin Wall: Monument of the Cold War (Berlin, 2008),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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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역사다, 2011. 6. 1. 표제어 전체보기
도시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시의 공간을 산책하듯 도시의 역사를 거닐어 보자. 도시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도시 속...자세히보기
기획 도시사학회, 저자 이영석, 민유기 외
제공처
서해문집 http://www.booksea.co.kr, 제공처의 다른 책보기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장벽 건설과 붕괴 그리고 통일 (도시는 역사다, 2011. 6. 1.,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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