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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기적'으로 불리는 독일통일의 과정
[염돈재 독일통일 이야기] 독일통일은 "민주적 통일·평화적 통일·주변국의 동의"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  2014-07-03 14:27

 

'염돈재의 독일통일 이야기'는 1990년부터 3년 동안 독일 통일을 직접 목도(目睹)한 염 원장의 소중한 경험과 이를 통해 얻은 교훈 등으로 채워집니다. 2011년 염 원장이 집필한 '올바른 통일준비를 위한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단행본 내용을 바탕으로 게재합니다. 총 50여 차례 연재될 예정이며, 남북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독일통일 과정을 요약하면

①동독주민들의 시위로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되고,

②자유선거 실시로 체제선택권을 갖게 된 동독주민들이 동독 공산정권을 버리고 서독에의 편입을 선택했고,

③서독정부가 기민한 외교를 통해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를 받아 냄으로써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독일통일은 ①주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통해 이루어진 민주적 통일이라는 점, ②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평화적 통일이라는 점, ③주변국의 동의를 받으면서 이루어진 통일이라는 점에서 "21세기의 기적"이라고 불린다.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과정은 헝가리에서 시작되었다. 1989년 6월 28일 헝가리 개혁정부가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제거하자 동독주민들의 대량 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동베를린 주재 서독 상주대표부, 헝가리·폴란드·체코 주재 서독대사관에 동독주민들이 몰려들어 서독행 비자를 요구했다. 서독정부는 소련 및 동독 당국과 협의, 체코·폴란드에 있던 동독주민 2만여 명을 열차 편으로 서독으로 수송했다. 그러나 서독 텔레비전을 통해 이를 알게 된 동독주민들의 탈출이 늘어나 매일 2,000여 명이 서독으로 탈출하고 시위가 전국규모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10월 7일 동독 공산정권 수립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늦게 오는 자는 인생의 벌을 받는다"는 소련 속담을 인용, 동독의 개혁을 촉구하자 시위가 가열화 되었으며, 10월 16일에는 라이프치히에서 12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는 등 시위규모가 급속히 커지기 시작했다.

https://brunch.co.kr/@leipzig/5 [라이프치히 프로젝트 에서]

 

갑작스러운 시위확산과 소련의 유혈진압 반대로 무력진압을 포기한 동독 지도부는 10월 18일 호네커를 퇴진시켰고, 개혁성향으로 알려진 에곤 크렌츠가 서기장에 취임했다. 크렌츠는 과감한 개혁을 약속했으나 주민들의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공보담당 정치국원 샤보프스키의 실수로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었다. 샤보프스키는 11월 9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여행 자유화 계획을 설명하던 중 "누구나 지금부터 서독여행을 할 수 있다"고 잘못 발표했고, 동서독 주민들이 대거 국경으로 몰려가 국경개방을 요구, 겁에 질린 국경 경비병들이 국경을 개방함으로써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사태를 되돌리기 어렵다고 판단한 공산지도부는 이를 기정사실화 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장벽 붕괴 후 시위가 더욱 가열되자 다시 희생양이 필요해진 동독 지도부는 11월 13일 슈토프 총리를 퇴진시키고 개혁성향으로 인기가 높던 드레스덴 시당 위원장 모드로우를 총리에 임명했다. 그러나 11월 하순부터 호네커 등 실각한 공산지도자층의 호화생활과 부패행위가 폭로됨으로써 시위는 더욱 가열화 되었다.

동독 지도부는 '동독'의 존속을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개혁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 12월 1일 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공산당)의 권력독점 조항을 삭제, 정치적 다원주의를 허용했다. 이어 12월 3일에는 당 중앙위원회 특별회의에서 당 정치국과 중앙위원회를 해체했으며, 12월 6일에는 크렌츠가 당서기장, 국가평의회 의장 및 국방위원장 등 모든 직책에서 사퇴함으로써 정치권력이 공산당에서 내각으로 넘어갔다. 동독 공산당은 12월 16일부터 17일간 개최된 제2차 특별 당 대회에서 스탈린주의와 결별하는 새로운 당 강령을 채택하는 한편, 기존의 사회주의통일당(SED) 당명에 민주사회주의당(PDS)을 덧붙여 SED-PDS로 개칭했다. 그 후 공산당은 개신교 연합을 '원탁의 각료급 회의'에 초대하여 12월 7일부터 '원탁회의'가 출범되었다. 7개 정당 대표 17명, 민주세력과 사회단체 대표 19명 등 36명으로 구성된 원탁회의는 형식상으로는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단체로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12월 초 사회주의통일당(SED) 각 지역 서기장 회의 결정에 따라 공산정권에 대한 '적의'를 수렴하여 동독주민들의 불만과 분노를 진정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편, 베를린장벽 개방을 계기로 동독 탈출자들이 계속 증가하여 1989년 한 해 동안에만 343,854명이 탈출, 경제·사회 마비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11월 13일 취임한 모드로우 총리는 위기모면을 위해 11월 13일 서독과의 "조약공동체" 구성을 제안하는 한편, 12월 콜 총리와의 회담에서 120억 마르크의 경제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콜 총리가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지원을 거부, 그 이후에는 서독 측의 요구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 기간 중에도 동독주민의 서독이주가 계속되고 동독 경제가 더욱 악화되어 모드로우 정부는 1990년 2월 콜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화폐동맹 창설 원칙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그 후 동독 공산정권은 급속히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동독주민들의 서독에의 편입 선택

 

1989년 12월 초부터 시위군중의 민주화 요구 구호인 "우리는 국민이다"가 "우리는 한 국민이다" 또는 "마르크가 안 오면 우리가 가겠다" 는 통일구호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동독주민은 통일보다는 '사회주의 동독'의 존속을 원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공산당 지도부와 원탁회의 관계자들은 조기 선거가 '동독의 존속'에 유리하다고 판단, 1990년 5월로 예정되었던 인민의회 의원 선거를 3월 18일로 앞당겨 실시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압도적으로 승리함으로써 동독 공산정권 멸망과 독일통일 과정은 가속화되었다.

동독 기민당과 사민당이 4월 5일 개원한 동독 민주의회에서 연립정부를 구성, 서독정부와 통일협의를 개시함으로써 통일작업은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로타 드메지에 동독총리는 4월 24일 서독의 수도 본(Bonn)에서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화폐·경제·사회통합 원칙에 합의했다. 5월 18일에는 동서독 재무장관이 「화폐·경제·사회통합조약」(일명, 국가조약)을 체결, 7월 1일 발효됨으로써 동서독은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었다. 이어 8월 22일부터 23일까지 개최된 동독 인민의회에서 10월 3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가입할 것을 결의한 데 이어 8월 31일 동서독 내무장관 간에 통일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어 9월 20일 동서독 의회가 통일조약을 비준하고 10월 3일 독일정부가 통일을 선포함으로써 독일은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앞서 동독은 9월 24일 동유럽 공산국가들 간의 군사동맹 기구인 바르샤바조약기구(WTO: Warsaw Treaty Organization)에서 정식 탈퇴했으며, 10월 2일 동독의회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소멸을 의결함으로써 독일통일은 인류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합법적,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2+4 회담과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 확보

 

2차 대전 종전 이후 서독정부는 주변국의 반대를 의식,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를 기피해 왔다. 그러나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장벽붕괴를 통일로 연결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조치로 베를린 장벽 붕괴 3주 후인 11월 28일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하여 베를린 장벽개방을 통일로 연결시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콜 정부는 미국이 독일통일에 적극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요구조건을 초기부터 전폭 수용하면서 미국의 협조를 받아 주변국을 설득해 나갔다. 우선 통일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부터 탈퇴할 경우 독일통일에 동의하겠다는 소련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처음부터 통일독일의 NATO 잔류의사를 분명히 했다. 프랑스의 동의 확보를 위해서는 유럽통합의 신속한 추진을 약속했고, 영국은 통일독일이 더 이상 패권추구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 동의를 얻어냈다. 소련과는 오더-나이세 국경선의 인정, 통일독일 병력의 37만 명 선 유지, 90억 달러의 원조제공 등을 약속하여 동의를 받았다. 특히 소련은 마지막 순간까지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려고 했으나, 미국이 영국 및 프랑스와 연합하여 압박함에 따라 결국 독일통일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통일의 외부적 절차 완성을 위해 개최된 2+4 회담은 사실상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 동서독이 이미 통일에 합의한 데다, 미국과 서독이 관련국들과의 양자협상을 통해 합의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회담은 1990년 5월 5일 서독의 수도 본(Bonn)에서 1차 회담을 시작하여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4차 회담에서 「독일문제의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종결되었다. 또한 조약에 따른 후속조치로 1990년 10월 12일에는 「소련군의 기한부 주둔에 관한 조약」, 11월 14일에는 폴란드와의 「국경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독일통일과 관련된 대외적 문제는 완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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