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 10개의 타임로그 (응칠>도마>의병>단지>의거>사형선고>어머니의 편지>안응칠역사>마지막유언>영웅의 마지막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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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트리 - 우리들의 영원한 영웅, 안중근
1879.09.02부터 1910.03.26까지
10개의 타임로그
1> 영웅의 탄생 , 아명(兒名) 안응칠의 비밀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의 아명이 왜 안응칠이었는지?"
영웅,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 같은 7개의 점을 가지고 태어나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 광석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슴과 배에 마치 북두칠성과 같은 점 7개가 있었다. 할아버지 안인수와 아버지 안태훈은 안중근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고 하여 아명(兒名)을 응칠이라 지었다.
▶ 용맹한 영웅의 어린시절
안응칠은 할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우는 한편, 틈이 나는 대로 마을의 아이들과 함께 청계동의 수려한 산세를 무대로 전쟁놀이를 즐겼다. 또한, 집안에서 고용한 포스들을 따라 사냥과 활쏘기, 말타기 등을 배워 15, 6세 무렵에는 발군의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출처
내용/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URL : http://ahnjunggeun.or.kr/?page_id=1334
2>1897.01.11 안중근 의사의 호, '도마'의 뜻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의 호 '도마'의 뜻"
1897년 받은 세례명 '토마스'의 음역인 '도마'를 사용하다
1897년 1월 11일, 안중근 의사는 빌렘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토마스(Thomas,도마)라는 영세명을 받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마'라는 호는 세례명 '토마스'의 음역이다.
▶안중근 의사의 신앙 활동
안중근 의사는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한 이후 수년간 천주교를 전파하며 계몽운동을 펼친다. 또한 전도활동 중 민족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대학 설립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출처
내용 : 책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인 10』 (서경덕과 한국사 분야별 전문가 지음 / 엔트리)
사진 : 안중근평화신문
3> 1908.06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맞서 승리하다.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가 의병부대 장군이었다는 사실"
영웅, 의병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에 맞서 승리하다
1908년 6월, 안중근 의병부대는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하였다. 이 전투에서 안중근 부대는 일본군 수 명을 사살하고 진지를 점령함으로써 일본군을 완전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 안중근의 평화사상, '포로를 죽이지 마라'
한 달 후, 두 번째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다수의 일본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여기서 안중근은 만국공법에 따라 사로잡힌 적병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원칙 아래 부대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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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URL : http://ahnjunggeun.or.kr/?page_id=1356
4>1909.03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다.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가 왜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었는지"
대한독립의 의지를 드러내려 단지 혈맹을 하다
의병활동으로 펼친 일본군과의 교전은 승리를 거듭했으나, 안중근 의사는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였던 일본군을 풀어주게 되면서 일본군의 역추격을 받아 패퇴한다. 한 달여의 긴 사투 끝에 연해주에 귀환해 지금은 러시아 땅인 연추(현 크라스키노)에서 안중근을 비롯한 12인의 '동의단지회'는 왼속 약지 첫 관절을 끊고, 그 선혈로 태극기의 앞면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외쳤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 붙잡힌 후 옥고를 치르는 동안 동인단지회의 11인의 명단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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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책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인 10』 (서경덕과 한국사 분야별 전문가 지음 / 엔트리)
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http://ahnjunggeun.or.kr/?page_id=1334
5> 1909.10.26
이토 히로부미 저격, 그를 사살한 이유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
민황후의 시해 죄부터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까지
▶안중근 의사가 재판장에서 밝힌 이토히로부미의 14가지 죄목
일제는 재외조선인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자신들이 갖고 있다며 안중근을 일본의 관할구역인 다롄 시 뤼순 감옥으로 이송해 재판을 열었다. 해당 재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이유를 묻자, 안중근은 이렇게 답했다.
- 첫째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
- 둘째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 셋째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 넷째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 다섯째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 여섯째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빼앗은 죄
- 일곱째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 여덟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 아홉째 교육을 방해한 죄
- 열째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 열한째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 열두째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 열셋째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 열넷째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 열다섯째 일본의 태황제를 죽인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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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사진 : 책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인 10』 (서경덕과 한국사 분야별 전문가 지음 / 엔트리)
6> 1910.02.14 2월 14일, 사형을 선고 받다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2월 14일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어떤 날인지"
발렌타인데이보다 더 기억해야 할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죄목으로 이미 공판에 들어가기 2개월 전인 1909년 12월 2일에 뤼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에게 사형을 지시했다. 사형은 죄인에게 내려지는 최고형으로, 이를 선고받았다는 것은 안중근 의사의 모든 독립운동 행위를 부정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의도된 판결로 진행된 부당한 재판임을 간파한 안중근 의사는 공소권을 포기하는데, 이는 일제에게 죽음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었으며, 조국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리고자 함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의거일 이후, 1910년 2월 12일까지 총 다섯 차례의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안중근 의사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고등법원장에게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자신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1910년 2월 14일에 열린 마지막 공판에서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출처
내용 : 책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인 10』 (서경덕과 한국사 분야별 전문가 지음 / 엔트리)
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http://ahnjunggeun.or.kr/?page_id=1334
7> 1910.02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를 있게 한 어머니의 마지막 편지의 내용을"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사형을 선고 받은 안중근은 어머니를 두고 사형 집행을 받게 된 것을 불효라고 생각해 고민하고 있을 때 어머니의 편지를 받게 된다. (이 편지의 소재는 전언이 알려진 것으로 편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 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는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것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 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거라.
출처
내용 : MBC 「무한도전」 역사특집 편
사진 : MBC 「무한도전」 역사특집 편
8> 1910.03.15 옥중 '안응칠 역사'발간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옥중에서 완성한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
1910년 옥중에서 『안응칠역사』를 발간하다.
『안응칠역사』는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2월 13일 옥중에서 집필을 시작하여 이듬해 3월 15일 발고한 자서전이다. 안중근의 탄생부터 순국 전까지 삶의 여정,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투쟁한 사실을 진솔하게 기술하고 있다. 32년의 짧은 인생을 오직 겨레와 나라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 육필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안타깝게도 의거 100주년(2009), 순국 100주년(2010)을 맞이한 오늘날까지도 친필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등사본·번역본만 알려져 있다. 당시, 친필 원본은 일본에 의하여 공개되지 못하고 그들의 한국지배정책의 자료로만 사용되어 왔다. 비밀은 오래가지 않아 한자로 된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한 번역본과 원본을 등사한 등사본이 안 의사가 순국한 지 60년이 지난 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출처
내용/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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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910.03.25 여섯 통의 유서와 마지막 유언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천국에 가서도 대한 독립을 위해 힘쓰겠다던 영웅의 마지막 유언
사형을 하루 앞둔 뤼순감옥으로 면회를 온 두 형제와 홍신부에게 안중근은 여섯 통의 유서를 건낸다. 그것은 어머니와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일부, 그리고 지인이었던 홍신부와 민주교에게 당부를 남기는 옥중 유서였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출처
내용: 책 『당신이 알아야 할 한국인 10』 (서경덕과 한국사 분야별 전문가 지음 / 엔트리)
10> 1910.03.26 영웅의 마지막 순간, 11분
혹시 알고 있으신가요?
"영웅의 마지막 순간"
32해의 빛나는 일생, 그러나 순국까지 걸린 시간 단 11분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순간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의 사형은 뤼순 감옥에서 행해졌다. 안중근 의사는 전날 밤 고향에서 보내온 옷을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와 교수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갔다.
관헌은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는 마음껏 최후의 기도를 하도록 허락했다. 안중근 의사는 전옥의 말에 따라 수분간 묵도를 했고 기도가 끝나자 수명의 간수에 둘러싸여 교수대로 향했다.
드디어 안중근 의사가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옥리 한 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으니 바닥이 ‘꽈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10시 15분 안중근 의사는 완전히 절명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다.
오로지 독립을 위해 힘써온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마음을 SNS에 널리 공유해 주세요!
출처
내용/사진 : 안중근의사기념관
URL : http://ahnjunggeun.or.kr/?page_id=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