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선릉(선정릉)-조선 제9대 성종

by 문촌수기 2020. 12. 5.

선릉(宣陵)은 조선제9대 성종(成宗)과 정현왕후의 능이다.
중종의 능인 정릉과 같은 능원을 쓰기에 통상 선정릉으로 불린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예방차원에서 출입구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중종대왕릉부터 시작해서 선릉인 정현왕후 릉, 성종대왕릉, 재실을 찾아간다.

선정릉 능원 산책 안내도

(글은 왕이 선왕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서술 한다.)
선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 보았을 때 왼쪽(서쪽)언덕이 성종, 오른쪽(동쪽)언덕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선릉의 능역 조감도를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설치했다. 참 감사한 일이다. 눈과 더불어 손가락으로도 높낮이를 볼 수있으니 더욱 실감난다.

선릉(동원이강릉) 형태 조감도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은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469년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 정희왕후의 명으로 13세에 경복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경국대전」과「국조오례의표」를 반포해 조선의 법과 예를 완성하고,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관수관급제를 실시해 백성의 부담을 줄였다. 홍문관을 설치하고 「동국여지승람 」 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구와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재위 25년에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현왕후 윤씨(1462~1530)는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 1473년에 성종의 후궁(숙의)으로 간택되었고, 1480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아들 진성대군(중종)의 즉위를 허락하였다.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문· 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병풍석만 생략하였을 뿐 성종의 능침과 같은 형태이다.

선릉의 홍살문 앞의 연인. 코로나19, 이 힘든 시대에서도 사랑의 모습에서 희망을 갖는다.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조성된 성종의 릉
정자각에서 홍살문으로 나가는 참도
제향공간인 정자각에 오르는 향계(좌)와 어계(우)
정자각 뒤로 정현왕후릉로 가는 신로가 길게 이어져있다.

<선릉ㆍ성종대왕릉>

성종과 정현왕후 능의 석물들이 불이 그을렸던지 여러 군데가 시꺼멓게 멍들어있다. 아마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도굴되고 훼손되었을 때의 흔적일 것이다.

무석인과 석마
혼유석과 고석 귀면
문석인과 장명등
병풍석과 난간석, 망주석에도 훼손의 흔적이 뚜렷하다.
고석의 귀면이 도드라져 보인다.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조성된 성종대왕릉
문석인과 석마

<선릉ㆍ정현왕후 릉>

동원이강릉인 정현왕후릉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신로가 길게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 노출된 난간석주는 정현왕후릉 조성당시 또는 이후 보수과정에서 파손된 것을 묻어 둔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관람도가 조성되면서 빗물에 토양이 유실되어 노출 된 것으로 보인다.
병풍석없이 12개 난간석으로 조성된 정현왕후릉
망주석
능을 지키는 석양, 석호의 등도 시커멓게 그슬린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장명등, 성종대왕릉 앞의 것보다 무늬가 더 뚜렷하고 아름답다.
문석인과 무석인
문석인의 석마
우람한 무석인과 대단히 과장된 머리
본붕과 혼유석, 문석인, 무석인 등 상ㆍ중ㆍ하 3개의 단으로 조성된 능침영역

 <실록으로 보는 왕과 비>


경연經筵과 시詩를 사랑했던 임금 (성종)
할아버지 세조世祖(1417~1468)의 뒤를 이어 작은아버지 예종睿宗(1450~1469) 이 제8대 조선의 임금으로 오를 때만해도 잘산군ㆍ者乙山君(성종)은 왕위계승에는 상관없었던 왕손이었다. 그러나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잘산군은 장인 한명회와 할머니 정희왕후의 노력과 합의로 제안대군(예종의 아들)과 월산대군(성종의 친형)을 제치고 제9대 조선의 국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세자 교육을 받지 못했던 성종은 왕이 된 후 비로소 제왕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늦었던 만큼 성종은 열심히 공부했다. 13세에 왕위에 올라 20세 친정을 하기까지 성종은 거의 매일 두 세 차례의 경연ㆍ經筵(임금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정책을 논의하던 자리)에 빠지지 않았다. 7년 여 동안 성종의 월평균 경연일수는 25일이 넘었고, 아침과 낮에 열렸던 조강과 주강은 물론 석강과 야대를 합하여 하루에 세 차례, 네 차례에 걸쳐 경연을 실시하였다. 성종의 이 같은 경연 강행군은 신하들과 할머니 정희
왕후도 걱정하였다.

"날씨가 무더우니 하루에 세 번 경연에 나아가는 것은 성체ㆍ聖體를 피로하게 할까
두려우니, 주강을 정지하고 석강에도 편복(평상복)으로 행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라고 건의하자
"내가 촌음을 아끼는데 어찌 주강을 정지할 수 있겠는가? 또 편복을 입고 신하
들을 접견할 수 없다” 하였다.

『성종실록』 권6, 1년(1470) 6월 5일

대왕대비(정희왕후)가 임금(성종)이 책 읽기를 그만두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 임금에게 이르기를 “피로하지 않으오?"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마음이 저절로 독실하게 좋아하므로 피로한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권9, 2년(1471) 2월 29일

『경국대전』의 완성과 반포,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의 설치, 사림파의 등용 등은 성종의 학문적 성과와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렇다고 성종이 방에 앉아 글만 봤던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성종은 시를 좋아하고 사냥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로맨티스트, 낭만 군주이기도 했다.
성종은 특별히 시를 좋아해 수시로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 올리게 하여 감상했고, 스스로 어제시ㆍ御製詩를 지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성종실록 곳곳에서 시에 대한 성종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찾을 수 있다.

지난번에 주상께서 「풍월정시風月亭詩를 지어 월산대군에게 주시고 『압구정시亭詩」를 지어 한명회에게 주시었는데, 모두 판자板子에 새기어 달았습니다.
『성종실록 권84, 8년(1477) 9월 28일

풍월정ㆍ風月亭은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정자이며, 성종은 평생 월산대군에게 각별한 우애를 보였다. 압구정은 세조 대의 훈구대신이자 성종을 왕위에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장인 한명회의 정자로 한강변(지금의 압구정동 한강변)에 있었다.

월산대군 이정이 내전ㆍ內殿에서 선온ㆍ宣醞(하사받은 술)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은호ㆍ銀壺가 세 개였다. 양면兩面에는 금으로 글자를 썼는데, 혹은 오언시五言詩이거나, 혹은 칠언시七言詩이었다. 그 제목題目에 이르기를, '형과 함께 기뻐한다. (與兄歡 여형환] 하였고, 또 이르기를, '형을 위하여 짓는다. [爲兄作 위형작] 하였는데, 모두 어제시御製詩이었다. 왕이 전교하기를

“(월산)대군에게 은호銀壺에 시를 새겨서 주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대군이 나가서 경 등에게 보여주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경 등은 그 운韻에 의하여 화답하도록 하라.” 하니, 이조 판서 서거정, 병조판서 유지, 이조참판 김유, 병조참판 어세겸, 도승지 김계창 등이 모두 화답하여 바쳤다.
『성종실록』권123, 11년(1480) 11월 5일

영돈녕 윤호의 생일이므로 주악酒樂과 진수珍羞를 풍족하게 내려 주고 임금이 어제시御製詩 한 편을 손수 써서 비밀히 중관을 보내어 내려 주며 이르기를,
“감히 시라고 지은 것이 아니라, 경이 한 번 즐기고 웃는 데 이바지할 뿐이니, 외인
에게 보이지 말 것이다.” 하였다.

『성종실록』 권235, 20년(1489) 12월 13일

효성이 지극했던 성종은 대왕대비 정희왕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시를 지어 올렸다.

오늘 왕모의 잔치를 와서 여니
마음은 노래자老萊子의 장난보다 더 합니다.
축수하는 술잔에 취했으나 은혜 어찌 갚으리이까
아침저녁 장구히 어김없이 받들리이다.

『성종실록 권 148, 13년(1482) 11월 11일

*선온ㆍ宣醞 : 국왕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술. 국가의 주요 임무나 행사를 마친 후 국왕이 수고한 신하를 위로하기 위해 내리는 술을 선온이라 하였다. 선온의 구체적인 의식은 <국조오례의> 「사신급외관수선로의」에 실려 있다.

*노래자ㆍ老萊子 : 중국 초나라의 현인으로 70세에 색동옷을 입고 부모님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여담이지만, 외국인을 위한 선릉 안내판에 선릉을 'Seolleung(설릉)'으로 표기하였다. 헌릉(헐릉), 인릉(일렁)도 그렇고, 도로 이정표에도 마찬가지이다.'꼭 이래야만 하나' 싶다.
'Seonleung'이라 표기하고 발음은 그들에게 맡길 일이다. '선릉, 헌릉, 인릉'으로 발음을 할려면 왜 못할까? 그래도 굳이 발음규칙을 바꾸어 한다면, 앞의 받침을 따라 뒤의 초성을 발음했으면 한다. '선능, 헌능, 인능' 이렇게.

 <강남개발과 선릉>

[강남 개발의 초석은 연산군?]
정조 때 편찬된 춘관통고에 의하면 선능의 능역은 동으로 5里, 남으로 4里, 서로 3里, 북으로 3里로 둘레가 20里에 이른다. 조선말기까지 동으로 고덕, 남으로 수서의 광평대군 묘까지, 서로 사당의 효령대군 묘 사이, 북으로 한강북쪽 까지는 사가의 무덤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면적이 상당하다. 그러나 이곳은 1970년대 중반부터 강남 개발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녹지로 사가의 무덤과 마을이 없어 개발이 용이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강남 개발의 초석은 연산이 만들었다고 하겠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뒷 이야기]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면서 국내 학자들 간에는이곳 선릉지역 등 일부 훼손된 능역은 제외하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러나 2차에 걸쳐 국제학자들과 학술대회를 하고 이곳 선릉에 들렀을 때 강남 개발의 내용과 주변의 지가 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학자들은 이와 같이 개발 압력이 많고 지가가 높은 지역에 문화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국민적 정신이 세계유산감”이라고 평하면서 조선시대의 모든 능을 등재 신청하여 연속유산으로 하는 게 좋겠다.
고 조언했다. 이러한 격려에 힘을 얻어 국내학자들과 주무부서인 문화재청은 약 1885만m²(570여만 평) 15개 지구의 조선왕릉 모두를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성종의 대여(大奧 : 국상에 사용되는 큰 상여)가 한강을 건널 때 저자도(格子島) 아래 배 4척을 연결하여 건너갔다. 대여가 한강을 건널 때는 물이 줄었으나 건너자마자 강물이 창일(議)18하여 사람들이 탄복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