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랑은 사람입니다.
-
인자인야(仁者人也)ㆍ인자애인(仁者愛人)

17인자인야.hwp

논어공부를 이제 마무리하면서 가장 핵심적인 덕목인 인()을 한 번 더 정리해본다. 시작부터 말하였지만, 논어(論語)’논인(論仁)’이라 할 정도로 인()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왔다. 또한 논어(論語)’논인(論人)이라 할 정도로 사람됨과 사람다움을 진술하고 밝혀 왔다. 결국 ()은 사람[]이요, 사랑(愛人)이요, []이다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 이야기를 풀어 정리해본다.

() : “· 사람 · 사랑은 하나이다.”

  인()을 인수분해 하듯 파자(破子)하면, 사람 ()’에 두 ()’가 된다. 두 사람의 모습이 바로 인()의 생김새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 사이에 미움과 다툼만이 있다면 결국 둘 사이는 깨지고 만다. 한 사람 곁에 또 한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이 나란히 서기 위해서는 그 사이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 모습이 바로 인()의 모습이다. 결국 불인(不仁)이면 비인(非人)이라’, 사랑할 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인(仁)의 모습 : 사람[人]과 사람[人] 사이에 사랑이 있다, 사랑이 사람이다.]

  수많은 우리말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아름다운 말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 사람, 사랑'을 말할 것이다. 연이어 말해보자. ‘, 사람, 사랑, , 사람, 사랑, , 사람, 사랑’. 모든 소리가 비슷하게 들린다. 그렇게 사랑은 사람이고, 사람은 사랑이다. 삶은 사랑이며 사람이 되었다. 예부터 불사르다를 가리키는 'ᄉᆞᆯ다[燒, 아래 아 '살'자]'살아가다의 뜻을 가진 '살다[]'는 같은 말의 뿌리에서 나왔다. ‘사ᄅᆞᆷ’(아래 아, 람자)'도 바로 ᄉᆞᆯ다살다에서 갈라져 나왔다한다. 결국 사람은 타오르는 불과 같이 열정적으로 생()의 의지를 사르면서 살아가는 뜨거운 존재인 것이다. 단순히 살아져 가는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며 활동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람과 삶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노랗다에서 노랑’, 파랗다에서 파랑처럼 우리말에는 용언의 어간에 '~/~'이 붙어 명사를 이루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 바로 '사랑'불사르다ᄉᆞᆯ다[]’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사랑이란 불사르는 것이라는 본래의 의미에서 애틋이 여기어 위하는 마음으로 승화된 것이다. 나를 불태움으로써 세상을 밝히고 따뜻하게 데우는 희생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야말로 참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요 삶을 의미 깊게 하는 것이다. 불사름은 육체적 생명의 본질이며, 사랑은 삶의 가장 큰 명제이다. 결국 삶과 사람과 사랑은 하나이다. 그것이 논어에서 말하는 인()이며 인()이다. 예수님의 사랑타령도 다를 바 없다.

황금률 : “나를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라.”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주엽역 로비의 벽에서 논어의 명문장을 찾을 수 있었다.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은 공자님의 인() 사상을 가르칠 적에 힘주어 강조하였던 바로 그 명문이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 는 뜻으로 논어안연편에 나온다. 이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 7:12).” 세상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이라고 한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고, 사랑 받고 싶거든 먼저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는 간단하고 하나로 통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나를 사랑하는 길에서 시작하여 남에게 미치는 것이다. 공자의 인()과 도()는 한마디로 충()과 서()로 정리할 수 있다. ()은 자기 중심(中心)을 바로 잡아 흔들리지 않으니 삶에 충실하고 사람 된 도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盡己ㆍ진기], ()는 나의 마음을 []을 미루어 타인을 나와 같이[] 헤아려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이다[推己ㆍ추기]. 아래의 [읽기]에서 처음의 두 말씀이 충()에 해당된다면, 다음의 두 말씀은 서()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읽기] ()은 곧 충(, 자기 최선)이며, (,사람 사랑)이다.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사람이 인()하지 못한데, ()를 어떻게 하며, 사람이 인()하지 못한데 악()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팔일0303]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고 어질지 못한데 그 몸가짐에 예의를 갖추고 음악적인 재주가 있다고 해서 진실로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면적인 성실성을 갖추지 못하고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겉치레와 아름다운 음악 따위는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다.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중략) 顔淵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 번지가 인을 물었다. 공자 말하길,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중략) 안연이 그 조목을 물으니,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를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를 말며,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도 말라.” [안연1201] [극기복례 ~ 비례물시ㆍ비례물청ㆍ비례물언ㆍ비례물동]

仲弓問仁. 子曰,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 중궁이 인을 묻자, 말씀하시길, “문을 열고 나가면 큰 손님 뵙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듯이 하며, 자신이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한다.” [안연1202]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樊遲未達. 子曰,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 번지가 인을 물었다. 공자 말하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를 물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번지가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자, “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안연1222]

[쓰기]

자기 ()

()

아닐 ()

바랄 ()

()

베풀 ()

어조사()

사람 ()

[생각하기] 사람됨의 기준 -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파트 단지에 공원과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길 아닌 길'도 금새 생긴다.
입주민들이 편리에 의해 잔디밭을 가로 질러 다니다 보니 잔디가 패이고 죽어 자연스럽게 길이 생겨난다.
결국에는 보도블록을 깔고 담장도 허물어서 쪽문도 만들게 되었다.

어릴 때는 '길 아닌 길'이 잘못되었다고 여겨 걷기를 주저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라서 일까? 소심해서 일까?
"잔디 밭에 들어가지 마라."
"길이 아니면 걷지를 마라."
귀에 딱지 앉듯이 들은 말에 세뇌되었던 모양이다.

이제 나 자신도 그 말을 절대 지킬 수 없어서 그런지, 염치가 무디어져서인지, 그 '길 아닌 그 길'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공자님도 말씀하셨다.

"사람이 길을 넓히는 것이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우주와 자연의 길은 절로 있었겠지만 사람의 길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처음 그 길을 걸은 사람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서 다른 사람이 걷고 이어서 걷고 함께 걷다보니 길이 되었다. 그 길이 의롭기 때문이든 이롭기 때문이든 걸어야 할 까닭이 있었기에 결국 길이 만들어졌다.
걸어야 길이 된다. 걸으면 길이 된다.

이렇게 세상은 반(反)하고 '상식에 도전'하는 자들에 의해 조금씩 나아지기도 한다.
이어 읽기>
반자도지동ㅡ노자ᆞ르네 마그리트ᆞ헤겔

16. 논어의 이상적 인간상: “나는 군자(君子)인가?”

16이상적인 인간상 군자.hwp

[읽기] : 군자(君子)는 어떤 사람인가?

   《논어에서 군자를 검색하면 핵심 사상인 ()’과 더불어 100번 이상 나온다. 그러니 논어인과 군자의 사상서이며, ‘논인(論仁)’이고 군자지학(君子之學)’라 할 수 있다. 군자란 학문을 좋아하고 인예(仁禮)를 실천하며, 말보다 행실이 앞서고 지행일치하는 사람이다. 곤궁하여도 비굴하지 않고 역경에서도 학문을 좋아하며 도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는 삶을 사랑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다. 논어는 시작부터 군자의 사람됨을 말하고 있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 공자 말하기를,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않은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않은가? 세상 사람들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니 군자답지 아니한가?

君子務本, 本立而道生(군자무본, 본립이도생) : 군자는 근본에 힘쓰나니, 근본이 바로 서면 도는 저절로 생겨난다.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 而後從之.”(선행기언 이후종지) : 자공이 군자에 대해 물으니, 자왈 먼저 그 말할 것을 실행하고, 그 뒤에 말이 행실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子曰, “君子欲 訥於言而 敏於行.”(눌언민행) :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말은 어눌해도 행실은 민첩하다.”

曾子曰, “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이문회우 이우보인) : 증자(공자의 수제자)가 말하길,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사랑]을 돕는다.”

孔子曰, “君子 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시사명, 청사총, 색사온, 모사공, 언사충, 사사경, 의사문, 분사난, 견득사의) :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이 있으니, 볼 때는 눈 밝음을, 들을 때는 귀 밝음을, 얼굴빛은 온화함을, 모습은 공손됨을, 말은 진실됨을, 일은 공경함을, 의심되는 일은 묻기를*, 분할 때는 참기 어려움을, 이득을 보았을 때는 의로움을 먼저 생각한다.” <*참조 : 추사 김정희 유배와 제주도 대정향교 의문당’>

참고>君子()愼其獨也(군자()신기독야):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간다.” : 군자의 성실함은 그 혼자 있을 때를 살피면 알 수 있다. - 대학

The superior man must be watchful over himself when he is alone.

[읽기] : 나는 군자(君子)인가?, 소인(小人)인가?

   《논어에서는 삼인유행 필유아사(三人有行 必有我師)’, 즉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여 못난 사람도 내게 본받지 말 것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군자를 본받고 결코 소인은 본받지 말아야 한다. 군자와 소인의 됨됨이를 비교하는 논어대구(對句)를 읽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성찰해보자.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군자 주이불비, 소인 비이부주)

: 군자는 두루 사랑하고 편을 가르지 않고, 소인은 편을 가르면서 두루 사랑하지 않는다.

君子 喩於義, 小人 喩於利 (군자 유어의, 소인 유어리)

: 군자는 의에서 깨우치고, 소인은 이익에서 깨우친다.

君子 坦蕩蕩, 小人 長戚戚 (군자 탄탕탕, 소인 장척척)

: 군자는 마음이 평탄하여 여유가 있고, 소인은 늘 근심하고 걱정한다.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군자 화이부동, 소인 동이불화)

: 군자는 잘 어울리지만 똑같지는 않고, 소인은 똑같은 짓 일삼지만 불화한다.

君子 泰而不驕, 小人 驕而不泰 (군자 태이불교, 소인 교이불태)

: 군자는 태연하면서 교만하지 않고, 소인은 교만하되 태연하지 못하다.

君子上達, 小人下達 (군자상달, 소인하달)

: 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 <*상달 : 천리를 따르기에 현명하고 고상하다. / 하달 : 인욕을 따르므로 비천하고 저속하다.>

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 (군자구저기, 소인구저인)

: 군자는 자신에게서 찾고, 소인은 남에게서 찾는다. (맹자 - 反求諸己ㆍ반구저기)

참고>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군자지중용야 군자이시중, 소인지중용야 소인이무기탄야):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서 때에 맞게 한다. 소인의 중용은 거리낌이 없다(시도 때도 없다, 거리낌이 없다)” - 중용

[생각 만들기와 생각 나누기]

군자와 소인의 비교, 더블 버블맵

나의 군자와 소인 대구(對句)>  
군자는  OOO이요, 소인은 OOO이다.” 
   

군자와 소인 대구, 비주얼 싱킹

 

 

아이들의 활동

김마리아, 독립운동가

분류없음 2019.02.02 11:55 Posted by 文 寸 문촌
2월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국가보훈처는 김마리아(1892.6~1944.3)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ㅡ2월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은 일본 유학중이던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유학생들과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 계획은 ‘2·8 독립선언’으로 이어졌고, 선생도 도쿄 여자 유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닥나무 껍질로 만든 얇은 종이에 복사해 옷 속에 감춰 부산에 도착했다. 교육·기독교·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도쿄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하고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3·1운동 배후 지도자를 지목받아 체포되기도 했다.

원문보기: 한겨레 신문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80784.html#cb#csidx90f5ea286f4d20ebee66307895f1885
ᆞᆞᆞᆞ
김마리아 영상보기>
https://youtu.be/ySStGmqaJoI

이하는 '코리안스피릿' 에서 복사함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53930
김마리아, 안창호, 차경신. [사진제공= 독립기념관]

김마리아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하고 서울로 와서 정신(貞信)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 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다가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인데, 여기에 김마리아 선생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는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어 교육계·기독교계·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황해도 지역에 동지 규합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선생은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였고 선생은 그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정신여학교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해 8월 출감 후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고 정신여학교 동창과 교사들이 중심이 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알게 되었다. 선생과 임원들은 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뒤, 그를 위한 선행 조치로 선생을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적십자회 대한지부를 결성하고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로 보내고, 독립선언문을 배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1월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으며 6개월 여의 예심 중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중병에 걸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니 원판결을 파기하고 1921년 3월 경성복심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병으로 해변에서 휴양하도록 승인 받은 기회를 이용하여 그녀는 상해로 탈출할 수 있었다.

상해에서 수개월의 치료 끝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수학하였으며,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하여 성명서 발표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 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가 휴양하다가 미조리주의 팍대학을 졸업한 후 시카고대학 도서실에 근무하였다. 고학 생활 중에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2월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7월 귀국하였고,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1944년 3월 13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