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2020/11/30'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11.30 모차르트 vs살리에르 (스크랩)
  2. 2020.11.30 카를로스 클라이버 (스크랩)

모차르트 vs살리에르 (스크랩)

음악이야기 2020. 11. 30. 20:00 Posted by 문촌수기

[신문은 선생님] [무대 위 인문학]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 질투 눈먼 살리에리의 고백

최여정·'이럴 때 연극' 저자
입력 2020.11.30 03:27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어!”
세계적인 작가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979년 11월 영국의 유서 깊은 올리비에 극장에서 초연된 이 연극은 이듬해인 1980년 12월 미국으로 넘어가 1181회 공연 기록을 세웠고, 권위 있는 공연예술상인 토니상까지 거머쥐었어요. 마침 영국에 머무르고 있던 체코 출신 음악영화의 거장 밀로스 포만은 첫 시사회 무대를 보고 바로 원작자 피터 셰퍼에게 연락해 영화로 제작하자고 제안하죠. 그렇게 탄생한 영화가 1984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8부문을 수상한 명작 ‘아마데우스’입니다.

◇천재 음악가의 죽음
제목 ‘아마데우스’는 음악가 모차르트(1756~1791)의 이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죠. 아마데우스는 ‘신의 사랑을 받은 자’(amare와 deus의 합성어)
라는 뜻이에요. 이름처럼 모차르트는 신의 은총을 입은 것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작품을 후세에 남겼죠. 서른다섯 살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626곡의 걸작을 만들었습니다.

1981년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오른쪽)와 모차르트의 부인 역을 맡은 배우들이에요. /위키피디아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세간의 화제였어요. 모차르트는 그의 유작인 ‘레퀴엠’을 채 완성하기 전인 1791년 12월 5일, 당시 유행한 악성 장티푸스에 걸려 심하게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어요. 그러나 모차르트의 정확한 사인은 지금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비극적이게도 모차르트의 유해는 빈 근교 공동묘지 어딘가에 비석도 없이 묻혀 현재 그의 무덤을 찾을 길이 없답니다. 모차르트의 후손도 끊겨버렸지만, 사람들은 천재 음악가를 위해 오스트리아 빈 인근 중앙묘지에 시신 없이 비어 있는 무덤과 석상으로 모차르트를 기리고 있죠.

◇재능 질투한 2인자의 독살설
연극은 모차르트 죽음에 독살설을 제기합니다. 모차르트 독살설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것은 1830년이었어요. 러시아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작품이 독살설에 불을 지폈죠. 극작가 피터 셰퍼 역시 푸시킨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두 사람은 모두 오스트리아 궁정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모차르트 독살범으로 지목해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재능을 시기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거죠. 극 중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흠모하고 경탄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이런 재능을 허락하지 않은 신을 원망하고, 결국 신이 선택한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인물로 나옵니다. ‘천재 모차르트와 질투의 화신 살리에리’라는 이 극적인 대립은 극에 팽팽한 긴장감을 더하면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라이벌을 만들어냈죠.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이라는 심리학 용어까지 만들어졌습니다. 1인자의 뒤를 잇는 2인자가 느끼는 자신의 평범함, 좌절 및 무기력, 질투의 감정으로 생겨나는 심리를 설명하는 용어예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스승

안토니오 살리에리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의 레냐노에서 태어났어요.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그는 열네 살에 고아가 됐지만, 작곡가 플로리안 가스만의 눈에 들어 오스트리아로 가는 기회를 얻게 돼요. 그리고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요제프 2세의 인정을 받아 24세 때 궁정 오페라 감독으로 임명됐습니다. 38세 때는 황실의 예배와 음악 교육을 책임지는 ‘카펠 마이스터’ 자리까지 차지하죠. 음악가로서는 오스트리아 제국 최고의 직위였어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살리에리의 업적 중 지금까지도 크게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교육자로서의 면모였어요. 베토벤과 슈베르트도 그의 제자였죠. 베토벤은 그를 위해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3곡의 소나타(작품 12)’를 바쳤다고 해요. 슈베르트는 많은 편지에서 ‘감사한 살리에리 선생님’으로 부르며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할 정도였어요. 살리에리는 살아생전 35편의 오페라를 썼고 대부분의 작품이 당대에 큰 성공을 거두며 인정받는 작곡가였습니다. 하지만 연극 속에서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뛰어넘지 못한 자신의 범작들은 사라지고 모차르트만이 그 명성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자신의 예견처럼 그의 인기는 19세기 들어 사그라들었죠.

안토니오 살리에리 작곡, The Best of Salieri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muzmyImRsLxsXtnVlw4GYl46syU9_Ij7Q

The Best of Salieri

www.youtube.com

 

댓글을 달아 주세요

카를로스 클라이버 (스크랩)

음악이야기 2020. 11. 30. 19:40 Posted by 문촌수기

[박종호의 문화一流] 산속에서 바람처럼 세상을 등진 지휘자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는 겨울에도 아름답다. 밤새 눈이 내려 렌터카를 포기하고 택시를 잡는다. 호텔의 컨시어지들조차 그곳을 몰랐으며, 택시 기사들도 고개를 흔든다. 결국 내가 내미는 ‘콘시차’의 주소 하나만 보고서 한 기사가 나의 모험에 가담한다.
차는 가파른 산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숲은 짙어지고 침엽수들은 높아진다. 마을은 보이지 않고, 낮인데도 사방이 어두워진다. 그런데 오르막길에 나무가 쓰러져 있고 눈까지 쌓여 있다. 이제는 기사도 포기한다. 나는 차를 내려 혼자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내비게이션도 잡히지 않는다. 몇 번이나 산길을 잘못 들고 몇 차례나 외딴 집을 두드린다. 이윽고 한 아주머니가 나와 작은 교회를 가리킨다. 교회의 마당에 작은 묘지가 있다. 드디어 ‘카를로스 클라이버’라고 새겨진 비석을 찾는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십여 년이 걸린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1930~2004)는 지휘자 에리히 클라이버의 아들로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음악사상 부자(父子)가 모두 초일류 지휘자였던 거의 유일한 경우다. 그가 베를린에서 태어난 것은 아버지가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치가 정권을 잡자, 다섯 살의 카를로스는 아버지를 따라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부자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버리고 아르헨티나를 새 조국으로 삼았다.

아버지 에리히와 함께 시대를 풍미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그는 진정한 예술가이자 자유인이었다. /유니버설뮤직(Gabriela Brandenstein/DG)

카를로스는 지휘자가 되기 위한 최상의 조건에서 났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을 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아버지는 베를린으로 돌아가 원래 자리에 복귀했다. 반면 카를로스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아인슈타인을 배출한 명문 취리히 연방공대에서 화학을 전공한다.
그러나 피는 어쩔 수 없었다. 음악이 간절했던 카를로스는 아버지 몰래 뮌헨의 2류 극장에 말단으로 취직하였다. 그는 극장의 밑바닥 일부터 배웠는데,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가 지휘하는 데에 큰 자산이 되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있는 베를린 부근 포츠담의 작은 극장에서 지휘자로 데뷔한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애써 모르는 척했지만, 아들은 연이어 성공을 거둔다. 이윽고 그는 1974년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여, 전설로 남은 이 공연으로 최정상의 지휘자 반열에 오른다. 이후로 그가 녹음하는 거의 모든 음반들이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는 명반이 되었다.

프리랜서 지휘자로 자유롭게 활동
이렇게 클라이버는 정상에 섰고, 독특한 개성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많은 극장과 오케스트라에서 그를 원하였지만, 그는 본인이 원할 때에 원하는 곡만 지휘할 뿐이었다. 그는 데뷔 초기의 잠시 동안 외에는 악단이나 극장의 직위를 가지지 않은 채로 프리랜서로 지냈다. 즉 바람처럼 떠돌다가 하고 싶을 때에만 지휘대에 올랐다. 이렇게 기분 따라 다녀도 그가 원할 때면 어디서나 일정을 내어주고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는 사실이 그가 최고임을 입증하는 예일 것이다.

슬로베니아 콘시차

그는 명성보다는 자유를 원했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지휘자 카라얀은 “그는 냉장고가 비어야만 지휘하러 나온다”고 했다. 비아냥거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생활로 조용히 살던 수도사 같은 자세를 칭찬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클라이버가 한 시즌에 한 번이라도 지휘해주기를 원했던 세계 최고 수준의 뮌헨 국립 오페라극장은 직함도 없는 그의 방까지 마련해 놓고, 그가 원할 때면 언제든지 올 수 있도록 기다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정신없이 사는 동안 그는 유유자적하게 자유를 누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유랑 가객은 삶을 마감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의 새 음반을 갈망했지만, 그는 흔한 베토벤이나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 하나 남기지 않고, 그렇게 청중이 원했던 바그너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도 한두 작품만 남긴 채로 사라졌다.

아내 고향 슬로베니아에서 生 마감
클라이버는 자신에게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어느 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고향인 슬로베니아의 산중 마을 콘시차였다. 그는 아내의 무덤이 내려다보이는 집을 구해서 자신의 마지막 길을 준비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묘를 모르게 해달라는 말과 함께….

슬로베니아 산중 마을 콘시차에 있는 작은 교회 앞마당에 카를로스 클라이버 묘지가 있다. /박종호 대표
그러나 광적인 팬들의 화환이 그의 묘에 놓인 것은 장례가 끝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들을 미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부터도 그의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볼 때마다 사무치게 그가 그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해 겨울에 나도 그를 찾아서 콘시차까지 반쯤 걸어서 눈길을 갔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 음악 생활에서 밀린 숙제를 마무리하는 기분이었다.
클라이버의 화려한 지휘 스타일이나 자유분방했던 생활에 그를 비난하는 얘기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돌출적인 행동을 못마땅해하였고, 과장되었다고 흉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그가 떠난 지금 생전의 행동이 출세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님은 자명해졌다. 도리어 그런 그를 잠시나마 오해한 우리가 부끄럽다. 그는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채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이 이끄는 대로만 살고 연주하고 싶었던, 진정한 예술가요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
조선일보 입력 2020.11.30 03:00

https://youtu.be/2Sw97NzvvsE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