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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4.15 세한도 글로 읽다.

세한도 글로 읽다.

카테고리 없음 2021. 4. 15. 10:15 Posted by 문촌수기

세한도 족자 전체 풀이

1. 세한도 머릿글, 완당 세한도 ㅡ 김준학 표제
1914년 초, 김준학은 오랜 병을 털고 일어나 두루마리 앞쪽에 큰 글자로 제목을 쓰고 청나라 문인 풍계분의 시운을 따라 시를 덧붙여 썼다.

세한도 전체 족자 표제어

阮堂歲寒圖
甲寅春正月後學金準學敬書.
松柏有貞摻 不與凡俗諧
寄迹帐阿久攀援莫誰階
想像阮堂老奇氣懾着崖
及門瑰瑋者 道義文章皆
薄翁北學日 相贈畫根菱
藏篋走萬里 題詠名士偕
墨妙看虹月流傳到吾儕
荏苒六十載 運晚人事乖
墓此後彫質 聊以寄所懷。
次韻歲寒圖詩,寄贈家從叔星年氏嶽易旅次,
仍壽其六十初度,
時甲寅仲春之什日遯菴生題于開城郡北山彩
墨軒
余既書卷首五大字,今又附錄拙詩於其末,
盖用馮景亭編修韻也,馮善州書,潮翁懷人詩云,
揮灑如風雨,滿紙草聖傳,今我病腕,塗鴉有
汚宝軸,殊可塊也.
印文)
매화서옥ㆍ 梅花書屋 / 소매미정초ㆍ 小梅未定初
김준학인ㆍ金準學印 / 소매ㆍ小梅

1. 풀이)
김준학(1859~1914 이후)의 글
완당세한도
갑인년 춘정월에 후학 김준학은 삼가 쓰다.
송백은 곧은 지조가 있어 범속한 나무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바위 사이에 몸을 숨긴지 오래라도 아무도 부여잡고 오르지 못하네.
완당 노인을 떠올려보면 기이한 기상으로 푸른 절벽에 올랐으니
문하에는 뛰어난 제자들이 모두들 도의와 문장을 갖추었네.
우선옹1>이 북경에 가는 날 완당이 정신의 뿌리가 담긴 그림 한 폭 그려주었네. 2>
책 보따리에 넣어 만 리를 달려가니 명사들의 제영을 붙여주었네.
오묘한 솜씨는 미불의 서화를 보는 듯3> 이리저리 떠돌다 우리에게 왔네.
그럭저럭 60년 세월이 흘러 운수가 쇠하여 인간사도 어긋났네.
한겨울 변치 않는 지조를 본받는 것으로 그저 감회를 부치노라.
세한도의 시에 차운하여 악양 객지에 있는 종숙부 성년에게 부쳐드리고, 아울러 그의 육십년 생신을 축하한다.
갑인(1914)년 2월 20일 둔암생이 개성군 북산 채묵헌 에서 쓰다.
내가 두루마리 첫머리에 크게 다섯 글자를 쓰고 나서 그 끝에 내 시를 덧붙여 썼다.
시는 경정 풍편수4>의 운을 썼다. 경정은 초서를 잘 썼으니, 우선 옹의 회인시에 “휘갈기는 붓은 비바람과도 같아서, 종이 가득 초성의 솜씨 전하네”
라고 했다. 지금 내가 병든 팔로 벅칠을 하여 보배로운 두루마리를 더럽혔으니 몹시 부끄럽다.
색인)
1> 김정희의 제자 우선 이상적을 말한다.
2> 세한도 를 말한다.
3> 송나라 미불ㆍ米불(1051~1107)이 이름난 서화를 많이 모았다. 그것을 배에다 싣고 강으로 가니 밤에 광채가 뻗어서 사람들이 미가홍월선ㆍ米家虹月船이라 하였다.
4> <세한도>에 글을 쓴 풍계분을 말한다.

"36년간의 세한 속에서 송백의 마음을 지키고자 애쓰다."
1910년 한반도에 혹독한 세한이 찾아왔다. 개항과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은 단계적으로 대한제국의 권리를 빼앗았고, 무력으로 국권을 탈취했다. 조선의 문예는 얼어붙었다. 시련의 시기에 서화가들은 은거하거나 단체를 결성하여 후학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일본식 교육을 받은 신세대 서화가들은 일본
서화풍을 수용해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전람회에 그림과 글씨를 출품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우리 문화재를 조사,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서화나 도자기, 서적들을 강제로 빼앗거나 헐값에 사들였다. 계속되는 일제의 수탈과 억압 속에 명문가에서 대대로 소장되어 온 작품들이 흩어졌다. 많은 수의 김정희의 서화와 관련 자료가 경매에 나왔고, 그의 작품을 모으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나라를 잃은 36년간의 추위 속에서 변치 않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송백의 마음을 잃지 않고자 애썼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세한도>는 지켜졌다.

김준학, 세한도를 새롭게 꾸미다
<세한도>를 갖고 있던 김병선은 1883년(고종 20) 무렵 서울을 떠나 1889년(고종 26)부터는 개성 인근
해풍현에 은거하였다. 그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1891년(고종 28) 봄, 삶을 마쳤다. 김병선이 죽자 <세한도>는 그의 아들인 소매 김준학(1859~1914 이후)에게 전해졌다. 김준학은 1876년(고종 13) 식년시에서 역과 1등을 차지했지만 역관으로서의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는 은거를 원했던 부친을 따라 개성에서 「화동창수집」등 부친의 자료를 정리, 보완했다.
김준학은〈세한도>에 세 차례 글을 남겼다. 먼저 반희보의 글 다음에 "집에 소장한 세한도에 더하여
시를 쓰다."라 하여 시를 남겼다 .언제 글을 적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바다도 해도 어둑한데"
로 시작하는 첫 부분과 "지금 시들고 마른 모습을 비웃지 말고 용 비늘이
발해를 진동시키는 일을 지켜보게나."
라는 마지막 부분으로 미루어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생각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는 시들고 마른 우리나라가 국력을 회복하여 언젠가는 크게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표현했다.
김준학의 두 번째 시는 청나라 문인들의 글이 끝나는 부분, 즉 장요손의 글 뒤에 적혀 있다. 김준학은 1914년 정월 28일에 오랜 병을 이기고 일어나 <세한도>를 보고 이 글을 썼다. 그는 생일날 벗과 함께 개성의 채묵헌F에서 그림을 보고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마음이 생겨, 주익지의 시운을 사용해 시를 썼다고 하였다.
그리고 1914년 정월에 '완당세한도
라는 제목을 큰 행서로 쓰고 2월에는 그 아래 시를 남겼다.(위 사진ㆍ글)
이 시는 악양(경상남도 하동군) 객지에
있는 종숙부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세한도〉 발문 중 풍계분이 쓴 시의 운을 빌려왔다.
김준학은 이상적이 청나라 문인들을 그리워하면 지은 「회인시 」에서 풍계분의 초서를 높이 평한
것을 언급하며 자신이 병든 팔로 보배 두루마리에 먹칠해 부끄럽다고 하였다.
김준학은 나라를 잃은 충격과 이어지는 일제 강점 속에서〈세한도>를 보면서 부친 김병선이 남긴 뜻을
환기하며 마음을 다잡고자 노력했다. 그는 1914년 정월에〈세한도>의 제목을 써서 앞부분에 붙이
면서 두루마리를 새롭게 꾸몄을 가능성이 크다
. 그리고 자신의 55세 생일과 종숙의 환갑에 맞추어
청조 문인들의 시를 차운해 연이어 글을 남겼다. 이는 자신이〈세한도>의 소장자임을 분명히 드러내
고자 했던 의도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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