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ᆞ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첫 여행지가 독립운동의 거목들이 태어나신 내포 지역이었습니다.
<홍성, 만해 한용운 생가ᆞ기념관>

서울 성북동 심우장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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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에 공원과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길 아닌 길'도 금새 생긴다.
입주민들이 편리에 의해 잔디밭을 가로 질러 다니다 보니 잔디가 패이고 죽어 자연스럽게 길이 생겨난다.
결국에는 보도블록을 깔고 담장도 허물어서 쪽문도 만들게 되었다.

어릴 때는 '길 아닌 길'이 잘못되었다고 여겨 걷기를 주저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라서 일까? 소심해서 일까?
"잔디 밭에 들어가지 마라."
"길이 아니면 걷지를 마라."
귀에 딱지 앉듯이 들은 말에 세뇌되었던 모양이다.

이제 나 자신도 그 말을 절대 지킬 수 없어서 그런지, 염치가 무디어져서인지, 그 '길 아닌 그 길'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공자님도 말씀하셨다.

"사람이 길을 넓히는 것이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우주와 자연의 길은 절로 있었겠지만 사람의 길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처음 그 길을 걸은 사람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서 다른 사람이 걷고 이어서 걷고 함께 걷다보니 길이 되었다. 그 길이 의롭기 때문이든 이롭기 때문이든 걸어야 할 까닭이 있었기에 결국 길이 만들어졌다.
걸어야 길이 된다. 걸으면 길이 된다.

이렇게 세상은 반(反)하고 '상식에 도전'하는 자들에 의해 조금씩 나아지기도 한다.
이어 읽기>
반자도지동ㅡ노자ᆞ르네 마그리트ᆞ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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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시장에서 인왕산 골짜기 수성동계곡으로 올라가는 누상동 골목길은 참 정겹다. 작은 가게, 음식점, 카페는 눈과 코와 입을 즐겁게 한다.
박노수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뜰 안에서 담소도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을 마련해준다. 골목을 나와 잠시 걸으면 '윤동주하숙집' 현판과 태극기가 새겨진 동판이 붙은  2층 양옥집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시절 2년 후배 정병욱과 하숙을 하였다.이 하숙집은 당시 조선의 항일작가 김송(金松, 1909-1988)의 집이다. 하숙한 시기는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4개월 짧았지만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성동 계곡을 자주 찾아 시상을 떠올리며 시를 지은 윤동주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이 시기에 '십자가', ‘태초의 아침’, ‘못 자는 밤’, ‘바람이 불어’ 등 10편의 시를 썼고, '별헤는 밤', '자화상' 등 그의 대표작도 바로 이 즈음에 배태되었을거다.
연희전문학교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했으나 지도교수가 위험하다고 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육필 시 원고를 묶어 후배 정병욱에게 맡겼다. 정병욱은 시골 고향 부모님께 이 시집을 맡겨서 다행히 해방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윤동주 하숙집'을 찾기 전 오른편 골목안  담장에 풀잎에 물을 주는 소녀그림이 그려져있다. 박노수 화백의 그림이상으로 감동을 준다. 이 그림을 그린 이의 마음은 참 따뜻할 것이다.

'윤동주 하숙집과 풀잎 소녀'

박노수 미술관을 나와 윤동주 하숙집과 수성동계곡을 오르는 골목길을 걷다보면 인왕산의 병풍바위ᆞ치마바위가 보인다. 윤동주가 다녔을 그때에는 인왕산 봉우리가 훤하게 다 보였을 것이다.

수성동계곡을 오르며 뒤를 돌아 누상동 골목길을 내려본다.

수성동 계곡, 윤동주와 정병욱은 하숙집에서 걸어서 10분이면 올 수 있는 이 계곡을 찾아 아침 운동을 즐기고 세수도 하였다 한다. 그가 걸었던 길을 걷는 것 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

윤동주가 육필로 써 묶은 시집 한권을 함께 하숙했던 후배 정병욱에게 증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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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인문학 산책의 첫걸음은
한ᆞ중 평화의 소녀상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된다. 한성대 입구역 6번출구 버스정류장 작은 가로공원에 있다.
여느 곳의 평화의 소녀상과는 많이 다르다. 조선의 소녀 옆에 중국의 소녀가 앉아있다. 겨울이 되면 공감하는 이들이 목도리를 둘러주고 모자도 씌어준다.
나는 동상(銅像)이 아니라 그때를 살았던 소녀의 고통을 상상하며 사람으로 그렸다.

2015년 한중 합작으로 이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였다. 일본군의 성노예로 함께 고통받고 숨죽이며 서로를 위로하며 견뎌왔던 친구가 여기까지 찾아왔다.
전쟁 속의 광기가 여성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는가를 후세에 길이 전해지기 바라며 일본 정부의 일제 만행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촉구하는 바이다.

<우리의 평화 소녀상 상징과 의미>
● 거칠게 잘린 머리카락 : 부모와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단절된 것을 상징한다.
● 꽉 쥔 주먹 :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 빈 의자 :
  (과거)세상을 떠난 위안부 할머니들의 빈자리이다.
  (현재)지금 내가 같이 앉아 위로하고 공감하는 자리이다. 성북동 평화의 소녀상 빈자리는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의 위안부소녀상의 자리이기도 하다.
  (미래)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역사를 잊지 않고자 맹세하며 앉을 자리이다.
● 어깨에 앉은 새 : 자유와 평화의 상징으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과 지금의 우리를 연결해주는 고리이다.
● 할머니 모습의 그림자 :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다 풀지 못한 가슴앓이와 한(恨)이다.
● 그림자 속의 하얀 나비 :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다시 태어나 한을 풀기를 바라는 염원이며 영혼의 환생이다.
● 맨발과 발꿈치가 들려 있는 모습 : 도망가지 못하도록 신발을 빼앗 긴 모습이자, 고향에 돌아와서도 마음 편하게 정착하지 못한 할머니들의 설움이다.

중국 소녀상 뒤로는 여기까지 걸어온 발자국이 찍혀있다. 중국의 소녀가 우리에게 말을 건낸다.
  "먼길을 돌고 돌아 친구를 찾아와 옆에 앉았습니다. 있던 자리에선 말도 못하고 숨죽여 왔습니다.
친구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소곳하면서도 진지하고
잔잔하면서도 진실되게 이야기하는 친구와 같이하고 싶었습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결코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 이제 함께 하려합니다."
일본이 계속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않고 과거의 행적에 변명하면 할수록 평화의 소녀상을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온 세상으로 계속 번져갈 것이다. 우리들이 할 일이다.

주 대한민국 일본 대사관 앞 평화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1000회째인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2017년 9월 22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도심 한복판 세인트메리스 스퀘어파크에서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이 열렸다. 미국 대도시에 세워진 첫 기림비로 동판에는 “1931년부터 45년까지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태평양 13개국 여성과 소녀 수십만 명이 일본군에 의해 이른바 ‘위안부’로 끌려가 고통을 당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샌프란시스코 AP=연합뉴스]

샌프란시스코 시내 공원에 있는 한국과 중국, 필리핀 소녀가 손을 잡고 서있고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이를 지켜보는 조각상.<사진=온라인커뮤니티>

작은 평화의 소녀상 건립 프로젝트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학생회들에 호소하여 정동의 프란치스코 회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운바 있는 이화여자고등학교 역사동아리 ‘주먹도끼’는 더 많이 위안부 문제를 알릴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500명이 1000원씩만 모으면 세울수 있는 50만원 상당의 '작은 평화의 소녀상'을 100곳의 고등학교에 세우는 '100개의 고등학교에 100개의 작은 소녀상 건립' 프로젝트를 펼치게 되었다. 2014년 개교한 우리 매홀고등학교도 2016년도 학생회를 중심으로 전교생들이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여 '작은 평화의 소녀상'을 학교에 건립하였으며 실내에 햇살드는 작은 정원에 모시면서 역사와 인권과 평화교육을 이어갈 것 있다.

"니가 나를 찾아오다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제게 보내신 편지(영혼의 모음, 1971.11)를 이제사 받았어요."
"그랬구나. 너를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이제 너와 함께 갈 수 있겠구나."
"그래요. 내 친구 여우도 같이 갈거예요."
"그래, 나도 너와 관계맺게 해준 생떽쥐뻬리 아저씨의 <어린 왕자>와 <화엄경>은 갖고 가야겠다."

2010년 3월 11일 새벽.
어린 왕자가 길상사 행지실(行持室, 지금의 진영각)을 찾아와 마루에서  법정 스님을 만났다.
어린 왕자가 지구를 떠나 제 별로 돌아온 이후에도 의자에 앉아 늘 석양을 바라보았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한 이후에는, 더 이상 해 지는 것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길상사 진영각 왼쪽 기둥옆에는 '빠삐용 의자'만이 덩그러이 놓여 있다. 법정 스님께서 불일암에 계실 적에 손수 만드신 그 의자인지는 모르지만 그대로 빼닮았다. 법정 스님께선 이 의자에 앉아 인생을 허비하였지를 돌아보셨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 왕자처럼 해지는 광경도 즐겨 보셨다.
나도 이 의자에 앉아 제 인생을 얼마큼 허비하였는지 돌아보고 싶지만, 감히 그 자리에 앉지는 못하고 옆마루에 걸터앉아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을 올려다본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서 들은 비밀처럼,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야하나 보다.

길상사 진영각, 빠삐용 의자.

심우장(尋牛莊), 때는 1937년 3월. 아직 잔설에 서늘하다. 그림 속에 세 명의 주인공이 한자리에 만났다.
북정마을의 심우장 언덕 위로 성벽이 보인다. 한양도성 북악산 동북자락 성곽이다. 일제의 패망을 암시하듯 '돌집' 위의 남녘 하늘에는 핏빛 전운(戰雲)이 감돈다.
세 명의 주인공은 만해 한용운, 일송 김동삼, 시인 조지훈. 만해와 일송은 환갑을 바라보는 초로이며 지훈은 아직 감수성 풍부한 열일곱 청춘이다. 그들이 일송 김동삼의 장례식, 심우장 마당에서 만난다.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 ~ 1944)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만해 한용운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만해 선생은 성북동에 자리잡으면서 집을 북향으로 짓게 하였다. 집은 햇살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남향으로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일제의 조선총독부, '돌건물'을 향할 수 없다며 등을 돌렸다.
당호 심우장(尋牛莊)은 '소를 찾는 이의 집'이라는 뜻이다. 자기의 진면목과 부처의 도를 찾아가는 열 단계의 길이 곧 심우이며,  그 첫 걸음이 또한 심우[尋牛]이다. 그렇게 찾은 소를 길들이고[牧牛], 나아가 잊어 버리고[忘牛], 나도 비우고[人牛具忘ᆞ空], 중생을 제도하고자 저자거리로 나간다.
 ㅡ참조ᆞ산사로 가는 길ᆞ벽화(심우도)
http://www.korearoot.net/sansa/source/me6/5.htm
 구도의 심경으로 자신의 당호로 삼고, '찾았으면 또한 잊지 말 것'을 역설하면서 <심우장>을 제호로 시를 지었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  심우장1

만해의 시는 경건하고도 에로틱하다. '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겠다. 여러 시 중에서 나는 이 시를 참 좋아한다. 대체 당신은 누구시길래?
ㅡ 인제 만해마을에서 그냥 씀

♡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1878∼1937)
경북 안동 사람으로 본명은 김긍식이다. 독립운동을 하다 옥사하신 큰 인물이었음에도 내가 몰랐다. 참으로  송구스럽다. 이제라도 기억하고 보답하고 그 뜻을 전하고자 이 분을 그렸다.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김동삼 장군은 유교적 학식과 함께 '만주의 호랑이', '남만의 맹호’로 불릴 정도로 용맹한 기질을 겸비하여 김좌진, 오동진 등과 3대 맹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후에 독립군을 통합하고 통의부 총장을 역임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며 옥고를 치르다가 그만 1937년 3월 3일 순국하였다.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독립기념관에 옥중 유언인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던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옥중 순국 후에도 일제는 그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않았다. 가슴에 '수인번호 730, 본명 김긍식(金肯植)'을 붙인 채 시신은 방기되어 있었다. 소문을 듣고 만해 선생이 형무소를 찾아가 시신을 수습하고 심우장에 모시면서 장례식을 치뤘다. 5일장이었음에도 찾아온 이는 스무명 정도였다. 일제의 탄압에 꼬리 잡힐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지훈 부자가 있었다.
만해는 "내, 이 어른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장례식은 심우장 마당에 차렸다.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 조헌영(한의사, 독립운동가, 제헌의원, 납북)이 그 비용을 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장은 유해는 유언대로 한강에 뿌려졌다.

시인 조지훈은 일송선생 추모시에서
"아, 철창의 피눈물 몇 세월이던가
그 단심 영원히 강산에 피네
심상한 들사람들도 옷깃 여미고 우러르리라
온 겨레 스승이셨다. 일송 선생 그 이름아"
<일송선생 추모가 일부 조지훈시, 이강숙곡>
일송 김동상(본명, 김긍식) 수감사진

한편, 서촌의 우당기념관에서도 우당 이회영과 함께 한 독립운동가 31인에서도 김동삼은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경북 유림대표, 경학사. 신흥강습소 설립운영에 참여 부민단 조직. 서로군정서 참모장. 통의부 조직. 국민대표대회의장. 정의부 참모장. 행정위원. 민족유일당 촉진회 위원장. 피체, 10년형 선고, 옥사.>

♡ 조지훈(趙芝薰, 1920 ~ 1968)은 경북 영양사람, 본명은 동탁(東卓). 일제 강점기 이후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 시인(청록파)이다.
성북동 나들이 초입, 방우산장에서 만난 시인 조지훈을 여기 심우장에서도 떠올려본다.
만해는 심우(尋牛)한다했는데,
시인은 방우(放牛)해도 좋다고 했다.
'찾는 것'과 '놓아 버리는 것'이 크게 다르지만 십우 단계를 걷다보면 결국 같은 길에서 만나는 것 아닐까?
조지훈은 아버지 조헌영을 따라 심우장에서 치룬 김동삼의 장례식에 참례하였다. 이때가 열 일곱살, 어린 총각이다. 이 장례식에서 일송의 원혼을 달래는 승무제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훈이 심우장 마당에서 승무를 보는 것을 상상하였다. 시인은 열 아홉에 <승무> 시를 지었다.
   훗날 시인은 “용주사 승무제에서 어느 이름 모를 승려의 승무를 보고는 밤늦도록 용주사 뒷마당 감나무 아래에서 넋을 잃고 서 있었다”며 “당시 승무의 불가사의한 선율을 다음 해 여름에 비로소 시로 지을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불교신문>에서)

시적 소질도 있었지만 불교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이 어떻게 스무살도 안된 어린 나이에 이런 깊이 있는 시를 지을 수 있을까?
일제시대, 많은 문예인들이 자발적으로 때론 어쩔 수 없이 곡학아세하면서 오명을 남겼지만 지훈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결벽과 절의의 선비였다. 해방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을 질타하는 대쪽같은 기질을 보였다.
그의 선비정신은 수필 '지조론'에서 잘 나타나있다.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ㅡ 지조론 중에서

김동삼의 장례식, 심우장 마당에서 일송의 원혼을 달래는 승무와 이를 지켜본 어린 총각 지훈의 감상을 상상하며, 그 순간을 그렸다.  이렇게나마 일송 김동삼 장군을 전하고 싶었다. 지훈의 나이쯤에 내가 애송했던 <승무>를 다시 불러 본다.

<승무(僧舞)> ㅡ  조 지 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을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 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런 뮤지컬이 있었다. 다시 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오수당(午睡堂), 낮잠자기 좋은 집!
말만 들어도 위로가 된다.
일 없이 생각 없이 낮잠에 빠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비가 책베개를 하고 팔베개로 높여서 툇마루에 누웠다. 포근한 햇살을 덮고서 달콤한 낮잠에 빠졌다. 이제 그림은 다 그렸다. 제호를 붙이고 낙관만 하면 된다. 그림 속에도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에 빠진 선비를 그렸다. 버드나무는 푸르게 늘어지고 복숭아 꽃 향기는 은은하게 전해진다. 이 그림을 '수하오수도(樹下午睡圖)라 제호하는 것은 어떨까' 누워 생각에 잠기다 만족해하며 낮잠에 잠겼다.
이 선비는 누굴일까? 나도 그 자리에 누워 낮잠에 빠지고 싶다.

또한 그렇다.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이라! 
밖은 시끄러워도 문을 닫아 버리면 여기가 곧 깊은 산골이구나.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신경쓰며 간섭하고, 원망하며 변명하고, 일희일비할 일도 아니다. 누가 날더러 비겁하다 할지라도, 어떻게 해보겠다며 먼저 나서 애써 가르칠 일도 아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사가 시끄러워도 내 귀를 닫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여기가 곧 적막한 산골이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서 버린다'는 시인 백석(白石)의 심정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
그냥 두자. 나를 달래자. 먼저 나를 구하자. 나를 구하지 못하고는 어느 누구도 구할 수 없다. 매화는 피었다 지고, 단풍은 물들었다 시든다. 다 때가 있다.

최순우 옛집 뒷뜨락ᆞ오수당(午睡堂)
~최순우는 단원 김홍도의 화첩에서 오수당 글씨를 찾아내고 그대로 집자하여 당호로 삼았다. 최순우는 한양도성 밖 성북동 이곳에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서서'를 썼다.

최순우 옛집 안채뜰ᆞ'두문즉시심산' 현판

단옹 김홍도의 수하오수도

김홍도(金弘道)ㅡ수하오수도(樹下午睡圖) 제시.

桃紅復含宿雨, (도홍부함숙우)
柳綠更帶朝煙. (유록갱대조연)
寫與 卞穉和. 檀翁. (사여 변치화, 단옹)

복사꽃은 붉더니 간밤의 비를 머금었고,
버드나무 초록빛은 아침 안개띠를 둘렀네.
ㅡ변치화에게 그려주다. 단옹 김홍도

김홍도는 낮잠을 무척 즐겼거나 바랐던 모양이다.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고면거사(高眠居士)'라는 자호를 가진 걸 보면, 높은 베개를 좋아했던가 보다.
단옹은 왕유(王惟)의 전원락(田園樂) 싯구를 가져오면서 그림을 그렸다. 이를 일러 화중유시(畵中有詩)라던가 시중유화(詩中有畵)라던가?
왕유의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花落家童未掃(화락가동미소)
떨어진 꽃잎을 아이는 아직 쓸지않고
鶯啼山客猶眠(앵제산객유면)
꾀꼬리는 우는데 손님은 아직도 꿈결이다.

 
그 날 처럼 눈이 푹푹 나릴 때,
흰 당나귀를 타고
시인은 자야를 찾아왔다.
응앙 응앙 울음 소리에
사당 문이 열린다.

이제서야 오셨구려
참 머언 길을 오셨네요.
괜찮아요.
아무 말씀 마셔요.

어서 오셔요.
화촉 밝혀 데운 이 방으로
이렇게 그대
오기 만을 기다렸어요.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ㅡ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길상사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

시인이 떠나온 곳은 흰 눈에 물들어버린 자작나무 숲이다. 시인은 이렇게 그 곳을 노래하였다.

백화(白樺)  ㅡ 백석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인제 자작나무 숲

길상사 계추

길 위의 인문학-문사철 인문학 여행 2018.12.02 11:49 Posted by 문촌수기
한가을이다.
물들어가는 단풍이 꽃보다 더 곱다.
서울 성북동 길상사의 단풍은 여느 단풍놀이보다 아름답다.
길상사의 주불을 모신 금당은 극락전이다.
서방정토 영원세상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는 아미타불을 모셨기에 아미타전, 무량수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길상사는 본래 사찰이 아니었다. 대원각이라는 이름으로 술과 고기와 음식을 팔던 고급요정이었다. 풍류가락이 울려퍼지고 흥청(興淸)이 만청(滿廳)이었다.
그랬던 이곳이 대원각의 주인마님이었던 김영한님과 법정 스님의 <무소유> 인연으로 '맑고 향기로운' 부처님 말씀이 퍼지는 사찰이 되었다.
다른 사찰 전각에는 단청이 칠해져있지만,
이곳 전각에는 단청이 없다.
아무리 치장해도 웃음꽃 전하는 요정의 여인네들보다 더 고울 수 없으니 굳이 단청칠 할 필요가 없었을게다. 대원각의 주연회당이 그대로 길상사의 극락전이 되었다. 극락전에 단청칠을 했더라면 가을 단풍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부끄러웠을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량들의 술에 안주로 희생된 모든 축생들과 애써 웃음팔고 옷을 갈아입으며 고통을 치마 속에 감추어야했던 여인네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길상사 극락전의 아미타불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지옥중생을 구원하고 현세 중생의 고통을 치유하며 영원 평안의 극락 세계로 구제하는 기도를 드린다.
금당 아래 좌우로는 마애불과 아기 석가모니불도 무류(無類) 중생들을 포근하게 맞이하고 있다.

길상사 가을에는
단풍이 참 곱다.
산책나온 이웃 수녀님 얼굴에
미소가 피었네.
뒷짐지고 행지실로 올라가시는
법정스님께서
무슨 말씀을 건내셨길래,
저리도 평화로울까?
성모님을 닮았다는
관음 보살님은 들으셨겠네.

관음보살상을 조각한 천주교인 최종태 화가는
"이 억겁의 시간에 우리 두 손(법정스님과 나)이 잠깐 하나로 만나서 이 형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억겁의 시간에 우리 두 손이 잠깐 하나로 만나..' 이 말씀 속에서 경외감을 느껴진다. 우주의 나이 137억년, 여기에 우리의 삶 100년은 정말 눈깜짝할 사이다.
'우리 두 손'을 손(手)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는 '손님'으로 읽으면 더더욱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우주의 손님이 되어 만난 우리의 인연에 감동하고 감사하다.

<8년 전 봄날의 관세음보살상>
'관세음 성모상'이라 이름해도 좋다.

"세상 사람들 바람을 다 들어주시고
굽어 살피셔서 부처님께 천주님께 전구하소서.
나무 관세음 보살님, 아베 관세음 성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