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릉

길 위의 인문학-문사철 인문학 여행 2020. 11. 24. 18:01 Posted by 문촌수기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1752~1800, 재위 1776~1800)는 장조의 둘째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英祖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 천명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규장각을 두어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城을 건축하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재위 24년(1800)에 세상을 떠나자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올렸으며, 광무 3년(1899) 정조선황제로 추존하였다.
효의황후 (1753~1821)는 청원부원군高原院君 김시묵金時의 딸로 영조 38년(1782) 왕세손빈에 책봉되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화하였으며, 왕대비시절 여러 차례 존호에와 잔치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고 한다. 순조 21년(1821)에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의왕후王后라 올렸으며, 광무 3년 1899) 효의선황후로 추존하였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호학군주가 고하는 기막힌 반전” (정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정조는 온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군주이다. 그런데 화성행궁 화령전에 봉안된 정조의 초상화는 곤룡포가 아닌 군복 차림이다. 틀에 박힌 정조의 이미지에서 살짝만 벗어나면, 우리가 익히 알던 호학군주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 족보 『선원보략』에서 볼 수 있는 간략한 그림과 '우뚝한 콧마루,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순조실록」의 기록을 따르면 정조의 실제 얼굴은 다부진 모습일 확률이 높다. 그 모습을 상상하건데, 의외로 정조에게서 늠름하고 호방한 무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무비를 닦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하지 않고 군병이 연습하지 않아서 번번이 조금만 달리면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한다. 이를 장수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은 예사로 여기니, 어찌 문제가 아니겠는가. 훈련대장 홍국영과 병조판서 정상순은 이에 힘쓰도록 하라."
「정조실록』 권8, 3년(1779) 8월 3일

정조는 문치뿐만 아니라, 무예와 군사훈련 역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왕위에 오른 후 정조는 아주 의미심장한 정예부대를 육성하였는데,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그것이다. 왕궁이 있는 서울과 그 주변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장용영은 그 훈련부터 특별했다. 정조가 친히 활쏘기 시범을 보이며 훈련을 독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당시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다. 정조 16년 10월 26일에 정조가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50발(10) 중 49발을 명중시켰다는 기록이있다. 그 중 마지막 화살은 아예 쏘지 않고 두면서 "다 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니, 그의 여유 넘치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의 강단 있는 모습은 8일 간의 화성 행차에서 절정을 이룬다. 「정조실록』 권42,
19년(1795) 윤2월 9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창덕궁을 나섰다. 115명 기마
악대의 웅장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6000여 명의 수행원이 그 뒤를 따랐다. 이거대한 행렬의 목적지는 수원 화성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행차였지만, 그 이면에는 그간 다져왔던 왕권을 과시하고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정조의
야심찬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이날 화려한 곤룡포를 벗고 군복으로 무장한 채 화성의로 향하는 정조의 모습에서 화성 행차의 감회가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2009년 2월에 공개된 '정조어찰첩은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있었던 신하 심환지와 주고 받은 비밀서신에서 치밀한 전략가였던 정조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껄껄대며 '배를 잡고 웃었
다[令人] 와 같은 가벼운 어투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편하게 표현한 정조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정조를 온화하고 부드러운 호학군주로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기막힌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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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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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릉ㆍ仁陵

조선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

인릉은 조선 제23대 순조(純祖 : 1790~1834, 1800~1834 재위)와 순원황후 김씨(純元皇后 金氏: 1789~1857)의 능이다.
순조는 정조와 유비 박씨의 아들로 1800년 11세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가 순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다. 이후 순조는 직접 정사를 돌보았으나 세도정치로 국정이 어지러워 부정부패가 생기고, 자연 재난, 홍경래의 난 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순원황후는 1802년(순조 2)에 왕비가 되었다. 헌종과 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수렴청정을 하여, 조선의 왕비 중 유일하게 2번 수렴청정을 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각각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와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추존되었다.
인릉은 처음 파주 장릉(인조와 인열왕후) 근처에 있었다가, 1856년(철종 7)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 수렴청정(垂簾聽政) : 대비가 발을 내리고 정치 상황을 듣는다는 의미로, 어린 왕을 도와 정치에 참여하는 것

* 인릉 연혁
- 헌종 1년(1835년) 경기도 파주에 순조숙황제 등 조성
- 철종 7년(1856년) 지금의 자리로 천릉 遷陵
- 철종 8년(1857년) 순원숙황후 안장安葬, 합장릉으로 조성
* 인릉 제향일
- 매년 1회 (10월 20일)
※ 제향일정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인릉 관람포인트 1>
인릉의 곡장 뒤 잉 부분은 꿈틀거리는 것처럼 봉분을 향하고 있다.
풍수에서는 산을 용으로 보는데 흔히 용이 아홉 번 꿈틀거리고 뻗어 나간 자리에 명당이 있다고 한다. 특히 왕릉을 택지할 때는 사초지 '강'과 봉분이 있는 '혈', 그리고 곡장 뒤의 ‘잉'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인릉의 잉 부분은 용이 꿈틀거림을
멈추고 생기를 모아 놓은 듯 봉분을 향하고 있어 명당이라 일컬어진다.

<인릉 관람포인트 2>
인릉의 문·무석인 4기의 생김새가 각각 다르다.
능 앞에 세워진 문관 형상의 석물 문석인과 무관 형상의 석물 무적인이 전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의 생김새도 각각, 석물의 생김새도 각각이다. 석물은 모두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보니 이렇듯 생김도 각각 다르게 조각된 것이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이 아이가 타고난 운은 나에게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순조)


"오색 무지개가 종묘 우물에 뻗어 있으며 신비로운 빛이 궁궐 숲을 둘러싸고 있으니, 이 어찌 하늘이 주신 기쁨이 아니겠는가. 원자(순조) 울음소리가 나자마자 어린이 늙은이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어나와 좋아하는 빛이라든지 춤추는 모양이 자기 집안의 경사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정도이니, 이는 사람들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무
엇이겠는가.”
(정조실록 14년 6월 18일)

정조실록에 따르면 순조의 탄생 순간은 더없이 화려하다. 그만큼 정조는 아들 순조를 아끼고 귀하게 여겼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기억하는 정조이기에 그의 아들 사랑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순조실록은 훗날 순조가 무럭무럭 자라 우뚝한 곳마루에 용의 얼굴을 하고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이 정조의 모습과 똑같았다. 이에 정조께서 매우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이 아이가 타고난 운은 나에게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하였다.'고 전한다. 정조의 기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정조는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갑작스레 승하하고 만다. 어린 순조가 후사를 잇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미처 여유 부릴 틈도 없이 왕좌에 올라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순조의 나이 11세. 한창 부모 품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을 나이에 왕위에 올라 신하를 거느리고 백성을 돌봐야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비록 시작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만 했던 어린 왕이었을지라도 순조는 한나라의 군주로서 덕목과 위엄을 잃지 않았다. 친정 이후에는 실무 관원들과 직접 만났고,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바에 귀 기울였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 정조의 빛나는 업적을 잇기 위해 <대학유의>, <만기
요람> 등 학문과 정사에 관한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현실은 순조의 노력과 뜻대로 흐르지 않았다. 수렴청정의 그늘은 오랫동안 그의 뒤를 따라다녔고 두 왕비 집안(경주 김씨와 안동 김씨)의 권력 다툼은 국정의 어려움을 가속화했다. 세도정치와 탐관오리가 활개를 치자 생활이 궁핍해진 백성들이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고 거기에 천재지변까지 겹쳐 민생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순조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재 속에서 백성들의 아픔을 보듬으려 노력했다.

“세금 징수가 가난한 민가에 날로 가중되어 백성들의 걱정과 탄식이 들려오는데, 위에서는 이를 들을 길이 없다면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보호하려고 하더라도 될 수가 있겠는가?"

어린 나이에 즉위해 정권의 험한 물살에 휩쓸린 가엾은 임금이었을지라도 백성을 살피는 마음만큼은 어느 왕에 못지않았다. 1826년(순조 26) 봄,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순조는 한탄한다.

"집집마다 들어가 보면 텅 비어 있고 마을마다 나가 보면 밥 짓는 연기가 끊겼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충분히 먹고 배를 두드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흉년 들어 굶주려 죽는 이들조차 구제하지 못하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쌀밥과 비단옷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끼겠는가?"

순조는 왕실 곳간을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쓰이도록 했다. 또한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을 진정시킨 뒤에도 가장 먼저 살핀 것 역시 민생이었다. 그의 몸은 왕좌에 있었지만 두 눈과 귀는 늘 백성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ㅡ 서울 헌릉과 인릉 안내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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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4 헌름과 인릉 (02-445-0347) /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94호.
내비게이션에서 헌릉을 검색하면 헌인릉을 찾아간다. 편의상 줄여서 헌인릉이라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헌릉과 인릉이다.

헌릉ㆍ獻陵-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헌릉은 조선 3대 태종(太宗, 1367~1422, 1400~1418 재위)과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의 능이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1400년에 왕위에 오른 후 중앙과 지방의 제도를 정비하고,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을 왕위에 오를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태종 사이에 양녕, 효령, 세종, 성녕의 네 아들과 딸 넷을 두었다. 1420년(세종 2) 태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헌릉에 모셔졌다.
정자각 옆에 있는 신도비각에는 1424년(세종 6)에 세운 신도비(보물 제1804호)와 1695년(숙종 21)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 신도비(神道碑) : 왕과 대신 등의 무덤 앞에 세워 죽은 이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

헌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전체적으로 넓은 능역과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조선 전기의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능침은 모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저와 영탁을 새겼다. 문무석인은 각 2쌍씩, 석마, 석양, 석호는 각각 4쌍식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조선왕릉 중에서 2배로 석물이 많아 완벽한 쌍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일반적으로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판위가 있고, 길은 향로와 그 옆에 약간 낮은 어로가 있지만 헌릉에는 판위와 어로가 없다.

홍릉의 정자각은 기단석이 이층으로 되어있어 매우 낮다. 그러다보니 정자각으로 올라가는 신계(향계)와 어계의 계단석이 두개씩이다.
정자각 왼쪽(북서측)에 소전대가 보인다.

소전대(燒錢臺) - 정자각의 북서측에 있는 소전대는 제례의 마지막 절차인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태조 건원릉과 이곳에서만 볼 수있는 조선시대 초기 석물이다. 세종이후에는 예감으로 대체되었다.

일반적으로 정자각에서 성역 공간인 사초지로 이어진 길은 신교 뿐인데, 헌릉은 정자각 뒤로 사초지가 멀다. 그래서일까, 왕릉에 모셔진 神이 돌아가는 신로(神路)가 길게 널어져 있다.

현재 조선 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 및 헌릉에서 볼 수 있다.

세조 때 영의정 정인지 등이 왕의 공덕은 실록에 있으므로 새로이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고 주청해 이후 왕릉에서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다. 신도비는 왕들의 덕을 적은 비석으로 헌릉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있다. 임진왜란 때 손상된 원래 신
도비(왼쪽)와 1695년(숙종 21)에 하나 더 증설해 세운 것(오른쪽)이다.

다섯개의 고석(鼓石)

사방에서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이 가운데 하나 더하여 다섯개이다. 이것 또한 태조 건원릉과 이곳에서만 볼 수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능제이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부디 나의 부득이한 정을 알아다오” (태종)

천하의 태종도 어느덧 후사를 생각해야 할 나이에 이르렀다. 이제 자신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왕에게 새 시대를 열어주어야 하는 책임이 그에게 주어졌다. 태종은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전철을 밟게 하지 않기 위해, 또 지속된 왕권 강화와 왕실
안정을 위해 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장자 양녕이 세자로 책봉되고, 태종은 세자 교육에 온 정성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자 양녕의 문제는 아비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할 뿐이었다. 양녕의 삐뚤어진 행실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10년 넘도록 세자의 후계자 수업에 공을 들였지만 모두 허사였다. 장
성한 양녕은 조정의 일이나 글 공부에는 아예 뜻을 두지 않았다. 한 시대를 쥐고 흔들었던 태종이라 할지라도 아들의 기행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세자 나이 열 일곱이 되던 해, 태종실록 10년 11월 3일 기사 속에는 여느 응석받이 부모와 다르지 않은 태종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날은 세자가 몰래 기생 봉지련을 궁중에 불러들인 날이었다. 이를 알게 된 태종이 참다못해 봉지련을 옥에 가두니, 세자가 근심 걱정으로 음식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태종은 세자가 병이 날까 두려워 봉지련을 풀어주고 비단까지 하사하게 된다. 아들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평범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래도 태종은 세자에 대한 기대를 거두지 않았다. 때로는 엄하게 꾸짖고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며 세자를 어르고 달랬다. 항상 곁에 두고 감시하는 것도 소홀하지 않았다. 매사냥을 갈 때도, 신하들이 마련한 연회에도 꼭 세자와 동행했다. 그러나 기대
를 가지면 가질수록 번번이 실망만 안겨주는 양녕이었다. 반면에 셋째 아들 충녕(세종)의 총명함은 태종을 웃음 짓게 했다.
마침내 태종은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은 것이다. 태종 재위 마지막 해의 일이다. 마지막까지도 양녕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던 태종의 수심 가득한 얼굴이 그려진다.

“너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도록 바랐는데, 어찌 뉘우치지 않아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드느냐, 나와 너는 부자지간이지만 군신의 도리 또한 있다. 이제 충녕이 너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으니, 반드시 너를 대접하는 마음이 두터울 것이다. 부디 나의 부
득이한 정을 알아다오. 이제 광주廣州에서 네가 사랑하던 자들을 모두 거느리고 살라."
(태종실록 18년 6월 6일)

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세자를 폐할 때 통곡으로 하교했다고 한다. 흔히 세간에 냉철한 모습으로만 그려졌던 태종이기에 그의 전언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에게 양녕을 포기한 것은 평생 지켜온 자신의 신념을 무너뜨려야 했던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자를 바꾼 태종의 결단은 왕으로서 조정의 앞날을 생각하고 아비로서 아들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또 결과적으로 세종의 치세를 가능케 한 현명한 결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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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백석 시인의 시 제목이다.
"하필 당나귀일까?
당나귀의 상징은 무엇일까?"
성북동 길에서 읽는 인문학 강의에서 들은 질문이다.
길상사의 시주 길상화보살님(자야)과 백석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담아 그림을 그려보았다. 그 그림속에 당나귀를 등장시켰다.

시인은 왜 하필 애절하게 나타샤를 그리워하는 사랑의 시 속에 당나귀를 등장시켰을까?
흔하다보니 하찮고 가치없는 것을 여명구폐(驪鳴狗吠), '당나귀 울음과 개 짓는 소리'라 하거늘, 그 흔한 당나귀 울음을 '응앙응앙' 소리 내었을까? 덕분에 귀한 당나귀가 되었지만.
당나귀의 꼬리를 물고 따라가다보니 김홍도의 군선도 중에서 장과로를 보게 되었다. 그림 가운데 흰당나귀를 거꾸로 앉아 가고 있는 신선이 장과로이다.

장과로(張果老)는 흰당나귀를 타고 다녔는데 쉴 때에는 종이접듯이 당나귀를 접어 주머니속에 넣고 길을 떠날 때에는  입에 머금은 물을 뿜어 다시 펴서 타고 다녔다한다.
참 재미있다. 주차난이 심각할 때 내 차를 접어서 주머니나 가방 속에 넣어두면 좋겠다고 엉뚱하게 상상한 적이 있는데, 먼 옛날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구나.
이 기회에 이 엉뚱한 상상력을 붙잡고 놀아보고싶다.
'종이처럼 접고 펼치는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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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시에는 특별한 유적지가 있다.
오산화성궐리사(烏山華城 闕里祠).
절이 아니라 사당이다. 불교의 예배당이 아니라 유교의 예배당이다. 그것도 유교의 교조인 공자의 사당이다. 또한 이곳에는 국내 유일의 2층 누각의 행단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곳에 공자의 사당인 궐리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오산시의 화성 궐리사이며, 또 하나는 논산시의 노성궐리사이다.
궐리사 ㅡ 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 맞배지붕의 건물.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 공서린(孔瑞麟)의 사당이다. 이 곳은 원래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공서린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의를 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뜰안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놓고 문하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치며 교수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 그 나무가 자연 고사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정조가 화산(花山)에서 남쪽 멀리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모여들므로 괴이하게 여겨 그곳에 행차해 보니, 죽었던 늙은 은행나무에 싹이 트고 있었다.
그리하여 1792년(정조 16) 이 곳에 사당을 짓게 하고, 이곳의 지명을 궐리로 고치게 하였으며,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게 하고 ‘闕里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궐리는 노나라의 곡부(曲阜)에 공자가 살던 곳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현재 솟을삼문 주위로 사고석담[四塊石墻 : 돌담]이 둘러 있고, 사당이 있으며,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삼문에는 ‘聖廟(성묘)’라는 현판이 있다. 이 곳에는 1904년에 제작된 「궐리사성적도 闕里祠聖蹟圖」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 보관되어 있으며, 지방의 유림들이 해마다 봄·가을에 엄격한 제례로 제향을 드리고 있다.
공자성상
 이 성상은 1993년 7월에 중국 산동성 곡부현에서 기증하였다 한다.

공자상 좌우에 자사자, 안자, 맹자 증자상이 있다.

궐리사 외삼문

외삼문을 들어가..

내삼문은 바라보며..

왼쪽에 은행나무가 있다. 행단의 상징수이다.

오른쪽에는 행단이 보인다.

내삼문

내삼문에 들어가면 사당, 聖廟가 있다.

성묘 안, 공자 위패

공자상 왼편에 안자상ᆞ자사자상

공자상 오른편의 아성, 맹자상.

증자상 뒷모습

자사자상 뒷모습

성묘와 향나무

공자상 좌대 사면에는 공자생애가 부조되어있다.

공자성상전 내삼문을 내려나오면서 오른편에 '공부자문화전시관'이 있다.

행단ㅡ공자는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 이후 모든 행단은 공자의 학당을 가리킨다.

공자가 거문고를 켜며 제자들과 가르치는 <행단예악>도를 보면, 뒤의 나무는 살구나무 같이 보인다. 행단의 杏은 살구나무 杏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자의 행단은 과연, 은행나무인가?
참고로 중국 곡부의 공묘(孔廟) 안에 있는 행단(杏壇)에는 살구나무가 심어져있다.
참고>행단의 나무는 은행나무일까 살구나무일까?ᆞᆞᆞᆞ
조선 후기 정약용(1762~1836)도 이 문제를 제기했다. 다산은 <아언각비>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잘 못 알아 공자의 사당 뒤에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杏壇)을 상징하게 되었다.’ 고 하여 은행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
그런데 왜 살구나무일까?
행단의 그림은 궐리사 소장 성적도 일부이다.
궐리사에 소장된 공자의 성적도(聖蹟圖)
는 목판의 새김이 비교적 섬세한 편이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공자의 성적도이므로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궐리사 행단을 지나 뒤로 돌아가면 궐리사 인성학당이 있다.

氣高太山 平生淸高
문헌공 공서린 생가터에 선 인성학당

이곳에서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 공자만 읽을 것이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롭고 잘사는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개혁군주 정조의 교육입국 이상을 읽어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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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매홀고 아이들과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 함께 했던 문사철 인문학 산책 프로그램이 경기도 교육연수원 교육부의 중앙교육연수원(https://www.neti.go.kr/) 등, 전국 시ᆞ도교육청 교육연수원 - 원격연수프로그램(15차시)을 통해 개설되었어요.

경기도 교육연수원(https://www.gtie.go.kr/) 에서 [진행중인 과정] 또는 [수강신청중인 과정]에서 [더보기+] 클릭하신 다음, [과정명]에서 '인문학' 검색하시면 아래 연수프로그램이 안내되고 수강신청이 가능하답니다. 참, 경기도 교육연수원에서는 이제 학교에서 따는 연수지명번호를 필요로 하지 않더군요. 이 연수는 휴대폰(모바일)으로도 수강이 가능합니다. PLAY스토어에서 '통합교육연수'를 설치하고 IP/PW 로그인하시면 됩니다.

<문학, 역사, 철학을 찾아 떠나는 인문학 여행>
원격직무연수도 이수하시고, 가족 친구들과 이 길따라 힐링 산책도 떠나보셔요.

ㅡㅡㅡㅡㅡ
15개 차시 구성                   
1부 > 한양도성의 길을 걷다.
1 인문학 산책, 길을 걷다가 길에게 묻다.
2 목멱산 길을 걷다
3 안중근의 삶과 <논어> 
  (2부 마지막으로 옮겨도 좋았을 걸, 남산 회현자락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어서 )
4 인왕산 길을 걷다 (+서촌 골목길)
5 백악산 길을 걷다 (+성북동 골목길)
6 낙산 길을 걷다 (+죽음에 대하여)

2부 > 겨레의 스승에게 길을 묻다.
7 원효에게 길을 묻다
8 퇴계에게 길을 묻다
9 율곡에게 길을 묻다
10 다산에게 길을 묻다
11 추사에게 길을 묻다

3부 > 교실 밖 인문학 여행(학교사례)
12 (학교사례1)인문학에서 찾는 나의 진로와 미래
13 (학교사례2)한양도성 길에서 찾는 나의 과거-현재-미래
14 (학교사례3)사, 제, 부 행복 동행
15 (학교사례4)별 헤는 밤, 시 읽는 밤

*이 연수의 일부(인왕산자락 서촌마을, 백악산자락 성북동)는 작년 제주도 탐라교육원에서, 운암고 등에서 교원대상으로 오프라인 강의를 했습니다.
*저의 블로그 ‘문촌수기’-‘길 위의 인문학’ 카테고리를 통해 본래 원고 내용과 사진 그리고 저의 픽토리텔링(그림이야기) 및 제게 의미깊은 식당과 카페 등도 소개됩니다.
*이 프로그램으로 학생들과 인문학 오프라인 강의를 한 경험도 나눕니다.
군포 산본고-‘인문학 고전 통통’(6강, 12차시) 강의 및 활동장면
http://munchon.tistory.com/1086
http://munchon.tistory.com/1138
http://munchon.tistory.com/1143
 ㅡ길 위의 인문학 마무리(내 마음 속 한장면 한문장

2부ᆞ<겨레의 스승을 찾아서>는 2001년 걸었던 <한국사상현장순례>를 다시 찾아 재구성한 것입니다. http://www.korearoot.net/sa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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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이태준은 이곳의 당호를 '수연산방'이라 하고, <달밤>, <돌다리>, <코스모스피는 정원>, <황진이>, <왕자 호동> 등 문학작품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의 수필<무서록>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집터의 내력 등이 쓰여 있다.

작품의 경향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 많고, 세련된 문장으로 1930년대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특히 단편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 하여 “한국의 모파상”이라고도 불린다.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활동, 이상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에게 부탁해서 이상의 시를 신문에 내도록 도와 주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시가 오감도이다.
박태원과 조용만 등 비롯하여 절친한 구인회 동료들이 친일 작품을 창작하던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1943년에 안협(현재의 북철원군)에 낙향해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않아, 친일행적 논란에서 자유로운 몇 되지 않는 작가들 중 하나이다.
광복 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던 이전까지의 경향과는 달리 조선문학가동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파 계열에서 활동했으며, 한국 전쟁 이전인 1946년경에 월북하였기에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행적이나 세상을 떠난 시기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 곳에서 이태준은 김일성을 영웅화하라는 노동당의 지시를 정면으로 비판,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행적은 66살이던 1969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는 모습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생가는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 생가는 철원읍 율이리 용담마을에 밭으로 이용 중이나 생가터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서 있다. 서울에서 거주하던 성북구의 자택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6] 지금은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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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가면 엄마가 계셨다
엄마의 가슴처럼
시퍼렇게 멍든 바다가 있었다
모두 받아들여 바다라 했지만
이렇게 시퍼런 멍이 든 줄 몰랐다
깊어서 그 속을 알 수 없지만
이렇게 흔들릴 줄은 몰랐다
이젠 엄마마저도 떠나시니
고향도 없어졌다
엄마가 고향이었다

잃어버린 고향 대신에
엄마 이름으로 고향이 된
바다 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 세 개의 등대가 있다
건너 방파제 빨간 등대
바다 속 암초에 푸른 등대
해파랑길 끝자락에 하얀 등대
시퍼렇게 멍든 가슴을 가진 엄마가
남겨 주신 세 개의 그리움
간절한 그리움이 등대가 되었다

누가 저 등대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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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촌수기 2019.04.20 1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인 호라티우스가 은유했다. "그림은 글 없는 시다. (A picture is a poem without words.)"
    나는 그림도 아니고 시도 아니다. 그냥 그리움이다.

  2. 2019.04.23 0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ᆞ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첫 여행지가 독립운동의 거목들이 태어나신 내포 지역이었습니다.
<홍성, 만해 한용운 생가ᆞ기념관>

서울 성북동 심우장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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