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백석 시인의 시 제목이다.
"하필 당나귀일까?
당나귀의 상징은 무엇일까?"
성북동 길에서 읽는 인문학 강의에서 들은 질문이다.
길상사의 시주 길상화보살님(자야)과 백석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담아 그림을 그려보았다. 그 그림속에 당나귀를 등장시켰다.

시인은 왜 하필 애절하게 나타샤를 그리워하는 사랑의 시 속에 당나귀를 등장시켰을까?
흔하다보니 하찮고 가치없는 것을 여명구폐(驪鳴狗吠), '당나귀 울음과 개 짓는 소리'라 하거늘, 그 흔한 당나귀 울음을 '응앙응앙' 소리 내었을까? 덕분에 귀한 당나귀가 되었지만.
당나귀의 꼬리를 물고 따라가다보니 김홍도의 군선도 중에서 장과로를 보게 되었다. 그림 가운데 흰당나귀를 거꾸로 앉아 가고 있는 신선이 장과로이다.

장과로(張果老)는 흰당나귀를 타고 다녔는데 쉴 때에는 종이접듯이 당나귀를 접어 주머니속에 넣고 길을 떠날 때에는  입에 머금은 물을 뿜어 다시 펴서 타고 다녔다한다.
참 재미있다. 주차난이 심각할 때 내 차를 접어서 주머니나 가방 속에 넣어두면 좋겠다고 엉뚱하게 상상한 적이 있는데, 먼 옛날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구나.
이 기회에 이 엉뚱한 상상력을 붙잡고 놀아보고싶다.
'종이처럼 접고 펼치는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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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시에는 특별한 유적지가 있다.
오산화성궐리사(烏山華城 闕里祠).
절이 아니라 사당이다. 불교의 예배당이 아니라 유교의 예배당이다. 그것도 유교의 교조인 공자의 사당이다. 또한 이곳에는 국내 유일의 2층 누각의 행단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곳에 공자의 사당인 궐리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오산시의 화성 궐리사이며, 또 하나는 논산시의 노성궐리사이다.
궐리사 ㅡ 민족문화백과사전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 맞배지붕의 건물. 경기도 기념물 제147호. 공서린(孔瑞麟)의 사당이다. 이 곳은 원래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공서린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들에게 강의를 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뜰안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놓고 문하 제자들에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치며 교수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 그 나무가 자연 고사하였다고 한다. 그 뒤 정조가 화산(花山)에서 남쪽 멀리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모여들므로 괴이하게 여겨 그곳에 행차해 보니, 죽었던 늙은 은행나무에 싹이 트고 있었다.
그리하여 1792년(정조 16) 이 곳에 사당을 짓게 하고, 이곳의 지명을 궐리로 고치게 하였으며,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게 하고 ‘闕里祠’라는 사액을 내렸다. 궐리는 노나라의 곡부(曲阜)에 공자가 살던 곳을 본떠 지은 이름이다.
현재 솟을삼문 주위로 사고석담[四塊石墻 : 돌담]이 둘러 있고, 사당이 있으며,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삼문에는 ‘聖廟(성묘)’라는 현판이 있다. 이 곳에는 1904년에 제작된 「궐리사성적도 闕里祠聖蹟圖」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 보관되어 있으며, 지방의 유림들이 해마다 봄·가을에 엄격한 제례로 제향을 드리고 있다.
공자성상
 이 성상은 1993년 7월에 중국 산동성 곡부현에서 기증하였다 한다.

공자상 좌우에 자사자, 안자, 맹자 증자상이 있다.

궐리사 외삼문

외삼문을 들어가..

내삼문은 바라보며..

왼쪽에 은행나무가 있다. 행단의 상징수이다.

오른쪽에는 행단이 보인다.

내삼문

내삼문에 들어가면 사당, 聖廟가 있다.

성묘 안, 공자 위패

공자상 왼편에 안자상ᆞ자사자상

공자상 오른편의 아성, 맹자상.

증자상 뒷모습

자사자상 뒷모습

성묘와 향나무

공자상 좌대 사면에는 공자생애가 부조되어있다.

공자성상전 내삼문을 내려나오면서 오른편에 '공부자문화전시관'이 있다.

행단ㅡ공자는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 이후 모든 행단은 공자의 학당을 가리킨다.

공자가 거문고를 켜며 제자들과 가르치는 <행단예악>도를 보면, 뒤의 나무는 살구나무 같이 보인다. 행단의 杏은 살구나무 杏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자의 행단은 과연, 은행나무인가?
참고로 중국 곡부의 공묘(孔廟) 안에 있는 행단(杏壇)에는 살구나무가 심어져있다.
참고>행단의 나무는 은행나무일까 살구나무일까?ᆞᆞᆞᆞ
조선 후기 정약용(1762~1836)도 이 문제를 제기했다. 다산은 <아언각비>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잘 못 알아 공자의 사당 뒤에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杏壇)을 상징하게 되었다.’ 고 하여 은행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
그런데 왜 살구나무일까?
행단의 그림은 궐리사 소장 성적도 일부이다.
궐리사에 소장된 공자의 성적도(聖蹟圖)
는 목판의 새김이 비교적 섬세한 편이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공자의 성적도이므로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궐리사 행단을 지나 뒤로 돌아가면 궐리사 인성학당이 있다.

氣高太山 平生淸高
문헌공 공서린 생가터에 선 인성학당

이곳에서 우리는 위대한 사상가, 공자만 읽을 것이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롭고 잘사는 나라를 건설하고자 했던 개혁군주 정조의 교육입국 이상을 읽어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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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매홀고 아이들과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 함께 했던 문사철 인문학 산책 프로그램이 경기도 교육연수원 교육부의 중앙교육연수원(https://www.neti.go.kr/) 등, 전국 시ᆞ도교육청 교육연수원 - 원격연수프로그램(15차시)을 통해 개설되었어요.

경기도 교육연수원(https://www.gtie.go.kr/) 에서 [진행중인 과정] 또는 [수강신청중인 과정]에서 [더보기+] 클릭하신 다음, [과정명]에서 '인문학' 검색하시면 아래 연수프로그램이 안내되고 수강신청이 가능하답니다. 참, 경기도 교육연수원에서는 이제 학교에서 따는 연수지명번호를 필요로 하지 않더군요. 이 연수는 휴대폰(모바일)으로도 수강이 가능합니다. PLAY스토어에서 '통합교육연수'를 설치하고 IP/PW 로그인하시면 됩니다.

<문학, 역사, 철학을 찾아 떠나는 인문학 여행>
원격직무연수도 이수하시고, 가족 친구들과 이 길따라 힐링 산책도 떠나보셔요.

ㅡㅡㅡㅡㅡ
15개 차시 구성                   
1부 > 한양도성의 길을 걷다.
1 인문학 산책, 길을 걷다가 길에게 묻다.
2 목멱산 길을 걷다
3 안중근의 삶과 <논어> 
  (2부 마지막으로 옮겨도 좋았을 걸, 남산 회현자락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어서 )
4 인왕산 길을 걷다 (+서촌 골목길)
5 백악산 길을 걷다 (+성북동 골목길)
6 낙산 길을 걷다 (+죽음에 대하여)

2부 > 겨레의 스승에게 길을 묻다.
7 원효에게 길을 묻다
8 퇴계에게 길을 묻다
9 율곡에게 길을 묻다
10 다산에게 길을 묻다
11 추사에게 길을 묻다

3부 > 교실 밖 인문학 여행(학교사례)
12 (학교사례1)인문학에서 찾는 나의 진로와 미래
13 (학교사례2)한양도성 길에서 찾는 나의 과거-현재-미래
14 (학교사례3)사, 제, 부 행복 동행
15 (학교사례4)별 헤는 밤, 시 읽는 밤

*이 연수의 일부(인왕산자락 서촌마을, 백악산자락 성북동)는 작년 제주도 탐라교육원에서, 운암고 등에서 교원대상으로 오프라인 강의를 했습니다.
*저의 블로그 ‘문촌수기’-‘길 위의 인문학’ 카테고리를 통해 본래 원고 내용과 사진 그리고 저의 픽토리텔링(그림이야기) 및 제게 의미깊은 식당과 카페 등도 소개됩니다.
*이 프로그램으로 학생들과 인문학 오프라인 강의를 한 경험도 나눕니다.
군포 산본고-‘인문학 고전 통통’(6강, 12차시) 강의 및 활동장면
http://munchon.tistory.com/1086
http://munchon.tistory.com/1138
http://munchon.tistory.com/1143
 ㅡ길 위의 인문학 마무리(내 마음 속 한장면 한문장

2부ᆞ<겨레의 스승을 찾아서>는 2001년 걸었던 <한국사상현장순례>를 다시 찾아 재구성한 것입니다. http://www.korearoot.net/sa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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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이태준은 이곳의 당호를 '수연산방'이라 하고, <달밤>, <돌다리>, <코스모스피는 정원>, <황진이>, <왕자 호동> 등 문학작품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의 수필<무서록>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집터의 내력 등이 쓰여 있다.

작품의 경향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 많고, 세련된 문장으로 1930년대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특히 단편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 하여 “한국의 모파상”이라고도 불린다.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활동, 이상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에게 부탁해서 이상의 시를 신문에 내도록 도와 주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시가 오감도이다.
박태원과 조용만 등 비롯하여 절친한 구인회 동료들이 친일 작품을 창작하던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1943년에 안협(현재의 북철원군)에 낙향해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않아, 친일행적 논란에서 자유로운 몇 되지 않는 작가들 중 하나이다.
광복 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던 이전까지의 경향과는 달리 조선문학가동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파 계열에서 활동했으며, 한국 전쟁 이전인 1946년경에 월북하였기에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행적이나 세상을 떠난 시기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 곳에서 이태준은 김일성을 영웅화하라는 노동당의 지시를 정면으로 비판,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행적은 66살이던 1969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는 모습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생가는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 생가는 철원읍 율이리 용담마을에 밭으로 이용 중이나 생가터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서 있다. 서울에서 거주하던 성북구의 자택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6] 지금은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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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가면 엄마가 계셨다
엄마의 가슴처럼
시퍼렇게 멍든 바다가 있었다
모두 받아들여 바다라 했지만
이렇게 시퍼런 멍이 든 줄 몰랐다
깊어서 그 속을 알 수 없지만
이렇게 흔들릴 줄은 몰랐다
이젠 엄마마저도 떠나시니
고향도 없어졌다
엄마가 고향이었다

잃어버린 고향 대신에
엄마 이름으로 고향이 된
바다 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 세 개의 등대가 있다
건너 방파제 빨간 등대
바다 속 암초에 푸른 등대
해파랑길 끝자락에 하얀 등대
시퍼렇게 멍든 가슴을 가진 엄마가
남겨 주신 세 개의 그리움
간절한 그리움이 등대가 되었다

누가 저 등대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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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촌수기 2019.04.20 11: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인 호라티우스가 은유했다. "그림은 글 없는 시다. (A picture is a poem without words.)"
    나는 그림도 아니고 시도 아니다. 그냥 그리움이다.

  2. 2019.04.23 09: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ᆞ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첫 여행지가 독립운동의 거목들이 태어나신 내포 지역이었습니다.
<홍성, 만해 한용운 생가ᆞ기념관>

서울 성북동 심우장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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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에 공원과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길 아닌 길'도 금새 생긴다.
입주민들이 편리에 의해 잔디밭을 가로 질러 다니다 보니 잔디가 패이고 죽어 자연스럽게 길이 생겨난다.
결국에는 보도블록을 깔고 담장도 허물어서 쪽문도 만들게 되었다.

어릴 때는 '길 아닌 길'이 잘못되었다고 여겨 걷기를 주저했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라서 일까? 소심해서 일까?
"잔디 밭에 들어가지 마라."
"길이 아니면 걷지를 마라."
귀에 딱지 앉듯이 들은 말에 세뇌되었던 모양이다.

이제 나 자신도 그 말을 절대 지킬 수 없어서 그런지, 염치가 무디어져서인지, 그 '길 아닌 그 길'이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공자님가 말씀하셨다.
"사람이 길을 넓히는 것이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
장자도 이렇게 말했다.
"길은 사람이 걸어다녀서 생겨났다.[道行之而成]"

처음부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우주와 자연의 길은 절로 있었겠지만 사람의 길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처음 그 길을 걸은 사람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서 다른 사람이 걷고 이어서 걷고 함께 걷다보니 길이 되었다. 그 길이 의롭기 때문이든 이롭기 때문이든 걸어야 할 까닭이 있었기에 결국 길이 만들어졌다. 걸어야 길이 된다. 걸으면 길이 된다.
이렇게 세상은 반(反)하고 '상식에 도전'하는 자들에 의해 조금씩 나아지기도 한다.
이어 읽기>
반자도지동ㅡ노자ᆞ르네 마그리트ᆞ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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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시장에서 인왕산 골짜기 수성동계곡으로 올라가는 누상동 골목길은 참 정겹다. 작은 가게, 음식점, 카페는 눈과 코와 입을 즐겁게 한다.
박노수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고 뜰 안에서 담소도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을 마련해준다. 골목을 나와 잠시 걸으면 '윤동주하숙집' 현판과 태극기가 새겨진 동판이 붙은  2층 양옥집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시절 2년 후배 정병욱과 하숙을 하였다.이 하숙집은 당시 조선의 항일작가 김송(金松, 1909-1988)의 집이다. 하숙한 시기는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4개월 짧았지만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성동 계곡을 자주 찾아 시상을 떠올리며 시를 지은 윤동주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이 시기에 '십자가', ‘태초의 아침’, ‘못 자는 밤’, ‘바람이 불어’ 등 10편의 시를 썼고, '별헤는 밤', '자화상' 등 그의 대표작도 바로 이 즈음에 배태되었을거다.
연희전문학교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했으나 지도교수가 위험하다고 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육필 시 원고를 묶어 후배 정병욱에게 맡겼다. 정병욱은 시골 고향 부모님께 이 시집을 맡겨서 다행히 해방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윤동주 하숙집'을 찾기 전 오른편 골목안  담장에 풀잎에 물을 주는 소녀그림이 그려져있다. 박노수 화백의 그림이상으로 감동을 준다. 이 그림을 그린 이의 마음은 참 따뜻할 것이다.

'윤동주 하숙집과 풀잎 소녀'

박노수 미술관을 나와 윤동주 하숙집과 수성동계곡을 오르는 골목길을 걷다보면 인왕산의 병풍바위ᆞ치마바위가 보인다. 윤동주가 다녔을 그때에는 인왕산 봉우리가 훤하게 다 보였을 것이다.

수성동계곡을 오르며 뒤를 돌아 누상동 골목길을 내려본다.

수성동 계곡, 윤동주와 정병욱은 하숙집에서 걸어서 10분이면 올 수 있는 이 계곡을 찾아 아침 운동을 즐기고 세수도 하였다 한다. 그가 걸었던 길을 걷는 것 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

윤동주가 육필로 써 묶은 시집 한권을 함께 하숙했던 후배 정병욱에게 증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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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인문학 산책의 첫걸음은
한ᆞ중 평화의 소녀상을 만나는 것부터 시작된다. 한성대 입구역 6번출구 버스정류장 작은 가로공원에 있다.
여느 곳의 평화의 소녀상과는 많이 다르다. 조선의 소녀 옆에 중국의 소녀가 앉아있다. 겨울이 되면 공감하는 이들이 목도리를 둘러주고 모자도 씌어준다.
나는 동상(銅像)이 아니라 그때를 살았던 소녀의 고통을 상상하며 사람으로 그렸다.

2015년 한중 합작으로 이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였다. 일본군의 성노예로 함께 고통받고 숨죽이며 서로를 위로하며 견뎌왔던 친구가 여기까지 찾아왔다.
전쟁 속의 광기가 여성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는가를 후세에 길이 전해지기 바라며 일본 정부의 일제 만행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촉구하는 바이다.

<우리의 평화 소녀상 상징과 의미>
● 거칠게 잘린 머리카락 : 부모와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단절된 것을 상징한다.
● 꽉 쥔 주먹 :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 빈 의자 :
  (과거)세상을 떠난 위안부 할머니들의 빈자리이다.
  (현재)지금 내가 같이 앉아 위로하고 공감하는 자리이다. 성북동 평화의 소녀상 빈자리는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의 위안부소녀상의 자리이기도 하다.
  (미래)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역사를 잊지 않고자 맹세하며 앉을 자리이다.
● 어깨에 앉은 새 : 자유와 평화의 상징으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과 지금의 우리를 연결해주는 고리이다.
● 할머니 모습의 그림자 :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다 풀지 못한 가슴앓이와 한(恨)이다.
● 그림자 속의 하얀 나비 :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다시 태어나 한을 풀기를 바라는 염원이며 영혼의 환생이다.
● 맨발과 발꿈치가 들려 있는 모습 : 도망가지 못하도록 신발을 빼앗 긴 모습이자, 고향에 돌아와서도 마음 편하게 정착하지 못한 할머니들의 설움이다.

중국 소녀상 뒤로는 여기까지 걸어온 발자국이 찍혀있다. 중국의 소녀가 우리에게 말을 건낸다.
  "먼길을 돌고 돌아 친구를 찾아와 옆에 앉았습니다. 있던 자리에선 말도 못하고 숨죽여 왔습니다.
친구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소곳하면서도 진지하고
잔잔하면서도 진실되게 이야기하는 친구와 같이하고 싶었습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결코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 이제 함께 하려합니다."
일본이 계속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않고 과거의 행적에 변명하면 할수록 평화의 소녀상을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온 세상으로 계속 번져갈 것이다. 우리들이 할 일이다.

주 대한민국 일본 대사관 앞 평화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1000회째인 2011년 12월 14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2017년 9월 22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도심 한복판 세인트메리스 스퀘어파크에서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이 열렸다. 미국 대도시에 세워진 첫 기림비로 동판에는 “1931년부터 45년까지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태평양 13개국 여성과 소녀 수십만 명이 일본군에 의해 이른바 ‘위안부’로 끌려가 고통을 당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샌프란시스코 AP=연합뉴스]

샌프란시스코 시내 공원에 있는 한국과 중국, 필리핀 소녀가 손을 잡고 서있고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이를 지켜보는 조각상.<사진=온라인커뮤니티>

작은 평화의 소녀상 건립 프로젝트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학생회들에 호소하여 정동의 프란치스코 회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운바 있는 이화여자고등학교 역사동아리 ‘주먹도끼’는 더 많이 위안부 문제를 알릴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500명이 1000원씩만 모으면 세울수 있는 50만원 상당의 '작은 평화의 소녀상'을 100곳의 고등학교에 세우는 '100개의 고등학교에 100개의 작은 소녀상 건립' 프로젝트를 펼치게 되었다. 2014년 개교한 우리 매홀고등학교도 2016년도 학생회를 중심으로 전교생들이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여 '작은 평화의 소녀상'을 학교에 건립하였으며 실내에 햇살드는 작은 정원에 모시면서 역사와 인권과 평화교육을 이어갈 것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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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나를 찾아오다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제게 보내신 편지(영혼의 모음, 1971.11)를 이제사 받았어요."
"그랬구나. 너를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이제 너와 함께 갈 수 있겠구나."
"그래요. 내 친구 여우도 같이 갈거예요."
"그래, 나도 너와 관계맺게 해준 생떽쥐뻬리 아저씨의 <어린 왕자>와 <화엄경>은 갖고 가야겠다."

2010년 3월 11일 새벽.
어린 왕자가 길상사 행지실(行持室, 지금의 진영각)을 찾아와 마루에서  법정 스님을 만났다.
어린 왕자가 지구를 떠나 제 별로 돌아온 이후에도 의자에 앉아 늘 석양을 바라보았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한 이후에는, 더 이상 해 지는 것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길상사 진영각 왼쪽 기둥옆에는 '빠삐용 의자'만이 덩그러이 놓여 있다. 법정 스님께서 불일암에 계실 적에 손수 만드신 그 의자인지는 모르지만 그대로 빼닮았다. 법정 스님께선 이 의자에 앉아 인생을 허비하였지를 돌아보셨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 왕자처럼 해지는 광경도 즐겨 보셨다.
나도 이 의자에 앉아 제 인생을 얼마큼 허비하였는지 돌아보고 싶지만, 감히 그 자리에 앉지는 못하고 옆마루에 걸터앉아 어린 왕자가 사는 별을 올려다본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서 들은 비밀처럼,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으로 보아야하나 보다.

길상사 진영각, 빠삐용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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