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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尋牛莊), 때는 1937년 3월. 아직 잔설에 서늘하다. 그림 속에 세 명의 주인공이 한자리에 만났다.
북정마을의 심우장 언덕 위로 성벽이 보인다. 한양도성 북악산 동북자락 성곽이다. 일제의 패망을 암시하듯 '돌집' 위의 남녘 하늘에는 핏빛 전운(戰雲)이 감돈다.
세 명의 주인공은 만해 한용운, 일송 김동삼, 시인 조지훈. 만해와 일송은 환갑을 바라보는 초로이며 지훈은 아직 감수성 풍부한 열일곱 청춘이다. 그들이 일송 김동삼의 장례식, 심우장 마당에서 만난다.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 ~ 1944)
일제 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청주. 호는 만해(萬海)이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만해 한용운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만해 선생은 성북동에 자리잡으면서 집을 북향으로 짓게 하였다. 집은 햇살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남향으로 짓는 것이 일반적인데, 일제의 조선총독부, '돌건물'을 향할 수 없다며 등을 돌렸다.
당호 심우장(尋牛莊)은 '소를 찾는 이의 집'이라는 뜻이다. 자기의 진면목과 부처의 도를 찾아가는 열 단계의 길이 곧 심우이며,  그 첫 걸음이 또한 심우[尋牛]이다. 그렇게 찾은 소를 길들이고[牧牛], 나아가 잊어 버리고[忘牛], 나도 비우고[人牛具忘ᆞ空], 중생을 제도하고자 저자거리로 나간다.
 ㅡ참조ᆞ산사로 가는 길ᆞ벽화(심우도)
http://www.korearoot.net/sansa/source/me6/5.htm
 구도의 심경으로 자신의 당호로 삼고, '찾았으면 또한 잊지 말 것'을 역설하면서 <심우장>을 제호로 시를 지었다.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  심우장1

만해의 시는 경건하고도 에로틱하다. '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겠다. 여러 시 중에서 나는 이 시를 참 좋아한다. 대체 당신은 누구시길래?
ㅡ 인제 만해마을에서 그냥 씀

♡ 일송 김동삼(一松 金東三, 1878∼1937)
경북 안동 사람으로 본명은 김긍식이다. 독립운동을 하다 옥사하신 큰 인물이었음에도 내가 몰랐다. 참으로  송구스럽다. 이제라도 기억하고 보답하고 그 뜻을 전하고자 이 분을 그렸다.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김동삼 장군은 유교적 학식과 함께 '만주의 호랑이', '남만의 맹호’로 불릴 정도로 용맹한 기질을 겸비하여 김좌진, 오동진 등과 3대 맹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후에 독립군을 통합하고 통의부 총장을 역임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를 거쳐 서울로 이감된 뒤, 10년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며 옥고를 치르다가 그만 1937년 3월 3일 순국하였다.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독립기념관에 옥중 유언인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던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옥중 순국 후에도 일제는 그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않았다. 가슴에 '수인번호 730, 본명 김긍식(金肯植)'을 붙인 채 시신은 방기되어 있었다. 소문을 듣고 만해 선생이 형무소를 찾아가 시신을 수습하고 심우장에 모시면서 장례식을 치뤘다. 5일장이었음에도 찾아온 이는 스무명 정도였다. 일제의 탄압에 꼬리 잡힐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지훈 부자가 있었다.
만해는 "내, 이 어른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장례식은 심우장 마당에 차렸다.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 조헌영(한의사, 독립운동가, 제헌의원, 납북)이 그 비용을 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장은 유해는 유언대로 한강에 뿌려졌다.

시인 조지훈은 일송선생 추모시에서
"아, 철창의 피눈물 몇 세월이던가
그 단심 영원히 강산에 피네
심상한 들사람들도 옷깃 여미고 우러르리라
온 겨레 스승이셨다. 일송 선생 그 이름아"
<일송선생 추모가 일부 조지훈시, 이강숙곡>
일송 김동상(본명, 김긍식) 수감사진

한편, 서촌의 우당기념관에서도 우당 이회영과 함께 한 독립운동가 31인에서도 김동삼은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경북 유림대표, 경학사. 신흥강습소 설립운영에 참여 부민단 조직. 서로군정서 참모장. 통의부 조직. 국민대표대회의장. 정의부 참모장. 행정위원. 민족유일당 촉진회 위원장. 피체, 10년형 선고, 옥사.>

♡ 조지훈(趙芝薰, 1920 ~ 1968)은 경북 영양사람, 본명은 동탁(東卓). 일제 강점기 이후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 시인(청록파)이다.
성북동 나들이 초입, 방우산장에서 만난 시인 조지훈을 여기 심우장에서도 떠올려본다.
만해는 심우(尋牛)한다했는데,
시인은 방우(放牛)해도 좋다고 했다.
'찾는 것'과 '놓아 버리는 것'이 크게 다르지만 십우 단계를 걷다보면 결국 같은 길에서 만나는 것 아닐까?
조지훈은 아버지 조헌영을 따라 심우장에서 치룬 김동삼의 장례식에 참례하였다. 이때가 열 일곱살, 어린 총각이다. 이 장례식에서 일송의 원혼을 달래는 승무제가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훈이 심우장 마당에서 승무를 보는 것을 상상하였다. 시인은 열 아홉에 <승무> 시를 지었다.
   훗날 시인은 “용주사 승무제에서 어느 이름 모를 승려의 승무를 보고는 밤늦도록 용주사 뒷마당 감나무 아래에서 넋을 잃고 서 있었다”며 “당시 승무의 불가사의한 선율을 다음 해 여름에 비로소 시로 지을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불교신문>에서)

시적 소질도 있었지만 불교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이 어떻게 스무살도 안된 어린 나이에 이런 깊이 있는 시를 지을 수 있을까?
일제시대, 많은 문예인들이 자발적으로 때론 어쩔 수 없이 곡학아세하면서 오명을 남겼지만 지훈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결벽과 절의의 선비였다. 해방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을 질타하는 대쪽같은 기질을 보였다.
그의 선비정신은 수필 '지조론'에서 잘 나타나있다.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ㅡ 지조론 중에서

김동삼의 장례식, 심우장 마당에서 일송의 원혼을 달래는 승무와 이를 지켜본 어린 총각 지훈의 감상을 상상하며, 그 순간을 그렸다.  이렇게나마 일송 김동삼 장군을 전하고 싶었다. 지훈의 나이쯤에 내가 애송했던 <승무>를 다시 불러 본다.

<승무(僧舞)> ㅡ  조 지 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을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 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이런 뮤지컬이 있었다. 다시 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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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당(午睡堂), 낮잠자기 좋은 집!
말만 들어도 위로가 된다.
일 없이 생각 없이 낮잠에 빠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비가 책베개를 하고 팔베개로 높여서 툇마루에 누웠다. 포근한 햇살을 덮고서 달콤한 낮잠에 빠졌다. 이제 그림은 다 그렸다. 제호를 붙이고 낙관만 하면 된다. 그림 속에도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에 빠진 선비를 그렸다. 버드나무는 푸르게 늘어지고 복숭아 꽃 향기는 은은하게 전해진다. 이 그림을 '수하오수도(樹下午睡圖)라 제호하는 것은 어떨까' 누워 생각에 잠기다 만족해하며 낮잠에 잠겼다.
이 선비는 누굴일까? 나도 그 자리에 누워 낮잠에 빠지고 싶다.

또한 그렇다.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이라! 
밖은 시끄러워도 문을 닫아 버리면 여기가 곧 깊은 산골이구나.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신경쓰며 간섭하고, 원망하며 변명하고, 일희일비할 일도 아니다. 누가 날더러 비겁하다 할지라도, 어떻게 해보겠다며 먼저 나서 애써 가르칠 일도 아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사가 시끄러워도 내 귀를 닫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여기가 곧 적막한 산골이다.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서 버린다'는 시인 백석(白石)의 심정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
그냥 두자. 나를 달래자. 먼저 나를 구하자. 나를 구하지 못하고는 어느 누구도 구할 수 없다. 매화는 피었다 지고, 단풍은 물들었다 시든다. 다 때가 있다.

최순우 옛집 뒷뜨락ᆞ오수당(午睡堂)
~최순우는 단원 김홍도의 화첩에서 오수당 글씨를 찾아내고 그대로 집자하여 당호로 삼았다. 최순우는 한양도성 밖 성북동 이곳에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서서'를 썼다.

최순우 옛집 안채뜰ᆞ'두문즉시심산' 현판

단옹 김홍도의 수하오수도

김홍도(金弘道)ㅡ수하오수도(樹下午睡圖) 제시.

桃紅復含宿雨, (도홍부함숙우)
柳綠更帶朝煙. (유록갱대조연)
寫與 卞穉和. 檀翁. (사여 변치화, 단옹)

복사꽃은 붉더니 간밤의 비를 머금었고,
버드나무 초록빛은 아침 안개띠를 둘렀네.
ㅡ변치화에게 그려주다. 단옹 김홍도

김홍도는 낮잠을 무척 즐겼거나 바랐던 모양이다.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고면거사(高眠居士)'라는 자호를 가진 걸 보면, 높은 베개를 좋아했던가 보다.
단옹은 왕유(王惟)의 전원락(田園樂) 싯구를 가져오면서 그림을 그렸다. 이를 일러 화중유시(畵中有詩)라던가 시중유화(詩中有畵)라던가?
왕유의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花落家童未掃(화락가동미소)
떨어진 꽃잎을 아이는 아직 쓸지않고
鶯啼山客猶眠(앵제산객유면)
꾀꼬리는 우는데 손님은 아직도 꿈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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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신방

그 날 처럼 눈이 푹푹 나릴 때,
흰 당나귀를 타고
시인은 자야를 찾아왔다.
응앙 응앙 울음 소리에
사당 문이 열린다.

이제서야 오셨구려
참 머언 길을 오셨네요.
괜찮아요.
아무 말씀 마셔요.

어서 오셔요.
화촉 밝혀 데운 이 방으로
이렇게 그대
오기 만을 기다렸어요.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ㅡ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길상사 길상화 공덕비와 사당

시인이 떠나온 곳은 흰 눈에 물들어버린 자작나무 숲이다. 시인은 이렇게 그 곳을 노래하였다.

백화(白樺)  ㅡ 백석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인제 자작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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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계추

길 위의 인문학-문사철 인문학 여행 2018. 12. 2. 11:49 Posted by 문촌수기
한가을이다.
물들어가는 단풍이 꽃보다 더 곱다.
서울 성북동 길상사의 단풍은 여느 단풍놀이보다 아름답다.
길상사의 주불을 모신 금당은 극락전이다.
서방정토 영원세상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는 아미타불을 모셨기에 아미타전, 무량수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길상사는 본래 사찰이 아니었다. 대원각이라는 이름으로 술과 고기와 음식을 팔던 고급요정이었다. 풍류가락이 울려퍼지고 흥청(興淸)이 만청(滿廳)이었다.
그랬던 이곳이 대원각의 주인마님이었던 김영한님과 법정 스님의 <무소유> 인연으로 '맑고 향기로운' 부처님 말씀이 퍼지는 사찰이 되었다.
다른 사찰 전각에는 단청이 칠해져있지만,
이곳 전각에는 단청이 없다.
아무리 치장해도 웃음꽃 전하는 요정의 여인네들보다 더 고울 수 없으니 굳이 단청칠 할 필요가 없었을게다. 대원각의 주연회당이 그대로 길상사의 극락전이 되었다. 극락전에 단청칠을 했더라면 가을 단풍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부끄러웠을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량들의 술에 안주로 희생된 모든 축생들과 애써 웃음팔고 옷을 갈아입으며 고통을 치마 속에 감추어야했던 여인네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길상사 극락전의 아미타불 좌우에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지옥중생을 구원하고 현세 중생의 고통을 치유하며 영원 평안의 극락 세계로 구제하는 기도를 드린다.
금당 아래 좌우로는 마애불과 아기 석가모니불도 무류(無類) 중생들을 포근하게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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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가을에는
단풍이 참 곱다.
산책나온 이웃 수녀님 얼굴에
미소가 피었네.
뒷짐지고 행지실로 올라가시는
법정스님께서
무슨 말씀을 건내셨길래,
저리도 평화로울까?
성모님을 닮았다는
관음 보살님은 들으셨겠네.

관음보살상을 조각한 천주교인 최종태 화가는
"이 억겁의 시간에 우리 두 손(법정스님과 나)이 잠깐 하나로 만나서 이 형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억겁의 시간에 우리 두 손이 잠깐 하나로 만나..' 이 말씀 속에서 경외감을 느껴진다. 우주의 나이 137억년, 여기에 우리의 삶 100년은 정말 눈깜짝할 사이다.
'우리 두 손'을 손(手)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가는 '손님'으로 읽으면 더더욱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우주의 손님이 되어 만난 우리의 인연에 감동하고 감사하다.

<8년 전 봄날의 관세음보살상>
'관세음 성모상'이라 이름해도 좋다.

"세상 사람들 바람을 다 들어주시고
굽어 살피셔서 부처님께 천주님께 전구하소서.
나무 관세음 보살님, 아베 관세음 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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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가을 길을 따라 걷는다.
'시인의 방ㅡ방우산장'의 의자에 앉아 잠시 시를 읊는다. 그리고 추억을 그린다.

"꽃이 지는데 바람을 탓하랴.
...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ㅡ 조지훈의 <낙화> 중에서.

그렇다. 지난 봄에 꽃이 지더니
이제  물들었던 잎이 진다.
세상사가 그렇다.
다 가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랴?

  조지훈 시인은 이 곳 성북동에 살면서 박목월,  박두진 등과 함께 청록집을 출간하였다. 이른바 청록파 시인들이다.
조지훈 시인이 살던 그 때 그 집은 지금 없지만 시인을 기념하고자 성북동 142-1번지 가로길에 조지훈 '시인의 방ㅡ방우산장(放牛山莊)' 표지 기념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시인은 자신이 기거했던 곳을 모두 ‘방우산장(放牛山莊)’ 이라고 불렀다. 이는 그가 1953년 신천지에 기고한 '방우산장기'에서 '설핏한 저녁 햇살 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 어디에 가 있든지 내가 아랑곳할 것이 없기 때문' 이라고 말한 것에서 연유하였다. 즉, 마음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 는 그의 ‘방우즉목우’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참고로 보조국사 지눌의 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만해 한용운의 당호는 심우당(尋牛堂) 임을 같이 알아두면 더욱 흥미롭다. 대체 그 놈의 소가 뭐길래, 찾고 키우고 놓아둔다는 걸까?
  기념 조형물을 '폴리'라고 한다. 폴리(Folly)'란 건축학적인 본래의 기능을 잃고 조형적인 의도와 장식적 역할을 하는 건축물을 뜻한다.  근래 도시의 거리에는 그 동네의 자랑스런 사람과 이야기를 찾아 이런 도시조형물(urban folly)을 설치해 가고 있다.
   성북동의 방우산장 조형물은 파빌리온 형의 대리석벽과 창호지없는 격자문이 시인이 살았던 집 방향으로 열려있고, 그 위로 우리 전통 가옥의 처마와 그 아래에 마루가 있으며 마당같이 조성된 곳에는 의자들이 놓여 있다. 시인의 방이라 여기고 둘러앉아 시인의 시 한 수 읊으면 제격이다. 대리석벽 바깥면에는 시인의 절창인 <낙화>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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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성당

길 위의 인문학-문사철 인문학 여행 2018. 11. 25. 18:57 Posted by 문촌수기
'한국의 바티칸'이라 별명하는 성북동 나들이. 길상사와 짝을 지어 성북동 성당을 찾는 의미는 크다. 성북동 성당은 좀 특별하다. 성전이 지하에 있다.
초기교회 카타콤바를 연상시킨다.
그래서인지 더욱 차분하고 경건하다.
유리 성화도 특별하다.
전통적인 스테인글라스 성화기법이 아니고, 우리의 민화풍으로 우리의 조상들을 그렸다. 얼핏보기에 불경이야기를 그린 듯 하기도 하다.
성모상도 조선의 어머니인 듯.

카타쿰바(Catacumba)는 고대 로마인들의 지하 공동묘지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웅덩이 옆’이라는 뜻이다. 로마인들은 지하 공동묘지가 로마 성문 밖 언덕과 언덕 사이에 조성했기에 카타쿰바라 불렀다. 로마인들은 카타쿰바를 ‘네크로폴리스’(νεκροs πολιs-죽은 이들의 도시)라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 죽은 이들의 도시에 숨어들어와 부활 신앙을 고백하고 기도하며 미사를 봉헌했다. 최초의 교회 공동체가 이 카타쿰바에서 형성된 것이다.
  교회가 세워지면서 죽은 이들의 도시는 더는 어둠의 공간이 아니었다. 부활을 기다리는 희망의 안식처로 바뀌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더는 네크로폴리스라 하지 않고 ‘치메테리움’(cymeterium-기다리는 곳, 안식처)이라 불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치메테리움 곧 카타쿰바 내부를 구원과 부활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장식하고 이곳이 단순히 박해의 피난처가 아니라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공간임을 고백했다.
  서울 성북동성당은 마치 카타쿰바를 연상시킨다. 북악산 동편 자락에 터 잡은 성북동은 예부터 아름다운 바위 언덕들과 맑은 시내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마을이었다. 성북동성당은 이 마을 중턱 움푹 들어간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성전 역시 역설적이다. 지하에 있다. 어둡지만 편안하다. 제대를 중심으로 양 측면 각 4개의 창에 색유리화가 장식돼 있다. ‘예수 성탄’, ‘성모 승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한국 순교자’, ‘부활하신 그리스도’, ‘생명나무인 십자가’, ‘최후의 만찬’, ‘성 김대건 신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모두 ‘구원’과 ‘부활’을 이야기한다. 성체를 중심으로 구원과 부활을 상징하는 색유리화가 장식된 지하 공간. 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하느님 찬미의 기도 소리가 더없는 희망과 안식을 준다. 그래서 성북동성당은 카타쿰바, 치메테리움을 참 많이 닮았다.
ㅡ 가톨릭 평화신문에서 발췌

오른쪽부터>+‘예수 성탄’, ‘성모 승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한국 순교자’

왼쪽부터>+‘부활하신 그리스도’, ‘생명나무인 십자가’, ‘최후의 만찬’, ‘성 김대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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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과 시인의 언덕에서
꼭 봐야 할 것을 한장의 그림으로 재구성하였다.
 문학관의 입구는 전면도이다.
그 내부와 제2, 3전시실은 조감도이다. 제1전시실 안에는 시인의 고향에서 가져온 정(井)자형 목조 우물이 있고, 좌우벽으로 윤동주의 삶을 정리한 자료와 사진 그리고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은 작은 꽃밭으로 꾸며지고 하늘을 담고 있는 열린 우물이 되었다. 판자로 깔린 복도를 따라 제3전시실로 들어간다. 닫힌 우물 속 같이 캄캄한 제3전실에서는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시 세계를 영상으로 감상하게 된다. 천장 모퉁이에서 한줄기 햇살이 들어온다.
영상감상을 마치고 문학관 왼쪽 계단을 디디며 시인의 언덕으로 오른다. 닫힌 우물 위에 별뜨락 카페가 있다.
  구절초가 애절하게 피어있는 '시인의 언덕'에는 '시인 윤동주 영혼의 터' 표지석이 있고 남산을 조망하는 곳에는  서시비가 있다.

<윤동주 문학관과 시인의 언덕 조감도>

 한양도성 사대문과 사소문에서 북소문인 창의문 만이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창의문의 물받이 돌은 연잎 모양으로 살아있는 듯 하다. 노새를 탄 양반은 부암동으로 넘어갈 모양 이다. 겸재의 <창의문> 그림에서 길을 빌려왔다.

겸재 <창의문>

<청운아파트ᆞ수도가압장의 재구성>
~지금의 청운공원과 시인의 언덕에는 옛날, 청운아파트가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윤동주 문학관'이 건립되었다. 문학관이 좁은데다 물도 새어 들어와서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땅에 묻혀 있던 두개의 물탱크를 발견하였다. 이 콘크리트 물탱크가 오늘날의 윤동주문학관의 '열린 우물'과 '닫힌 우물'으로 재구성되었다.
두개의 우물은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과 생애를 담은 감동적인 이야기의 현장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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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자락의 수성동 계곡을 찾았다.
겸재의 <수성동도>와 <인왕제색도>를 이야기하고 모방하면서 가을에 물들어가는 '인왕추색 수성동도(仁王秋色 水聲洞圖)'를 나름 그려 보았다.
열 아홉살에 왕비에 오른 지 칠일만에 폐위된 단경왕후는 매일같이 인왕산에 올라 궁궐에 있는 또래의 진성대군(중종)을 바라보며 그리워하였다. 둘은 열 세살에 결혼하였으니 부부이기 전에 절친이었다. 왕비의 치마가 아직도 치마바위에 걸려있다. 계곡에 흐르는 바람과 물소리 만이 애한과 시름을 씻겨내고 있다.

겸재의 <수성동도>.
드론을 띄워 촬영한 영상을 그린 듯힌다.

겸재의 <인왕제색도>
 ㅡ 초여름에 내린 장맛비가 그친 후에 인왕산을 그렸다.  수성동도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는 단선관점(single angle)으로 그렸다면, 인왕제색도는 복선관점으로 그렸다. 송림에 둘러진 친구의 집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며 그렸고, 인왕산 봉우리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며 높여 그렸다. 암벽사이로 세 개의 폭포수가 흐른다. 실제로는 있지않을 폭포이다. 왼쪽의 폭포수가 수성 계곡으로 흐른다. 그 나머지는 운무로 가렸다.

 그림 속의 주인공 친구는 겸재와 그림과 시로 우정을 나눈 사천 이병연이다.
<수성동 계곡의 재구성 이야기>
38년이 된 낡은 아파트 철거 중에
널판지 돌, 기린교 발견.
겸재 정선의 <수성동도> 그림 속 주인공.
조선의 돌다리로서, 현장에 옛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다리.
천 억원 그 이상의 가치.
겸재의 진경산수화, <수성동도> 재현
"진면목을 찾아라."

인왕산 병풍바위 훼손ᆞ일제의 만행
인왕산 치마바위를 자세히 올려다보면 그 왼쪽 바위벽이 훼손된 듯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일제는 1939년 서울에서 '대일본청년연합대회'가 개최되는 것을 기념한다면서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이라는 글자를 암각하였으며, 그 왼쪽으로 9월 16일에 새겼다는 날짜와 "조선 8대 총독인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썼다"는 글씨도 새기고 이 글을 새긴 연유를 이어서 계속 새기면서 조선의 심장과도 같은 인왕산 바위를 훼손하는 만행을 멈추지 않았다.
해방이후 1950년이 되어서야 이 글씨들을 쪼아 일제의 흔적을 지우려 하였으나 병풍 바위의 상처는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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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촌수기 2020.05.02 11: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왕제색도에는 노론의 정치 지령이 담겨있다? | 조선일보 AMP - https://m.chosun.com/news/article.amp.html?sname=news&contid=2020050102291

  2. 문촌수기 2020.05.02 11: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s://youtu.be/5d4t16J4QDI

우리 학교 학부모님들과 성북동 인문학 산책을 나섰다.
약도ㅡ

다녀 온 길, 게시판ㅡ

한성대 입구역 6번출구 버스정류장 뒤에 앉아있는 한중 위안부 소녀상에서 부터 출발하여, 조지훈 시인의 방, 방우산중 조형물에서 그의 시 '낙화'를 같이 낭송하며 소를 풀어 두는 방우의 의미를 새겼다. 그리고 횡단보도 건너 최순우 옛집에 들러 오수당 뒤뜰 마루에 앉아 달콤한 낮잠이야기를 나누고 뜨락있는 한옥집의 정취를 느꼈다.

다시 되돌아 나와 조지훈 시인의 집터 앞을 지나고 성북동 성당 쪽으로 길을 오른다. 예쁜 빵집과 꽃가게를 지나간다.

성북동 성당, 전깃줄이 없다면 전경이 참 예쁠텐데..

오르막 길 좌우로 소위 회장님 댁 같은 저택들이 있고, 낯선 국기가 걸린 대사관저들도 많다.
드디어 길상사에 도착했다.

마리아상을 닮았다는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종교의 일체화를 위해 애쓰신 법정스님의 뜻을 새기고 법정스님의 영정을 모셔둔 진영각을 찾아 수필 《무소유》를 읽었다.

그리고 길상사 시주보살인 김영한 길상화 보살님의 사당을 찾아 백석 시인과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를 읊었다.

길상사를 나와 길을 잠시 내려온다.
작은 슈퍼 가게  옆으로 난 골목길을 오르면서 복자 피정의 집과 덕수교회를 찾아간다. 이태준의 수연산방 앞에 있는 작은 식당 이향을 찾아 점심밥을 먹었다.
단호박 약선밥에 정성어린 나물반찬이 신선이 먹는 보양음식이 되었다.

기운을 더하여 다시 길을 오른다.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 아래에 국화정원이라는 간판을 내건 한옥의 한식당이 보였다.

길 왼편 넓은 터에 한용운 만해 스님이 앉아 계신다. 그 옆자리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누듯 기념 촬영도 하고 심우장을 찾았다. 심우장 뜨락에서 일제시대, 조선의 유일한 땅 심우장의 의미를 새기고,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장례식과 조지훈의 시 '승무'를 꿰어 이야기 나누었다.

심우장은 북정마을 안에 있다.
북정마을 골목은 두사람이 나란히 걷기에 비좁다. 어느 집 담위에 부추꽃이 피었다. '게으런 농부만이 볼 수 있다'는 귀한 꽃이다.
북정마을 위에 시인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가 새겨진 성북동 비둘기 쉼터가 있다. 온기가 남은 돌에 부리를 닦는 비둘기 같이 잠시 둘러앉아 오늘의 인문학 산책을 되돌아보며 의미를 반추해보았다.

북정마을 중심지인 마을버스정류장에서 오늘의 산책을 마무리 지었다.
북정마을을 올라 백악산을 넘어가면 북촌이 나오고, 백악마루 너머에는 창의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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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경복 2018.12.21 06: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음으로 존경하는 황보근영수석님!! 학부모님과 함께한 성북동 일대의 인문학 기행, 저도 함께 산책하며 글속에서 풍기는 근영수석님의 평소 인픔과 함께 감동믜 온기 흠뻑 느끼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