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광무 원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그해 8월 17일 광무(光武)란 연호를 쓰기 시작하고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하였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국가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으며, 10월 12일 원구단(園丘團)에서 상제(上帝)님께 천제를 올리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황제를 자칭하면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으로, 간접으로 승인하였다. 그중 제정 러시아와 프랑스는 국가 원수가 직접 승인하고 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독일도 간접으로 승인하는 의사를 표시하였다.[5] 그러나 당시 열강 대부분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고종은 그 직후인 11월 12일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국장(國葬)을 치렀으며, 과거에 청에 사대하던 관계를 상징하던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 건립에 추진하여 11월 20일에 완공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원하고 있었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고서 입법기관인 교전소를 설치하고 원로대신 다섯 명과 더불어 박정양과 이완용, 서재필, 탁지부 고문 영국인 존 브라운, 법부 고문 샤를 르장드르를 위시한 외국인 고문관들을 교전소 부총재와 위원으로 배정했으나 교전소 위원이 친미개화파와 외국인이 과반수를 차지하자 원로대신들이 꺼리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 ㅡ
"대한제국은 무기력하지 않았고, 고종은 무능한 황제가 아니었다"
http://v.media.daum.net/v/20171011173625646?f=m&rcmd=rn

환구단 ㅡ 황제국 선포 후 하늘에 제사드린 환구단의 황궁우와 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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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동쪽 자락 비우당(庇雨堂),

조선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의 저자,  실학자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집터이다. 집터는 한양도성을 이루고 있는 동.서.남.북 봉우리 중 가장 낮은 서쪽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 동쪽 상산 줄기에 위치하고 있다. 
이수광은 조선중기 실학자의 선구자로 세차례에 걸쳐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은 물론 중국, 일본, 유구, 베트남 등 중국 주변국은 물론 영국, 포르투갈 등 서양세계를 비롯한 다양한 내용을 담은 백과사전 성격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을 저술하였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이조참판까지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세번씩이나 다녀올 정도로 고위층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지만, 그가 살았던 작은 초가집은 당시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집터에는 이수광이 살았던 집을 복원해 놓고 있는데 부엌 1칸, 방2칸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전형적인 서민가옥 형태를 하고 있다. 원래 이수광의 외가쪽 인물로 청백리로 널리 알려졌던 유관이 살았던 집을 이수광이 고쳐지어 살았다고 전해지는 집이다.  현재의 가옥은 최근에 옛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실제 초가집과는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한양에 거주했던 선비들이 소박하게 살았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집터 뒷편에는 단종비 정순왕후가 폐위된 뒤 빨래를 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자주동샘과 거북모양의 바위가 남아 있다.

비우당, 서울 종로구 창신동
비우당은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살던 곳이다. 낙산 동쪽 상산의 한 줄기인 지봉 아래 있었는데 이수광의 호 지봉이 여기에서 나왔다. 원래는 창신동 쌍용2차 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서울시에서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복원하였다. 조선 초기의 청백리로 명성이 높은 유관이 이곳에서 살았는데 지붕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면서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라 농담을 하였다는 ‘유재상의 우산’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이곳은 외손인 이수광 집안으로 상속되었는데, 그 집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이수광이 집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동원비우당기’에 이러한 사연을 자세히 적었다. 이수광은 비우당에 살면서 이 일대의 여덟곳을 ‘비우당 팔경’이라 하고 시를 읊었다. 동지세류에서 흥인문 바깥의 못가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노래하였으며, 북령소송에서는 북악의 산마루가 낮에도 늘 어둑한데 푸른 솔 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고, 타락청운에서는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하였다. 아차모우에서는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하였다. 전계세족에서는 비가오고 나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에 드러눕는다고 하였고, 후포채지에서는 지봉과 상산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사호처럼 살고 싶다 하였다. 암동심화에서는 복사꽃 핀 꼴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였고, 신정대월에서는 맑은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는 흥취를 말하였다. 비우당이 있던 곳은 조선시대 자지동이라 불렀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폐위되어 영월로 간 단종을 기다리면서 이곳에 와서 빨래를 하였는데 빨래가 붉은 빛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위쪽에 거북바위가 있었다. 정순왕후가 단종이 탄 거북이를 타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아침에 보니 이 바위가 나타났다는 전설도 전한다. <출처:서울시청>

한양도성 낙산정상에서 동으로, 왼쪽에 한성대, 오른쪽에 쌍용2차아파트 담장 사이로 난 길을 내려오면 아파트단지 정문 가까이에서 자주동샘 안내 이정표가 보인다. 이 내리막길을 50여 미터 쯤 내려오면 비우당이 있다.

낙산정상에서 북으로 바라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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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 나폴레옹 제과점ㅡ최순우옛집ㅡ선잠단지ㅡ성북동면사무소ㅡ한양도성 성곽길ㅡ북정마을
  ㅡ성북동 비둘기 쉼터ㅡ만해 심우장ㅡ(점심)ㅡ수연산방(차한잔)ㅡ길상사ㅡ해산

ᆞ심우장, 북향으로 지은 까닭은? 만해의 항일정신과 시문학 세계, 심우도 그림 이야기

국정원? 식당

ᆞ수연산방:구인회의 상허 이태준 문학세계. 전통차 한잔 ㅡ 이번엔 그냥 지나친다.
ᆞ길상사:백석 시인을 사랑한 자야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김영한,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서

길상사의 주전은 극락전이다. 보통 대웅전에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는데, 길상사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셨다.
절이 되기 전의 이곳은 술과 고기와 여인네들의 웃음을 팔던 요정이었는데, 남성들의 노리개가 되었던 여성들과 죽어간 짐승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로 극락전을 주전으로 삼았다.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상,
오래전 그 앞에 앉아 들고간 차를 마시며 색연필로 화첩에 그려보았다.
성모마리아ㅡ관세음보살상

백석이 사랑한 자야.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고급요정의 방갈로가 지금은 스님들의 수행방이 되었다.

법정스님 살아계실 적과 입적당시의 행지실은 지금은 법정스님의 진영과 유품을 모시고 진영각의 현판을 달고 있다.
진영각 툇마루 왼쪽 끝에 다정한 연인들이 앉아 있는 그 옆에 장작나무 만든 투박한 의자가 덩그러이 놓여있다.
오래전 스님께서 불일암에 계실적에 만들어 '빠삐용 의자'라는 이름을 붙인 그 의자가 이 의자이던가? 아니라해도 그것을 닮았으며, 그것을 의미하며 상징으로 만들어 두었을거다.
인생을 허비한 죄로 절해고도에 갇힌 빠삐용의 심정을 헤아리고자 이 의자를 만들고 앉아,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나 돌아보았다는 의자이다.
고독한 어린 왕자가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석양을 바라보기 위해 의자를 마흔 세번이나 옮겨가며 앉았던 처럼 스님도 그 의자에 앉아 고독과 어린 왕자를 사랑하며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는 이 '빠삐용 의자'에  '어린 왕자의 의자'가 오버랩되어 내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끽다거ㅡ차나 마시고 가게.

어느 책속에서.법정스님  뒷모습
성모를 닮은 관세음보살상을 지나 낙엽을 바라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고갯길을 걸으시는 법정스님.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나도 모르게 시가 읊어집니다.
스님의 뒷 모습에서 측은지심과 경건함을 동시에 느껴집니다.

불일암의 빠삐용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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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촌수기 2017.09.23 18: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맑고 향기롭게'는 지난 1994년 3월 법정스님의 가르침대로 세상과 자연,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며 살자는 취지로 법정스님을 회주로 발족한 시민단체로 그동안 생태사찰가꾸기, 생태문화기행 등 환경보호와 생명사랑을 실천해왔다.
    길상사는 시인 백석의 연인이며 요정 `대원각'을 운영했던 김영한 할머니가 숨지기 3년전인 지난 1996년 서울 성북동 7천여평의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기증해 건립한 절이다.
    (서울=연합뉴스) 서한기기자 shg@yna.co.k

  2. 문촌수기 2017.09.23 18: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법정스님은 다래헌(서울 봉은사)과 불일암에 성모상을 모셔놓고 촛불 공양을 올리셨습니다.
    "여러분이 빚을 져서는 안 되겠지만 사랑해야 할 빚만은 남아 있다."는 로마서 13장 8절 구절이 참 좋다고 옮겨 적으시기도 했습니다.
    ㅡ이해인 수녀가 계시는 수녀원 아침기도에 참석하셨을 때는 ~
    ㅡ 일여, 날마다 새롭게 98, 예담

산책길] 한성대입구역 5번출구,
나폴레옹 제과점에서 만남 ㅡ최순우옛집ㅡ 선잠단지ㅡ 성북동면사무소ㅡ한양도성 성곽길ㅡ북정마을ㅡ성북동 비둘기 쉼터 ㅡ만해 심우장ㅡ (점심)ㅡ 수연산방(차한잔)ㅡ 길상사 (- 마을버스 타고 다시 한성대입구역으로 복귀 - 해산)
출발 ᆞ나폴레옹 제과점ㅡ

최순우옛집ㅡ

오수당

두문즉시심산ㅡ"문을 닫은 즉, 이 곳은 깊은 산속." (오수당 안채뜰에 붙인 현판)
굳이 몸이 드나드는 곳만 문이 아닐 것이다. 더러운 세상에 마음을 닫는 것, 그럴 적에 유유함을 얻게되라라는 것은 아닐까? '세상 같은 것은 더러워서 버린다'는 백석의 심정도 이러한 것이 아닐까?

오수당 뜨락에서 낮잠단상ㅡ옛날 학창시절의 달콤한 오수, 공자와 제자 재여의 낮잠, 목어와 목탁이야기, 잠과 꿈ㅡ호접지몽, 임실의 오수(개 오, 나무 수) 이야기 등

밀레와 고흐의 낮잠 그림ㅡ노동후의 휴식, 한편의 성화처럼

선잠단지ㅡ스쳐지나가며, 경신고 담장이 된 한양도성성곽돌들
우리밀국시와 성북동면사무소?ㅡ국수단상

한양도성 성곽길ㅡ성북동마을

북정마을

성북동 비둘기 쉼터ㅡ김광섭의 시

만해 심우장ㅡ
(점심)ㅡ
수연산방(차한잔)ㅡ
길상사

[인문학-스토리텔링]
ᆞ최순우 옛집:<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의 저자
             오수당 에서 '낮잠' 단상
ᆞ선잠단지:선잠단ㅡ선농단ㅡ사직단ㅡ장충단 '제단' 단상
ᆞ성북동 면사무소에서 '국수'단상
ᆞ한양도성 길과 성북동
ᆞ북정마을: 도시 개발과 촌락보존의 가치
ᆞ비둘기 쉼터: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시낭송
ᆞ심우장:만해의 항일정신과 시문학 세계, 심우도 그림 이야기
ᆞ수연산방:구인회의 상허 이태준 문학세계. 전통차 한잔
ᆞ길상사:백석 시인을 사랑한 자야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서
      -성모마리아와 관세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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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인문학 산책

"산이 곧 책이다."
매홀고 길 위의 인문학 산책 동아리 선생님들이 다음주 토요일(9월 16일) 인문학 산책길을 떠납니다. 10월 말 경 있을 본교의 사제부 행복 문학기행 사전답사를 겸합니다.
함께 걸으며 가을을 맞이합시다. 

[시작모임] 09.16(토) 10시ㅡᆞ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출구, 
        나폴레옹 제과점 2층카페에서 커피 한잔드시며 만남을 기다려요.

[산책길] :
나폴레옹 제과점ㅡ최순우옛집ㅡ선잠단지ㅡ성북동면사무소ㅡ한양도성 성곽길ㅡ북정마을
  ㅡ성북동 비둘기 쉼터ㅡ만해 심우장ㅡ(점심)ㅡ수연산방(차한잔)ㅡ길상사
    (- 마을버스 타고 다시 한성대입구역으로 복귀 - 해산)

[인문학-스토리텔링]
ᆞ최순우 옛집:<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의 저자
             오수당 에서 '낮잠' 단상
ᆞ선잠단지:선잠단ㅡ선농단ㅡ사직단ㅡ장충단 '제단' 단상
ᆞ성북동 면사무소에서 '국수'단상
ᆞ한양도성 길과 성북동
ᆞ북정마을: 도시 개발과 촌락보존의 가치
ᆞ비둘기 쉼터: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시낭송
ᆞ심우장:만해의 항일정신과 시문학 세계, 심우도 그림 이야기
ᆞ수연산방:구인회의 상허 이태준 문학세계. 전통차 한잔
ᆞ길상사:백석 시인을 사랑한 자야 -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서
      -성모마리아와 관세음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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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윤동주

길 위의 인문학-문사철 인문학 여행 2017. 3. 26. 16:22 Posted by 문촌수기
지난주 토요일, 윤동주 하숙집ㅡ문학관ㅡ시인의 언덕
어제, 윤동주 달을 쏘다.

신논현역 입구, 교보빌딩 캘리ㅡ윤동주 새로운 길

수성동계곡 가는 길에서의 '사이좋은' 카페
추억이 있는 곳

인왕산 자락ㅡ수성동계곡 가는 길에서어 윤동주 하숙집

 

윤동주 문학관(위)과 시인의 언덕(아래)

 

 

그리고 어제ㅡ 아!  윤동주 "달을 쏘다"
나도 절규하며 통곡하며, 달빛을 향하여 돌을 던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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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계곡 가는 길

매홀고 인문학 산책 교사 동아리와 나루고 국어교과 선생님들의 인왕산 자락 산책길입니다. 점심은 누하동의 즐겨가는 선인재 식당입니다. 

길을 걷다 골목에 주저앉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네요.

인왕산 병풍ᆞ치마바위와 수성동 계곡 기린교.

"그 까짓것 뭐 그리 대단하다고
민들레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바로 이런 자세가 인문학하는 자세.

박노수 미술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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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자락
  조선 초기에는 왕족들의 땅
이후로는 문인과 예술인들의 땅
그래서 세종마을이라 이름하지만, 겸재 정선의 마을이라해도 무방하다.
어제 우리 매홀고 선생님과 이웃의 나루고 선생님 14인이 인문학 산책을 동행했다.

1. 숫자로 이야기하는 사직단.
 사직은 국가의 근본이다. 물론 백성이 나라의 으뜸되는 근본이지만 종묘와 사직은 그 다음으로, 백성의 삶의 터전을 보호하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비는 나라와 주권의 상징이다.
 사직단을 숫자로 이야기해본다.

가장 먼저 보이고 떠올린 숫자는 4이다.
온통 사각형이다. 사신문에 사유문 그리고 그것을 연결한 담장, 그리고 사단ᆞ직단의 사각 제단. 사각형은 땅을 상징한다. 하늘은 원으로 상징된다.
어떤 선생님은 먼저 8을 떠올렸다. 문이 여덟개란다. 그것도 맞는 말씀이다.
다음 보이고 떠올린 숫자는 당연 2이다. 동편이 사단이고 서편이 직단이다. 사단은 토지신의 제단이고, 직단은 곡신신의 제단이다.
다음 숫자는 쉬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찾을 수 있다. 길이다. 북신문으로 들어가는 향축로, 서신문으로 들어가 판위에서 향축로와 만나는 어로 그리고 태사ᆞ태직ᆞ후토ᆞ후직의 신위가 제단으로 걸어오는 신위로  이렇게 3개의 길이 있다. 또 두개의 제단은 3단으로 축석되어 있다. 아래로부터 지ᆞ인ᆞ천이다. 그중 가운데 축석이 가장 두텁다. 사람(백성)이 가장 귀중하다는 의미이다.
이제 3보다 더 찾기 어려운 유일한, 정말 유일한 '1'이 있다. 바로 사단 위에 석주가 있다. 있으니 찾아보라고 말하면 찾을 수 있다. 전국의 수백 사직단 중에서도 없는데, 이 곳이 바로 나라의 중심이란 뜻으로, 유일하게 있다보니, 돌의 주인이라하여 '석주'라 한다.
감추어진 숫자는 5이다. 사단 아래에는 오방색의 흙으로 채워져 있다.  오방은 ..

이제 0을 이야기 한다. 무신불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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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으로 새로운 조선의 11대 임금으로 옹립된 진성대군(중종)은, 성종의 계비였던 대비윤씨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반정이 일어났을 당시에, 반정세력들은 곧바로 연산군의 측근세력있었던 임사홍, 신수근, 장녹수등을 처형했다. 그리고 폐위된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는데, 강화도로 유배를 간 연산군은 2달 만에 원인 모를 병에 걸려서 사망하고 만다.
그런데 연산군이 박원종등 반정세력에 의해서, 독살당했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그런데 연산군의 처남으로서 연산군을 보필했던 최측근세력인 익창부원군 신수근은 반정이 일어난 즉시 처형당했는데, 문제는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된 진성대군(중종)의 부인 신씨가 바로 신수근의 딸이라고 하는 점이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 새로운 조선의 왕으로 등극하게 되자, 진성대군의 부인인 신씨도 당연히 왕비로 등극하게 된다.
그런데 신씨는 조선의 왕비로 등극한지 7일만에 왕비에서 폐위되고, 사가로 쫒겨나는 불운을 겪고 만다.

진성대군(중종)의 부인 신씨가 왕비에서 쫒겨나게 된 이유는,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이 연산군의 최측근세력이었고, 그는 이미 역적으로 몰려 처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반정세력들의 입장에서는 역적의 딸인 신씨를 국모로 모실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신씨가 왕비가 되면, 언제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했던 원수를 찾아내어, 피의 보복을 하게되는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중종반정 성공이후,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자는 반정세력의 우두머리격인 박원종이었는데, 박원종은 진성대군(중종)에게 압력을 가해서, 그의 부인인 신씨를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사가로 유폐시키고 만다.

이로써 신씨(단경왕후)는 조선역사상 가장 짧은 7일 동안만 왕비의 자리를 유지했던 가장 불행한 왕비로 기록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씨가 페위된 다음날, 중종은 반정의 핵심세력인 박원종의 조카인 장경왕후와 새롭게 혼례식을 올리면서 새로운 왕비가 탄생하게 된다.

♣ 중종과 폐비 신씨의 애절한 사랑과 이별이야기, 빨간 치마바위 이야기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게된 진성대군(중종)은 연산군이 재위하던 시절에, 연산군의 폭압정치와 탄압통치에도 최대한 몸을 낮추고 조심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재위시절 연산군은 자신의 정책에 조금이라도 반대하거나,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는 대신들은 가차없이 죽이는 등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저질렀었다.
연산군이 일으킨 갑자사화 때에만 해도, 무려 122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연산군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이렇게 포악한 연산군의 탄압과 횡포가 서슬 퍼렇던 시절에, 진성대군(중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몸을 최대한 낮추라고 조언하고 보필했던 부인 신씨의 충고와 조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연산군의 폭정시절에는 연산군의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에, 무고한 대신이나 선비들이 졸지에 역적으로 몰려서, 숙청당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부인 신씨의 충고와 기지로 진성대군(중종)은 몸을 낮추고 최대한 조신하게 행동함으로써, 숙청을 당하지 않고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성종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진성대군(중종)과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인 폐비 신씨는 각각 12살과 13살의 어린 나이에 혼례를 치렀다고 한다.

지금의 초등학생나이인 어린 나이에 두사람은 혼인식을 치렀으니까, 진성대군(중종)에게 부인 신씨는 첫사랑이 되는 셈이며,
이렇게 어린 나이에 부부가 된 두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진한 우정을 키워나갔고, 성인이 된 후에 두사람의 애정은 매우 두터웠다고 하며 금슬이 좋았다고 한다.

1506년 진성대군과 신씨의 나이가 각각 19살과 20살 되었을 때에, 연산군에 반대한 반정세력들에 의해서, 반정쿠테타가 일어났고, 반정군 군사들이 진성대군의 집앞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군사들이 집을 에워싸고 포위하자, 진성대군(중종)은 군사들이 자신을 해하려고 온 줄로 오해하고, 자살을 시도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차고 똑똑했던 부인 신씨는 겁먹은 진성대군의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출동한 군사들의 말머리가 우리를 향해있으면, 우리를 해하려고 온 군사가 맞지만, 군사들의 꼬리가 우리를 향해 있다면, 그것을 오히려 공자를 호위하려 온 것이기 때문에, 자살여부는 그때 가서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출동한 군사들을 보고 무조건 겁만 먹고, 자살하려는 진성대군(중종)의 팔을 제지하면서, 설득했던 부인 신씨의 재치와 충고로, 진성대군의 자살을 막았다고 한다.

두사람이 대문을 열고서 군사들을 살펴보니까, 군사들의 말꼬리가 대문으로 향해있었고, 말머리는 대궐쪽으로 향해 있었다고 한다.
즉, 진성대군의 집앞에 모여들었던 군사들은 진성대군을 호위해서 대궐로 모시기 위해서, 출동했던 군사들이라고 한다.

1506년 9월 18일날, 박원종과 성희안 등을 중심으로 한 연산군 반대세력들이 군사를 동원해서 반정쿠테타를 일으켰고,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을 새로운 임금으로 옹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반정세력의 옹립으로 조선의 제11대 임금으로 등극한 진성대군(중종)은 궁궐로 입궁해서, 근정전의 용상위에 올랐다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성대군의 부인 신씨는 그 다음날에 궁궐에 입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성대군이 조선의 11대 왕으로 등극하였으니, 자연히 부인 신씨도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박원종과 성희안 등 반정 공신세력들이 중종의 부인 신씨가 왕비가 되는 것을 매우 탐탐치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바로 중종의 부인 신씨가 연산대군의 처남이자 최측근인 신수근의 딸이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신씨가 역적의 딸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미 연산군의 폐위를 극렬하게 반대했던 신수근을 죽였던 박원종은 자신들이 죽인 신수근의 딸 신씨가 왕비에 오르면, 나중에 큰 피의 보복이 일어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박원종 등 반정 공신들은 중종의 부인 신씨가 왕비가 될 수 없다고 그녀의 폐위를 결렬하게 주장했다고 하며, 반정 공신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던 중종은 신씨의 폐위를 반대했지만, 결국 실권이 없었던 중종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었고, 반정공신들의 주장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진성대군(중종)이 조선의 왕이 되었지만, 그 부인 신씨는 왕비가 된 지 7일만에 폐위되었고, 궁궐에서 쫒겨나서 사가로 유폐되고 말았다.
남편은 한나라의 최고의 지존 임금이 되었건만, 왕의 조강지처였던 신씨 부인은 거꾸로 사가로 유폐되는 불운을 맞이했던 것이다.

연려실기술과 야사의 기록에도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은 ‘젊었을 때부터 두사람은 애정이 두터웠지만, 부인의 아버지를 우리가 죽였으니, 그 딸(신씨)을 왕비로 둔다면, 나중에 우리에게 무슨 우환이 생길지 모른다’고 말한 기록에서 보듯이,
중종반정에 성공한 반정공신들이 신씨 부인으로 인한 후환을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애정이 남달리 두터웠던 중종과 신씨부인은 19살, 20살의 나이에 생이별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신씨부인은 조선역사상 가장 불행한 왕가의 여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야사에는 부인 신씨가 자신으로 인해 중종이 반정공신들로부터 화를 입을까봐, 반정공신세력들의 폐비조치에 순순히 응해서 궁궐에 나갔다고 한다.

어차피 역적의 딸이 되어버린 신씨는, 진성대군(중종)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고, 왕비의 자리에서 순순히 물러나서, 사가로 되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처리문제를 놓고 중종이 반정공신세력들과 대립각을 세운다면, 중종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신씨가 스스로 궁궐을 떠났다는 야사의 또다른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반정세력들의 도움으로 왕이 된 중종은, 반정공신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부인 신씨가 폐위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 한사람 지켜주지 못한 진성대군(중종)의 가슴을 얼마나 사무치게 괴로웠겠는가?
또한 끔찍이 사랑했던 지아비(중종)과 생이별하고, 평생을 유폐되어 살아야했던 폐비 신씨의 마음은 얼마나 처참하게 찢어졌겠는가?

폐비 신씨가 쫒겨나가 살았던 사가(私家)는 인왕산의 정상부근에 있었다고 하며, 이미 신씨의 부모형제들은 역적집안으로 죽임을 당하는 등 풍비박산나서, 신씨는 홀로 외롭게 사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신씨가 폐위되고 난 후, 중종은 부인 신씨를 오랫동안 잊지못하고 무척 그리워했었다고
한다.
야사의 기록에 의하면, 중종은 종종 혼이 나간 사람처럼,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고 하며, 수시로 궁궐마당으로 나가 인왕산쪽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중종이 새롭게 혼인한 장경왕후가 혼인 10년 만에 아들(인종)을 출산했는데, 출산의 후유증을 앓다가 그만 7일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왕비의 자리가 공석이 되고만 것이다. 왕비의 자리가 비게 되자, 담양부사 등 일부대신들은 폐위된 신씨를 왕비의 자리에 다시 복위시켜줄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서슬이 퍼렇던 반정공신세력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서, 중종은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지는 못했다고 한다. 중종은 여전히 반정공신들에게 휘둘리는 연약한 임금이었을 뿐이며,
중종은 폐비 신씨를 복귀시키지 못한 채, 다른 여인과 혼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폐비 신씨를 복위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버린 셈이다.

인왕산은 부인 신씨가 유폐되어있는 사가가 있는 곳이다. 중종은 새로운 왕비와 혼인생활을 하는 중에도, 종종 자신의 조강지처였던 신씨를 잊지못하고, 그녀가 살고있는 인왕산쪽을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폐비 신씨도 또한 지아비인 중종을 하염없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폐비 신씨는 중종의 생일날이 되면, 생일상을 차려놓고 그 앞에 앉아서 중종의 안위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폐비 신씨는 중종이 자신이 있는 인왕산쪽을 자주 바라본다는 소식을 들고 난 후에는, 자신이 즐겨입었던 붉은치마를 인왕산의 큰바위에 걸쳐두었다고 한다.

폐비 신씨는 중종이 인왕산쪽을 자주 바라본다는 말을 듣고, 인왕산의 큰바위에 자신의 치마를 걸어서,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바위가 바로 인왕산의 ‘치마바위’이다. ‘치마바위’는 실제로 사직동 인왕산부근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평생토록 폐비 신씨는 인왕산에 올라서, 궁궐을 내려다보면서, 남편을 한없이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1544년, 중중은 57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들어눕게 되었고, 곧 임종이 머지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중종이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에, 한 여승이 중종의 처소를 방문했다고 한다. 여승의 차림으로 중종 앞에 나타난 여인은 바로 폐비 신씨였다고 한다.

자신이 죽을 것을 직감했던 중종의 요청으로 폐비 신씨는 여승으로 분장하고서 중종 앞에 나타난 것이다.

폐비 신씨가 궁궐을 나간 지, 무려 39년만에 중종과 신씨는 다시 재회한 것이다. 자신이 왕이 되고도 권력이 약해서, 부인을 지켜주지 못했던 중종은 자신의 임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조강지처인 신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중종편’에도 ‘중종은 옥체가 미령해서 여승을 불러서 기도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소문에는 폐비 신씨를 보고싶어서, 여승으로 분장해 입궐케 했다고 한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중종은 자신이 임종하기 직전에 입궐시킨 여승은 폐비 신씨일 것으로 추정되며, 그녀를 남의 눈에 안 띄게 여승으로 분장시켜서 궁으로 불러들였던 것
이다.
자신이 끔찍이 사랑했던 단 하나의 사랑, 조강지처를 헤어진 지 39년 만에 그것도 임종 직전에야 다시 볼 수 있었던 중종과 폐비 신씨는 얼마나 통한의 눈물을 흘렸겠는가?

폐비 신씨는 우리나라 궁중 역사상 가장 애절하고 슬픈 왕가의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가지 구별한 것이 있는데, 페위된 연산군의 정비도 신씨인데, 연산군 정비 신씨는 중종 부인 신씨의 고모라고 한다.

그러니까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정비가 되었고, 신수근의 딸은 중종의 부인이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두명의 신씨 모두 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폐위되는 불행을 겪었던 것이다.

폐비 신씨는 1557년 71세의 나이로, 폐위된 지 51년 만에 자신의 사가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남편 중종이 죽은 지 13년 만에 사망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폐비 신씨는 죽은 지 233년이 지난 영조 때에 단경왕후로 복위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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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애틋함은 일제시대에 변질됐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동원체제를 강화하던 일제는 1939년 서울에서 이른바 ‘대일본청년단회의’를 열고 이를 기념한다며 치마바위에 글씨를 새겼다. 사진의 오른쪽 ‘동아청년단결’로부터 시작하는 100여 글자다. 해방 후 글자를 쪼아냈는데 흔적이 너저분하게 남아 있다. /글·사진=최수문기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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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하피첩(霞피帖).
나이 열 여섯에 한 살 연하인 정약용에게 시집 온 풍산 홍씨가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어느날 장롱 속에 고이 간직했던 빛 바랜 다홍치마를
강진에 귀양 가 있는 다산에게 보냈다.

다산이 나이 40에 귀양을 떠난 지 10여년이 넘었고 언제 해배(解配) 될지
가늠하지 못하는 처지에, 접어든 황혼에 대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신혼 때 입던 그 치마가 장롱 속에서도 빛이 바랬으니
인생의 무상함을 탓해야 무엇을 하겠는가?

자식 아홉에 여섯을 가슴에 묻고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누에와 함께
자식들도 키웠으니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가히 짐작을 하고도 남는다.

다산의 나이 스물일곱에 과거에 급제를 하였고 13년 뒤에 다시 귀양을 갔다.
빠른 출세도 아니었지만 인생의 황금기에 유배를 가야만 했던 다산으로 인하여
가정 경제는 거의 부인 홍씨의 몫이었다.

38세에 얻은 농장도 세 살이 되던 해에 죽었고,
귀양지에서 그 소식을 들은 다산이나 혼자 그 일을 감당을 했어야 했던 부인 홍씨,
모두 애절하기는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다산은 요절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겨서 “구장이와 효순이는 산등성이에다 묻었고,
삼동이와 그 다음 애는 산발치에다 묻었다. 농아도 필시 산발치에 묻었을 거다”라고
적고는 “오호라, 내가 하늘에서 죄를 얻어 이처럼 잔혹하니 어쩌란 말인가”라고
비통해 했다.

말없이 여섯 폭의 다홍치마가 보내 왔지만 다산은 그 치마를 잘라서 만든 서첩에
“노을 치마”란 뜻인 “하피첩(霞피帖)”이라 표지를 썼다.
찾아 온 황혼에 순응을 하자는 뜻으로 빛바랜 다홍치마를 보낸 것인지,
아니면 현재는 고통스러우나 아름다운 추억을 생각하며 힘을 내자는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산은 그 치마폭으로 하피첩을 만들었다.

"내가 강진 귀양지에 있을 때,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보내왔다. 시집올 때 입었던 붉은색 활옷이었다. 붉은빛은 이미 씻겨 나갔고, 노란 빛도 엷어져서 글씨를 쓰기에 마침맞았다. 마침내 가위로 잘라 작은 첩을 만들어, 붓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지어 두 아들에게 보낸다. 훗날 이 글을 보면 감회가 일것이고, 두 어버이의 흔적과 손때를 생각하면 틀림없이 뭉클한 느낌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하피첩(霞帔帖)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곧 붉은 치마(홍 군, 紅裙)을 돌려 말한 것이다. 가경 경오년(1810) 초가을 다산(茶山)의 동암(東庵)에서 정약용 쓰다."

아들에게 쓴 시구(詩句)

病妻寄敝裙, 千里托心素, 歲久紅己褪, 悵然念衰暮, 裁成小書帖, 聊寫戒子句, 庶幾念二親, 終身鐫肺腑. 몸져누운 아내가 헤진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의 먼 곳에서 본마음을 담았구려. 오랜 세월에 붉은빛 이미 바랬으니, 늘그막에 서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재단하여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는, 아들 경계해주는 글귀나 써보았네. 바라노니 어버이 마음 제대로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하피첩의 '하피(霞帔)'란 중국 당송(唐宋) 시대 신부가 입은 혼례복을 말하는 데, 조선 시대에는 왕실의 비(妃), 빈(嬪)들이 입던 옷이다. 여기에서 하피란 다산의 부인 풍산 홍 씨가 시집 올 때 입고 온 붉은색 치마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제대로 쓰자면 홍군(紅裙), 즉 '붉은 치마'라고 써야 옳지만 이는 해석하기 나름으로는 '기생'이라는 다른 뜻도 있기 때문에 그냥 붉을 하(霞), 즉 노을 하를 써서 '하피(霞帔)'라고
한 것이다.
한편 그로부터 3년 뒤 다산은 시집 간 외동딸이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서첩을 만들고 남은 천 조각에 한 해 전에 혼인한 외동딸에게 줄 그림을 그렸다. 꽃이 벙근 매화 가지에 올라탄 멧새 두 마리를 그려넣은 '매조도(梅鳥圖)'(고려대박물관 소장)가 그것이다. 유배 시절 장남 학연이 두어 차례 다녀간 적은 있지만,
아내와 외동딸은 그 긴 세월 동안 얼굴 한번 볼 수가 없었다. 하나 남은 딸의 시집가는 날도 함께 해주지 못했으니 아비 된 자로서 다산의 심경이 오죽했으리요.

 

▲ 매조도 다산이 외동딸에게 그려준 매화와새 그림으로,

그 아래 이를 그린 사연을 적었다 ⓒ 고려대박물관 소장

翩翩飛鳥 息我庭梅
파르르 새가 날아 뜰 앞 매화에 앉네
有烈其芳 惠然其來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 왔네
爰止爰棲 樂爾家室
여기에 둥지 틀어 너의 집 삼으려무나
華之旣榮 有賁其實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

옛 사람들의 절제된 애정 표현, 그러나 그 정신적 교감은 현대 누구도 따르지는 못할 것이다.
다산은 18년의 유배에서 풀려서 집에 온 때가 58세, 그러나 둘은 다시 18년을 같이 살다가 75세에 별세를 하였다.

다음은 다산이 작고 하시기 전 병중이지만 회혼례(결혼 61주년)를 위하여 지은 시.
회혼례 며칠 뒤에 별세를 하셨다.

육십 평생 바람개비 세월이
눈앞을 스쳐 지나는데
무르익은 복숭아 봄빛이
마치 신혼 때 같아라.

칠순 나이에 신혼의 기분을 연상할 수 있는 그들의 정신 세계,
신혼은 더불어 누리는 것이니 부인 홍씨 역시 그에 상응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딸을 시집보내고 불과 몇 달이 지났을까,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만난 소실 정씨에게서 딸을 하나 얻었다.
이때 다산은 이미 해배 명령이 떨어져 곧 여기를 떠나야 할 처지였다. 저 어린 것이 여기 혼자 남아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이 어린 딸 홍임을 위해 똑같은 크기의 그림 한 폭을 더 그렸다.
똑같은 매조도(梅鳥圖)인데 여기에선 멧새가 한 마리다. 이 그림은 실제 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古枝衰朽欲成搓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擢出靑梢也放花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웠구나
何處飛來彩翎雀
어디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應留一隻落天涯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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