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와 놀기
논어03. (길에서 읽는 논어) 안중근 의사의 삶과 논어 유묵.
문촌수기
2018. 6. 27. 20:12
3. 길에서 읽는 논어ㅡ안중근 의사의 삶과 유묵
▣ 그의 정의로운 전쟁
1909년(31세) 3월 2일 안중근은 김기용, 강기순, 백남규 등 11인과 동의단지(同義斷指)동맹을 결성하였다. 3월 5일에는 총기를 휴대한 약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수청 방면으로부터 합십마 부근으로 이동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다 이튿날 일진회 회원 박모를 응징하였다. 그해 4월 10일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병탄안을 찬성하였으며 7월 10일에는 일본 정부 각의에서 의결되고 일본 국왕은 그날로 재가하였다.
그해 10월 9일 이토는 일본 국왕을 만나 3, 4주간 예정으로 만주를 여행한다는 계획을 알리고 18일 중국 다렌에 도착한다.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던 안중근은 이 소식을 듣고 우덕순을 만나 이치권의 집으로 함께 돌아와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합의한다. 10월 22일 안중근, 우덕순, 류동하는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때 이토는 아침 뤼순을 출발하였다.
드디어 역사적인 날. 10월 26일 아침 6시 30분경, 안중근은 새 양복과 모자를 쓰고 묶고 있던 집을 나선다. 7시경에 하얼빈에 도착하여 이토가 오기를 기다린다. 9시경 이토를 실은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약 15분간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환담하였다. 9시 15분에 이토 히로부미는 하차하였다.
9시 30분경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일본인 환영단으로 향하던 이토에게 당당하게 다가가 ‘저자가 필시 이토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권총 세발을 발사하여 명중시켰다. 이후 곧장 그를 수행하던 사람들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안의사는 죄 없는 수행원들까지 부상을 입힌 것에는 비통한 일이라고 재판장에서 말하였다. 그러나 이토의 얼굴을 확실히 알지 못하여 혹시라도 잘못 쏘았다면 일이 낭패가 되기에 그 주변인들이 이토라 여겨서 총을 발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냉혈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그는 정의로운 선비였다.
러시아 헌병이 안중근을 덮치자 그는 쓰러지면서 권총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만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레”를 외친 다음, 하늘을 향해 “대한 만세”를 목이 터져라 세 번 외쳤다. 10시에 이토는 하얼빈 역에서 절명하였다. 그는 뜻을 이루었다.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완성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 하였는데, 하늘의 뜻도 안의사와 함께 하였던 것이다. 본시 이 글은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사마의의 군대를 화공(火攻)으로 물리치려 했으나 소나기가 내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탄식하며 했던 말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자기의 의거는 하늘의 뜻이었음을 밝히고 정당성을 부여하며 뤼순 옥중에서 먹을 갈아 이 글을 썼다.
러시아 당국은 안중근을 일제에 인도하기로 결정하였다. 11시 55분에 거사를 함께 했던 우덕순 조도선도 피체되었다. 11월 1일 뤼순으로 압송되고 11월 3일 오전 10시에 연루 혐의자 9명과 함께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중국 여순(뤼순)의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에서 안중근 의거에 대한 여섯 차례 공판이 열렸다. 2월 7일 1회 공판장에서 안중근은 “3년 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을 포살코자 했으며, 이 의거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2월 9일 오전 9시 50분 제 3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여기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재판장에 의하여 중지 당하였다.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 되었고, 3월 26일 순국하였다.
▣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2004년 안중근의사숭모회와 광복회의 요청을 받아 안중근 의사기념관이 새로 건립되었다. 항일 독립 정신과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얼을 새겨볼 수 있는 역사 교육현장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단지동맹을 한 12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12개의 큐브 모양으로 디자인되었다. 겉으로 보면 열둘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건물이다. 열둘은 하나를 위하고 하나는 열둘을 위한다. 그 하나는 대한독립이었다. 그리하여서 열두동지는 손가락을 끊고 피를 찍어 '大韓獨立(대한독립)'쓰고 맹세했다.
안중근의 유묵(遺墨)은 현재 실물이나 사진으로 50여점이 확인된다. 이중 국내 소재는 26점으로 모두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 개인의 작품으로 놓고 볼 때 국가보물로 가장 많이 지정되어 있고,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작품가격으로도 가장 높다.
안중근의 유묵은 모두 사형 선고일(1910. 2. 14)에서 순국(1910. 3. 26)까지 라는 점, 수신자가 모두 일본인이라는 점은 역사상 어떤 다른 사람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다. 특히 내용이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고발이나 감계와 같이 자기 체험이나 자각으로 걸러낸 것이라는 점에서 안중근의 유서이자 또 다른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옆의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의 위기를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 - 유묵새김돌 사진은 안중근 의사기념관 앞에 전시되어 있는 《논어》명구의 안중근 유묵글이다.
안중근 의사로부터 유묵을 건네받은 사람은 모두 일본인이다. 이들은 여순 옥중 취조 검찰관, 대련세관 세무관, 뤼순 감옥 간수, 경관, 전의(典醫), 경시, 경호책임 헌병, 경수계장, 뤼순초등학교 교사, 일본 교토 정심사 사형수 교화승 및 여타 일본인들이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그들의 최고 지도자를 사살한 사람을 글씨를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안의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시 이런 정황에 대해 그는 《안응칠 역사》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고 있을 그 때 법원과 감옥의 일반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글로써 필적(筆跡)을 기념하고자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으며 청구하였다. 나는 부득이 자신의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지도 못하고서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어떤 마음에서 무슨 까닭으로 이들에게 글을 써서 주었을까?
원수까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안중근 의사의 인품과 정신세계의 위대성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의 유묵 중에서 《논어》의 글을 모두 모아서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 등 그의 정신세계를 조망하며, 그로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라는 교훈을 얻고자 한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다. 그는 가히 군자 중의 군자이며 대인 중의 대인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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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거리]-“이 때(구한말 또는 일제강점기)의 나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 [토론하기]-“정의를 위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은 일인가?”
▣ 그의 정의로운 전쟁
1909년(31세) 3월 2일 안중근은 김기용, 강기순, 백남규 등 11인과 동의단지(同義斷指)동맹을 결성하였다. 3월 5일에는 총기를 휴대한 약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수청 방면으로부터 합십마 부근으로 이동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다 이튿날 일진회 회원 박모를 응징하였다. 그해 4월 10일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병탄안을 찬성하였으며 7월 10일에는 일본 정부 각의에서 의결되고 일본 국왕은 그날로 재가하였다.
그해 10월 9일 이토는 일본 국왕을 만나 3, 4주간 예정으로 만주를 여행한다는 계획을 알리고 18일 중국 다렌에 도착한다.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던 안중근은 이 소식을 듣고 우덕순을 만나 이치권의 집으로 함께 돌아와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합의한다. 10월 22일 안중근, 우덕순, 류동하는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때 이토는 아침 뤼순을 출발하였다.
드디어 역사적인 날. 10월 26일 아침 6시 30분경, 안중근은 새 양복과 모자를 쓰고 묶고 있던 집을 나선다. 7시경에 하얼빈에 도착하여 이토가 오기를 기다린다. 9시경 이토를 실은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약 15분간 열차 안에서 코코프체프와 환담하였다. 9시 15분에 이토 히로부미는 하차하였다.
9시 30분경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일본인 환영단으로 향하던 이토에게 당당하게 다가가 ‘저자가 필시 이토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권총 세발을 발사하여 명중시켰다. 이후 곧장 그를 수행하던 사람들에게도 부상을 입혔다. 안의사는 죄 없는 수행원들까지 부상을 입힌 것에는 비통한 일이라고 재판장에서 말하였다. 그러나 이토의 얼굴을 확실히 알지 못하여 혹시라도 잘못 쏘았다면 일이 낭패가 되기에 그 주변인들이 이토라 여겨서 총을 발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냉혈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그는 정의로운 선비였다.
러시아 헌병이 안중근을 덮치자 그는 쓰러지면서 권총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만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레”를 외친 다음, 하늘을 향해 “대한 만세”를 목이 터져라 세 번 외쳤다. 10시에 이토는 하얼빈 역에서 절명하였다. 그는 뜻을 이루었다. “일을 도모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완성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이라 하였는데, 하늘의 뜻도 안의사와 함께 하였던 것이다. 본시 이 글은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사마의의 군대를 화공(火攻)으로 물리치려 했으나 소나기가 내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탄식하며 했던 말이다. 그러나 안중근은 자기의 의거는 하늘의 뜻이었음을 밝히고 정당성을 부여하며 뤼순 옥중에서 먹을 갈아 이 글을 썼다.
러시아 당국은 안중근을 일제에 인도하기로 결정하였다. 11시 55분에 거사를 함께 했던 우덕순 조도선도 피체되었다. 11월 1일 뤼순으로 압송되고 11월 3일 오전 10시에 연루 혐의자 9명과 함께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중국 여순(뤼순)의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에서 안중근 의거에 대한 여섯 차례 공판이 열렸다. 2월 7일 1회 공판장에서 안중근은 “3년 전부터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등을 포살코자 했으며, 이 의거는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결행한 것이다”라고 진술하였다. 2월 9일 오전 9시 50분 제 3회 공판이 개정되었다. 여기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조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재판장에 의하여 중지 당하였다.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 되었고, 3월 26일 순국하였다.
▣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2004년 안중근의사숭모회와 광복회의 요청을 받아 안중근 의사기념관이 새로 건립되었다. 항일 독립 정신과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얼을 새겨볼 수 있는 역사 교육현장이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단지동맹을 한 12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12개의 큐브 모양으로 디자인되었다. 겉으로 보면 열둘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건물이다. 열둘은 하나를 위하고 하나는 열둘을 위한다. 그 하나는 대한독립이었다. 그리하여서 열두동지는 손가락을 끊고 피를 찍어 '大韓獨立(대한독립)'쓰고 맹세했다.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소에 갇힌 이후 옥중에서 쓴 유묵과 자서전 등 수십 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유묵은 약 200여 점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나 40여 점만이 발견되었다. 의사의 필체에서 대장부 기운을 느낀다. 군자와 선비의 인품이 신언서판(身言書判)에 달렸다고 하는데, 안 의사의 휘호를 보면 바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앙홀을 중심으로 3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및 체험전시실이 구비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안의사 초상화와 생애와 독립운동 등 관련 역사와 사진ㆍ건국공로 훈장과 서한ㆍ공판 당시 신문 보도 내용ㆍ유명 인사 휘호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학생들의 역사체험 공부를 위해 잘 구비되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사단법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 사무실이 있어 안중근 의사에 대한 각종 유물과 자료를 발굴 수집하고 매년 기념식과 학술 심포지엄, 애국순례, 서예 백일장 등의 행사를 개최한다. 기념관 밖에는 안의사의 동상과 유묵 글을 돌에 새겨 정원을 꾸미고 있다. 주변에는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 백범광장이 인접해 있고, 그 아래로 한양도성의 성곽이 복원되어 있다. 이 성곽길을 따라 내려오면 숭례문이 있다.
▣ 안중근 의사의 옥중 유묵
안중근의 유묵(遺墨)은 현재 실물이나 사진으로 50여점이 확인된다. 이중 국내 소재는 26점으로 모두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 개인의 작품으로 놓고 볼 때 국가보물로 가장 많이 지정되어 있고,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작품가격으로도 가장 높다.
안중근의 유묵은 모두 사형 선고일(1910. 2. 14)에서 순국(1910. 3. 26)까지 라는 점, 수신자가 모두 일본인이라는 점은 역사상 어떤 다른 사람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다. 특히 내용이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고발이나 감계와 같이 자기 체험이나 자각으로 걸러낸 것이라는 점에서 안중근의 유서이자 또 다른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옆의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의 위기를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 - 유묵새김돌 사진은 안중근 의사기념관 앞에 전시되어 있는 《논어》명구의 안중근 유묵글이다.
안중근 의사로부터 유묵을 건네받은 사람은 모두 일본인이다. 이들은 여순 옥중 취조 검찰관, 대련세관 세무관, 뤼순 감옥 간수, 경관, 전의(典醫), 경시, 경호책임 헌병, 경수계장, 뤼순초등학교 교사, 일본 교토 정심사 사형수 교화승 및 여타 일본인들이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그들의 최고 지도자를 사살한 사람을 글씨를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안의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시 이런 정황에 대해 그는 《안응칠 역사》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고 있을 그 때 법원과 감옥의 일반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글로써 필적(筆跡)을 기념하고자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으며 청구하였다. 나는 부득이 자신의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지도 못하고서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어떤 마음에서 무슨 까닭으로 이들에게 글을 써서 주었을까?
원수까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안중근 의사의 인품과 정신세계의 위대성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의 유묵 중에서 《논어》의 글을 모두 모아서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 등 그의 정신세계를 조망하며, 그로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라는 교훈을 얻고자 한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다. 그는 가히 군자 중의 군자이며 대인 중의 대인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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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거리]-“이 때(구한말 또는 일제강점기)의 나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 [토론하기]-“정의를 위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은 일인가?”
안중근 옥중유묵(견리사의) 임서
~ 이 족자를 교실에 걸어두고 설명한 다음 수업을 하니, 아이들이 더 감동적으로 받아주어서 감사했다.
~ 젊은 시절, 기회를 붙잡아 배워두길 참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며 '이건 참 잘했구나'는 생각이 드는 것이 많아지도록 살아야 겠다.
생각만들기> 견리사의 - 이로움과 의로움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며.... 대한제국의 역사를 걷는다.
https://munchon.tistory.com/630 [황보근영의 문촌수기]
길 위의 인문학 5강, 목멱산 자락길에서 만난 안중근(산본고, 인문고전 통통! 강좌)
https://munchon.tistory.com/1141 [황보근영의 문촌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