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산책 그림이야기

수연산방 상허 이태준 가옥

문촌수기 2019. 4. 9. 20:32

법정스님이 사촌동생에게 보내 편지글이다. 이 글만으로도 충분하다. 이태준을 찾아 읽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읽도록 하여라. 이태준씨의 작품은 모두 훌륭한 것들이다.(지금은 북쪽으로 가 계시는 분이다.) 이름 있는 작가의 것을 골라서 읽어야 할 것이다."(1957. 10. 7.)

수연산방은 상허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집필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달밤>, <돌다리>, <코스모스피는 정원>, <황진이>, <왕자 호동> 등 문학작품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의 수필<무서록>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집터의 내력 등이 쓰여 있다.

수연산방, 이태준 가족사진
수연산방, 수채화, 그냥그림

나의 그림속에는 현판이 넷 있다.
가운데의 수연산방(壽硯山房)은 문방사우를 가까이하는 '문인들이 즐겨찾는 산 속 집'이란 뜻이다. 벼루에 먹을 갈아 휘호하기를 즐기며, 벼루가 다 닳아 구멍이 날 때까지 장수하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추사의 예서체를 집자하여 현판하였다. '칠십년동안 글을 써며, 벼루 열개를 갈아 구멍내고, 천개의 붓을 다 닳게했다(마천십연 독진천호ㆍ磨穿十硯 禿盡千毫)'는 추사의 말이 연상된다.

왼쪽의 현판, 기영세가(耆英世家)은 '고매한 인품을 지닌 노인이 사는 집'이란 뜻이다.

오른쪽의 현판, 죽간서옥(竹澗書屋)은 '대숲을 비껴 졸졸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책 읽는 집'이란 뜻이다. 그런 집은 없어도 책 한권 들고 대숲사이로 흐르는 계곡을 찾아 발 담그고 글 읽고 오는 자적락도(自適樂道)를 상상해본다.

문향루(聞香樓) '향기를 듣는 다락방'이라는 것이다. 향기는 코로 맡는 것이지, 귀로 듣는 것이 아닐진대, 어떻게 향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필동의 '한국의 집'에도  문향루가 있다. 최근에 그 현판이 우금헌(友琴軒)으로 바꿨다. 매국노 이완용의 아호, 향당(香堂)에서 사육신 박팽년의 당호(취금헌)로 바꾼 것이다. 물론 수연산방의 문향루와는 상관없다.

이태준의 호, '상허(尙虛)'도 예사롭지 않다. 글자 그대로의 뜻은 '오히려 비워라' '비움의 가치를 높여라'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채우기를 바라는데, 오히려 행복하고 장수하려면 비워야한다는 것이다. 노자의 '허정(虛靜, 비움과 고요)' 장자의 '빈 배(虛舟)'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기영세가
수연산방
죽간서옥
문향루

이태준의 작품 경향은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작품이 많고, 세련된 문장으로 1930년대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특히 단편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 하여 “한국의 모파상”이라고도 불린다.
1930년대에는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이상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에게 부탁해서 이상의 시를 신문에 내도록 도와 주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시가 오감도이다.
박태원과 조용만 등 비롯하여 절친한 구인회 동료들이 친일 작품을 창작하던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1943년에 안협(현재의 북철원군)으로 낙향해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않아, 친일행적 논란에서 자유로운 몇 되지 않는 작가들 중 하나이다.
광복 후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던 이전까지의 경향과는 달리 조선문학가동맹과 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좌파 계열에서 활동했으며, 한국 전쟁 이전인 1946년경에 월북하였기에 이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의 행적이나 세상을 떠난 시기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왜 월북을 했을까?' 궁금하다. 지금의 잣대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대의 가치관과 이태준의 예술관으로 볼 때는 이해가 가기도 한다.

이태준이 소련 방문 기간(1946년 8월) 동안 고리키 문학을 동경하게 된다. 이후 출판된 그의『쏘련기행』(1947년)을 통해 이태준의 월북 동기를 분석해볼 수 있다. 이태준은 화폐로 모든 것이 교환 가능한 자본주의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가 예술가로 살 수 있고 더 나아가 예술가가 노동자로 살 수 있는 소련의 문화정책에 동의하며 이태준은 사회주의에 점차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태준은 소련 기행에서 고리키 문학의 사회적인 영향력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태준은 귀국 후 사회주의 리얼리즘 혹은 심미적 사회주의 글을 쓸 포부를 가졌다.

북한에서 이태준은 김일성을 영웅화하라는 노동당의 지시를 정면으로 비판, 거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알려진 그의 마지막 행적은 66살이던 1969년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 지구에서 사회보장으로 부부가 함께 살고 있는 모습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최후까지 그가 해방 이전부터 견지했던 문학론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예술가였다.

생가는 전쟁으로 소실되었고, 현재 생가는 철원읍 율이리 용담마을에 밭으로 이용 중이나 생가터임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서 있다.
지금의 철원은 휴전선 이남이지만 이태준 당대의 철원은 38선 이북 지역이다. 그러므로 그는 월북이 아니라, 낙향으로 이름짓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서울에서 거주하던 성북구의 자택은 서울시 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1999년 외종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지난 시월 말, 오전 11시 경에 지인들과 찾았을 때 일이다. 쌀쌀하고 출출하던 차에 따뜻한 대추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자 찾았는데, 11시 30분에 손님을 맞는다고 했다. 그럼 잠시 구경하고 차를 마시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안된다며 밖에 나가서 기다려라고 했다. 뭐, 그리 대단한 구경거리라고 여기며 돌아섰다.
"쯧쯧, 찾아오는 손님을 이렇게 쌀쌀맞게 박대해서야?"
유명세를 타면서 가격도 비싸고, 인심도 박해졌나보다. 가치란 자기가 올리는 게 아니라 세간의 이목과 풍문이 올리는 것이거늘,  이익 앞에서 겸손해지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좀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 조상을 욕 먹이는 일이다.

구인회와 문예지《문장》
상허 이태준이 좌장 역할을 한 구인회(九人會)는 글자 그대로 아홉 명의 문인이 1933년 결성한 단체이다. 당시 문단에선 프로문학이 큰 흐름이었지만 이태준, 정지용, 이효석,김기림 등 아홉 명의 중견 작가들은 현실에 초연한 순수 문학을 지향했다. 이후 김유정, 이상, 박태원 둥도 가입하는데 회원은 들고나도 수는 언제나 아홉이었다.
구인회'하면 문예지 <문장>을 떠올려야 한다. <문장>은 이들의 주도로 발간된 일제 말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였습니다. 한글과 문화 탄압이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좌우파를 막론한 당대 최고의 소설가와 시인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조지훈과 박목월, 박두진도 <문장>을 통해 등단한 문인들이다. 해방 후 이들이 성북동 조지훈의 집(방우산장)에모여 시집을 발간하기로 하는데 그것이 바로  <청록집>이다.이후부터 이들을 청록파 시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문장>은 고전, 한글, 민속학, 어문학 등 학술 연구 논문도꾸준히 소개하며 이념으로 싸우기보단 한국적 정신문화 유산을 지켜내고자 안간힘을 썼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문장(文章)'이라는 제자(題字)와 김용준, 김환기, 길진섭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이 참여해 그린 동양화적 표지만봐도 <문장>의 이러한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김환기의 문장지, 권두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