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커피그림이야기

아름다운 사람

문촌수기 2020. 9. 1. 00:09

대학생이 되었다. 70년대말 학번이다.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던 다방을 이제 가 볼 수 있게 되었다. 3월의 캠퍼스, 곳곳에서 서클 회원 모집이 한창이다. 어떤 이유로 가입했는지 기억에 없지만 나의 유일한 서클이 로타랙트였다.
서클 모임 장소가 시내 다방이었다. 처음 가는 다방이라 잔뜩 기대를 품고 갔는데, "이 뭐야?" 다방이름은 [동심초], 한복입은 다방 마담, 붉은 입술의 레지들, 중절모에 양복 차려입은 점잖은 어르신들. 뿌연 담배연기. 경로당은 아니지만 어르신 쉼터요 만남의 장소였다. 어르신 덕분에 우리도 점잖아지고 조숙해졌다. 다방 위에는 당구장, 실은 이곳이 우리들은 놀이터였다. 그러나 나만의 설레인 곳이 있었다. 다방 아래층의 의상실이었다. 좁은 계단을 오르기 전 일층의 의상실은 늘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 곳에는 첫 눈에 반한 여인이 늘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겼다. 너무 예뻤다. '아! 나의 이상형, 러시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나타샤가 저 여인일까?' 내 혼자 마음으로 '나타샤'라 부르면서 사모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마네킹이었다.
나는 의상실 진열장 앞에 잠시 머물며 넋을 잃은 듯 바라보고 했다. 미소도 지어 보내곤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미친 놈'이라고 놀림 받기보다 뺏길 것이 두려웠다.

그 의상실의 이름도 공교롭게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훗날 비밀처럼 감춰둔 이 짝사랑을 친구한테 이야기 했더니, "니, 미친갱이 인가? 마네킹을 다 사랑하게?" 소문이 퍼져 서클 안에서 한 때 광대가 되었다.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를 사랑한 것처럼 나도 나의 나타샤에게 매일 키스라도 해볼걸...
난 그 이후로 나의 나타샤보다 예쁜 마네킹을 본 적 없다. 청춘은 이렇게 미친 적이 있어 아름답다. 젊음은 미치는 것이다.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 노래가 참 좋다. 잔잔히 내리는 비에 천천히 젖어 드는 것 같아 철없고 잘 울고 가난한 내 정서에 딱 어울리는 노래였다. 김민기를 따라 <아름다운 사람>을 하모니카로 불러본다. 길 떠나지 못한 아이의 눈물에 나도 눈물 고인다.

 

아름다운 사람.m4a
3.67MB

 
<가사>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 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 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 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 이는 사람이어라

새 하얀 눈 내려 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 이는 사람이어라
그 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사십년이 더 지난 지금, 이 노래를 부르다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처마 밑에서 한 아이는 왜 울고 있을까?" 머리 속에서 그림이 그려진다.
1절에 빗 속에 우는 아이, 2절에 세찬 바람을 향해 벌판을 달려가는 아이, 3절에 눈 오는 산 위에 우뚝 선 아이. 세 아이에게서 연결점을 찾았다. 바로 '길 떠남'이다. 새끼 새가 둥지를 떠나는 것 처럼, 언젠가는 부모님과 집을 떠나야 한다.
뜻을 찾아 세상으로 길을 떠나는 아이, 마침내 길 끝에서 뜻을 이룬 아이. 모두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그러면 처마 밑에서 우는 아이는? 길을 떠나야하는데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할 만큼 사연이 깊다. 가난하고 병든 가족이 계셨을 것이다. 두 눈에 고인 슬픈 빗물은 한발짝 걸음도 내딛지 못 할 만큼 무겁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일까? 엄마 생각이 났다. 세 아이들은 '길 떠남'에 서 있다면, '엄마'는 '돌아옴'에 있다. 뜻이 집에 있고 살림에 있기 때문이다. 식구들 살리기 위해 밭일 나가시고, 장에 나가시고, 그러고는 찬거리 먹거리 가득이 이고 집으로 돌아오신다. 사람살리는 살림살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어머니와 우는 아이를 이중섭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슬쩍 따왔다.

&lt;아릉다운 사람&gt;, 커피여과지에 수채물감

 

&lt;아름다운 사람&gt;, 커피여과지에 수채물감, 파스텔
이중섭, &lt;돌아오지 않는 강&g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