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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

문촌수기 2025. 1. 13. 14:05

남한산성행궁
국가사적 제480호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행궁이라 한다.
남한산성행궁은 전쟁이나 내란 등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조선 인조 4년(1626)에 건립되었다.
실제로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다.

한남루
한남루는 정조 22년(1798)에 광주 유수 홍억이 행궁 입구에 세운 2층 누문으로, 기존의 외삼문과 중문만이 남아 있던 것에 추가하여 '삼문삼조(三門三朝)'의 법도를 완성하였다.

한남루

외행전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건물로 규모는 내행전과 동일한 전체 28칸 건물이지만 바닥 면적이 약간 작다. 평상시에는 유수의 처소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발굴 과정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확인되어 건물지와 와적지를 일부 현장 보존하 고 있다.

외행전과 삼문

내행전
내행전은 임금의 침전으로 규모는 정면 7 칸에 측면 4칸으로 전체 28칸 건물이다. 담으로 둘러쌓아 부속시설을 담 밖으로 설치한 폐쇄적인 구조가 특징이다.

내행전
내행전 일월오악도 병풍
내행전(뒤)과 재덕당

관아권역
관아권역은 순조대에 행궁 좌측으로 확장된 곳으로 광주유수가 집무를 수행하는 공간이다.

좌승당
좌승당은 순조 17년(1817) 광 주유수 심상규가 정면 6칸, 측면 2.5칸의 규모로 건립하였다. '앉아서도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는 의미로 전략적 승리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좌승당은 광주유수의 직무공간이었다.

좌승당

일장각
일장각은 좌승당을 세우고 12년 뒤인 순조 29년(1829) 유수 이지연이 정면 4칸, 전후퇴칸을 측면 3칸의 규모로 건립하였다. 광주유수의 개인공간이었다.

외행전과 일장각

후원

후원의 이위정 以威亭
이위정은 현재 좌승당 뒤면 후원에 2010년 중건되었다. 순조 17년 1817년 광주부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건축 당시에 지은 '이위성기'가 탁본과 함께 '중정남한지'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 기문(記文)은 심상규가 짓고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썼다. '이위(以威)'란 '활로써 전하를 위압할 만하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仁威)와 충용(忠勇)으로써도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후원의 이위정과 정전, 영녕전

좌전권역
좌전권역은 유사시 종묘에 모셔져 있는 역대 왕의 신주를 옮겨 보관하도록 한 공간이다. 좌전은 행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으나 숙종 37년 (1711)에 세운 것이다.

정전
정전은 역대 조선 왕조 임금의 신위를 모시는 건물로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라 부르기도 한다. 정전은 당시 재위하던 왕 4대조와 조선시대 역대 왕의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 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곳이다.

영녕전
영녕전은 태조의 4대조와 정 전에서 계속 모실 수 없는 왕 왕비의 신주를 옮겨 모신과 곳으로, 영녕전의 제례는 정전 보다 한 단계 낮게 행해졌다.

침괘정, 행궁 밖에 있다.

침괘정 枕戈亭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침패정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회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륭무고'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27년2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침과장'을 '침괘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기 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