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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글이 아니옵고 길이 옵니다."

문촌수기 2025. 1. 22. 19:13

2025년 1월 미국 우선주의와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선언한 트럼프의 복귀. 일대일로와 위대한 중국몽을 구현하려는 시진핑의 아젠다.
미ㆍ중 패권 전쟁 중에서 우리는 어느 길을 걸어 가야 하는가?
남한산성의 눈길을 걸으면서 탄핵 정국에 빠져 혼미한 대한민국의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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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明에서 淸'으로 가는 길목에,
김훈의 <남한산성> 314~315쪽, 글을 다시 읽는다.

영화, 남한산성의 인조(박해일 분)

시선을 서안 너머 마룻바닥에 고정시킨 채 임금은 고요했다. 신료들의 목소리가 합쳐져서 누구의 말인지 임금은 분간할 수 없었다.
김상헌이 앞으로 나왔다.
"전하, 뜻을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길 터인데, 이 문서가 과연 살자는 문서이옵니까?"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헌이 다시 임금을 다그쳤다.
"전하, 이제 칸을 황극으로 칭하였으니 문서가 적에게가면 전하는 칸의 신이 되고, 신들은 칸의 말잡이가 되며, 백성들은 칸의 종이 되는 것이옵니까?"

영화, 남한산성의 김상헌(김윤식 분)

임금은 대답하지 않았다. 김상헌이 다시 말했다.
"적이 비록 성을 에워쌌다 하나 아직도 고을마다 백성들이 살아 있고 또 의지할 만한 성벽이 있으며, 전하의 군병들이 죽기로 성첩을 지키고 있으니 어찌 회복할 길이 없겠습니까? 전하, 명길을 멀리 내치시고 근본에 기대어 살 길을 열어 나가소서"

최명길이 말했다.
"상헌은 제 자신에게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적들이 성벽을 넘어 들어오면 세상은 기약할 수 없을 것이온데, 상헌이 말하는 근본은 태평한 세월의 것이옵니다. 세상이 모두 불타고 무너진 풀밭에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날 터 인데, 그 꽃은 반드시 상헌의 넋일 것이옵니다. 상헌은 과연 백이(伯夷)이오나, 신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초라한 세상에서 만고의 역적이 되고자 하옵니다. 전하의 성단으로,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주소서."


김상헌이 두 손으로 머리를 싸쥐고 소리쳤다.
"전하, 명길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최명길이 김상헌의 말을 막았다.

영화, 남한산성의 최명길(이병헌 분)

"그러하옵니다. 전하, 신의 문서는 글이 아니옵고 길이 옵니다. 전하께서 밟고 걸어가야 할 길바닥이옵니다."

김류가 말했다.
"명길이 제 문서를 길이라 하는데 성 밖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찌 글과 같을 수야 있겠나이까. 하지만 글을 밟고서 나아갈 수 있다면 글 또한 길이 아니겠나이까?"

임금이 겨우 말했다.
"영상의 말이 어렵구나. 쉬고 싶다. 다들 물러가라."

밤중에 임금이 승지를 불러서 문서에 국새를 찍었다.
ㅡ 김훈의 <남한산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