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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어떻게 분단됐나?
美 등 서방과 소련 간의 냉전 격화돼 동서독 분단 -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  2014-02-06 11:24
      '염돈재의 독일통일 이야기'는 1990년부터 3년 동안 독일 통일을 직접 목도(目睹)한 염 원장의 소중한 경험과 이를 통해 얻은 교훈 등으로 채워집니다. 2011년 염 원장이 집필한 '올바른 통일준비를 위한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단행본 내용을 바탕으로 게재합니다. 총 50여 차례 연재될 예정이며, 남북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독일은 2차 대전 후 연합국들이 다시는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3, 4개 국가로 분할하기 위해 분할 점령한 것이 냉전으로 굳어져 분단되었다.

연합국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독일을 분할하기로 하고 나치독일이 항복한 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점령했다. 그러나 7월 개최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분할 계획이 취소되고 연합국이 단일 행정기관을 통해 통치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방 3개국과 소련 간의 입장차이가 커 단일 통치권 행사가 어렵게 되었으며, 각국은 자국 점령지역 내에서 독자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서방과 소련 간에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1949년 서방 3개국과 소련이 각각 자기 점령지역에서 독립국가를 창설함으로써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다.

 

독일분할 논의의 개시

2차 대전 종전 후 연합국들이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는 어떻게 하면 독일이 더 이상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느냐 하는 문제였고, 가장 효과적인 방안으로 거론된 것이 독일을 몇 개 나라로 분할하는 방법이었다. 전쟁이 끝나기 훨씬 전인 1941년 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소련 스탈린 서기장이 독일의 분할원칙에 공감했으나 인위적인 분단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처리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43년 10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와 1943년 11월 테헤란 정상회의에서 시작되었다. 1943년 10월 모스크바 외상회의에서는 ①3개국의 공동점령 및 관리 ②독일의 전쟁능력과 나치즘의 파괴 ③경제적 통합 유지 ④민주정권의 수립 등 4가지 원칙에 합의한 후 세부 문제는 유럽자문위원단(European Advisory Commission)을 설치, 협의하기로 했다.

한 달 후 개최된 테헤란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5+2 분할을, 영국은 2개국으로의 분할을 주장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여 세부사항을 유럽자문위원단에서 결정토록 했다. 1944년 7월부터 11월까지 개최된 유럽자문위원단 회의에서는 3+1 분할 점령안, 즉 독일을 3개 지역으로 나누어 미국, 영국, 소련이 하나씩 맡아 통치하고 베를린 지역은 3개국이 공동 통치하는 방식으로 분할 점령하기로 했다.

독일처리안의 확정

2차 대전 종전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미국, 영국, 소련 지도자들은 얄타회담에서 1944년 유럽자문위원단의 결의사항인 3+1 분할원칙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독일의 무장해제, 탈군사화, 분할업무의 공동담당 등 세 가지 원칙을 확정하는 한편, 3개국 외무장관으로 구성된 '독일분할위원회'를 설치키로 합의했다.

1945년 3월 개최된 독일분할위원회에서는 ①독일이 다시는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산업파괴, 비군사화 및 분할에 합의하고 ②항복문서에 '독일분할'이라는 용어를 삽입하며 ③프랑스를 항복문서 서명 당사국으로 인정하여 독일점령에 참가하도록 결정했다. 1945년 5월 8일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후 독일점령 방안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6월 5일 연합국 군 대표들은 독일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점령하되 전체 독일에 관한 문제는 4대국 사령관으로 구성된 '독일관리이사회'를 설치, 만장일치 방식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그 후 7월 17일부터 8월 2일 간 개최된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 수뇌들은 네 가지 중요한 결정을 한 반면, 독일분할 의도는 후퇴되었다. 즉 연합국 수뇌들은 ①독일에 대해 4D 원칙, 즉 탈나치화(denazification), 무장해제(demilitarization), 카르텔 해체(decartelization), 민주화(democratization)를 적용하고, ②연합국의 통치권은 단일화된 행정기구를 통해 행사하며 ③전체 독일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취급하고 ④전후배상과 전쟁잠재력의 제거를 위해 4대국이 공동정책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다.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분할 의도가 후퇴된 것은, 미국과 독일의 분할이 소련의 세력팽창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했고, 소련은 장차 독일을 자기 세력권으로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독일분할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국 공동관리 체제의 붕괴와 베를린 봉쇄

 

 

포츠담 합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소련은 강력한 독일의 재등장을 우려하여 독일을 하나의 정치·경제적 단위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독일에는 통일된 중앙행정기관이 수립되지 못하고 4대국 군대의 점령지역이 사실상의 행정구역이 되어 각각 상이한 정책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독일의 중앙정부가 형성되지 못해 2차 대전을 종결짓는 강화조약의 체결도 불가능해졌다.

그 후 서유럽에 대한 소련의 팽창의도가 점점 더 노골화됨에 따라 미국은 1947년 12월 독일을 마셜플랜 대상에 포함시키는 한편, 서방 3개국 점령지역에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48년 2월 런던에서 개최된 미·영·불 3개국과 베네룩스 3개국 등 6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는 서방 3개국 점령지역에 자치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대응하여 1948년 3월 소련의 주둔군 사령관 소콜로프스키 원수가 '독일관리이사회' 탈퇴를 선언, 독일에 대한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공동관리 체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어서 소련은 1948년 6월 24일부터 다음 해 5월 12일까지 11개월 동안 '베를린 봉쇄'를 단행하여 서방 3개국 관리지역(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육로와 수로를 봉쇄하고 전기, 생필품 등 모든 공급을 중단했다. 미국은 '공중가교'(Air Bridge)를 설치하여 소련의 팽창의도에 단호하게 대응했다. 미국과 영국 군용기들은 하루 최고 4000여 회, 총 27만 8000여 회의 항공수송 작전을 통해 매일 6400여 톤의 물품을 서베를린에 공급했다. 미국의 확고한 서베를린 수호의지를 확인한 소련은 1949년 5월 12일 베를린 봉쇄를 해체했으나, 이를 계기로 서방 3개국과 소련이 합의하여 독일 단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소련의 팽창의도를 간파한 서방측이 1949년 8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 동·서 간의 냉전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동·서독 정부의 수립과 독일의 분단

소련과의 합의로 독일 단일정부를 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1948년 7월 서방 3개국 군정 당국자들은 서방 점령지역 내에 독일 자치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서독지역 11개 주 정부에 연방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의회'에 대표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독일 주지사들은 국민의회 구성이 독일의 분할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호응하지 않았으며, 특히 '헌법'이나 '제헌의회'와 같은 용어 사용에 극력 반대했다.

미국 점령군 사령관 클레이 대장은 용어문제를 양보하여 '헌법' 대신 '기본법'(Basic Law), '제헌의회' 대신 '의원(議院, Parliamentary Counci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약속했다. 이에 11개 주 의회가 인구와 그전 선거 시 세력분포에 따라 65명의 대표를 선발함으로써 의원이 구성되었다. 의원은 1948년 9월 1일 본(Bonn)에서 기본법 초안 심의에 착수, 다음 해인 1949년 5월 8일 기본법을 제정했으며, 5월 24일부터 기본법의 효력이 발생되었다.

이어 1949년 8월 14일 연방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되어 새로운 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의회에서 데오도어 호이쓰를 초대 대통령으로, 콘라드 아데나워를 초대 총리로 선출함으로써 1949년 9월 7일 독일연방공화국(Federal Republic of Germany)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9월 15일 서방 점령군 당국은 서독 기본법을 제약하는 '점령조례'를 선포하여 서독의 주권을 일부 제약하는 조치를 취했다. 독일 내에서의 군대의 유지, 외교정책, 전후 배상, 군축 등 점령국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항에 대한 결정권과, 서독 정부가 통과시킨 법률 거부권을 자기들이 보유함으로써 서독 정부는 일부 주권이 제약된 가운데 출범하게 되었다.

독일 전체를 공산화할 희망이 없어지자 소련도 자국 점령지역 내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는데 목표를 두게 되었다. 소련의 계획에 따라 동독 공산주의자들은 1947년 말 '인민회의'(People's Council)를 개최하고 1948년 8월 3일 헌법초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동독 인민회의는 5월 30일 헌법을 표결한 후 서독의 건국을 기다렸다가 1개월 후 10월 7일에 '독일민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Germany)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이렇게 하여 독일은 두 나라로 분단되었다.

동독 건국 직후 소련군 점령청이 해체됨으로써 동독은 형식상으로는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새로 설치된 소련감독위원단(Soviet Control Commission)의 통제를 받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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