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노래하다

안중근과 윤동주 2017.07.26 22:45 Posted by 文 寸 문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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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안중근과 윤동주 2017.01.30 21:37 Posted by 文 寸 문촌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오늘 특별히 뮤지컬 "영웅"을 감상하러 나서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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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세상에 아름다운 詩 남긴 천재… 난 매일 동주를 만납니다"

도쿄=최인준 특파원 | 2017/01/18 03:04

한국 문학계는 윤동주 연구에서 이 일본 노(老)학자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잊히다시피 했던 윤동주의 무덤을 1980년대 중국 시골 야산에서 찾아내고, 윤동주 육필 원고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그의 노력 덕에 국내 윤동주 연구도 풍성해질 수 있었다.

영하로 내려간 16일 오후 지바현 이치카와(市川)시의 한 작은 전철역에서 '윤동주 연구가'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83) 와세다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한국말로 "안녕하십니까, 오무라입니다" 인사한 그는 잰걸음으로 자신의 집을 안내했다. 한국 문학 연구서들이 수백 권 보관된 자신의 서재를 먼저 보여줬다. "매일 여기서 나는 동주를 만납니다."

16일 자택 서재에서 만난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윤동주 책을 들고 있다. 노 교수는“내 연구를 통해 정갈하면서 엄선된 시어로 시대에 맞섰던 윤동주의 정신을 지금 시대에 물려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도쿄=최인준 특파원

오무라 교수는 일본 학자 중에서 독보적인 윤동주 연구가로 꼽힌다. 윤동주 관련 논문과 책을 10편 이상 발표했고, 지난해에는 '윤동주와 한국근대문학'(초판·2001) 개정판을 펴냈다.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후쿠오카 형무소 부지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를 세우기 위해 동료 학자들을 모아 백방으로 뛰기도 했다. 책 개정판 출판을 위해 방한한 작년엔 서울 대한극장에서 영화 '동주'를 관람했다.

오무라 교수는 1957년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원에서 중국 문학을 전공했는데, 지적 호기심이 넘쳤던 청년 오무라는 청나라 말기 중국의 정치소설을 조사하던 중 우연히 조선 문학에 빠져들었다. 이후 그는 전공을 바꿔 조선 후기와 한국 근대문학을 파고들었고, 윤동주의 시와 조우하게 된다.

일본인 학자에게 윤동주 연구의 길은 쉽지 않았다. 1985년 5월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서 윤동주의 묘를 발견할 당시 한국에선 "일본이 윤동주를 두 번 죽였다"는 날 선 비난이 날아왔다. 오무라 교수는 "윤동주가 일본에서 돌아가셨고, 그 묘를 일본인이 찾아냈으니 아이러니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5년 중국 룽징에서 윤동주 묘지를 찾은 뒤 절하고 있는 오무라 교수. /오무라 마스오 교수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였던 야산의 공동묘지. 산짐승이 파헤친 듯 어지러웠고 '詩人 尹東柱'라고 새겨진 묘비만이 윤동주의 무덤임을 증명했다. "'여기구나!' 싶은 생각에 감격에 겨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1986년 경기도 과천에 있는 윤동주 유족을 찾아가 긴 설득 끝에 육필 원고를 손에 넣었다. 당시 그가 받아든 육필 원고 중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 남긴 습작 노트도 있었다. 1999년 이 원고들을 모아 한국 교수들과 공동으로 출판한 '윤동주 자필시고집'은 윤동주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시뿐 아니라 윤동주 생가 터와 그가 다녔던 광명중학의 학적부, 송명규 생가 등을 직접 확인한 결과를 담아 발표한 논문 '윤동주의 사적(事跡)에 대하여'도 주목을 받았다.

반평생 윤동주 연구에 헌신한 오무라 교수는 '시인 윤동주'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윤동주는 천재이면서 마음이 따뜻한 시인, 고뇌하는 시인입니다." 그는 "나 스스로 '부끄러움 덩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서시의 구절을 읽으면 아직도 마음이 깨끗이 씻겨지는 기분"이라며 "일본어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정갈한 시어들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오무라 교수의 서재에선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고령 탓에 연구는 멈췄지만 노교수는 매일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을 만나게 된다면 꼭 물어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험한 세상에서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었는지…. 윤동주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예쁜 동시를 많이 썼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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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오카서 23년째…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
ㅡ정상혁 기자 | 2017/01/18 03:04
외국에서도 윤동주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 후쿠오카에서는 20년 넘게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이 진행 중이다. 윤동주가 수감된 후쿠오카 형무소 부근에서 태어난 니시오카 겐지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가 1994년 창립한 이 단체는 매달 한 번꼴로 모여 윤동주 시를 읽고 토론하며 매년 2월 윤동주 기일에 맞춰 추모 행사도 열고 있다. 윤동주가 1942년 입학해 수학한 릿쿄대가 있는 도쿄에서도 10년째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 모임'이 이어지고 있다. 20여 회원은 2008년부터 매년 2월 추모 낭독회를 열고 있다. 올해 행사는 2월 19일 열린다. 릿쿄대 한국사무소장 유시경(54) 대한성공회 교무원장은 "한·일 관계가 안 좋은 요즘 윤동주를 통해 역사를 바로 보자는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라며 "릿쿄대에 윤동주 명예졸업장 수여도 제안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추모는 미국서도 이어진다. 2007년부터 윤동주 시에 곡을 붙여 미국 전역을 돌며 공연하고 있는 5인조 한인 밴드 '눈 오는 지도'가 대표적인 예. 1990년 워싱턴문학회 초대 회장을 맡은 최연홍 시인은 2000년쯤 미국 워싱턴에서 윤동주문학회를 만들고, 윤동주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등 윤동주 알리기에 앞장서 온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문학잡지 시산맥 등이 주관한 '윤동주 서시문학상' 해외 작가 특별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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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 않는 그 이름 '동주'… 靑春들의 별이 되다

조선일보/정상혁 기자/2017/01/17

이 이름은 늙지 않는 이름이다. 아직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이다. 윤동주(1917~1945·사진) 시인 탄생 100주년. 스물여덟 나이로 순국해 청년 정신의 상징이 된 윤동주가 2030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얻으며 되살아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각종 장르를 넘나드는 영감으로 작용하며 강력한 문화 콘텐츠와 아이콘이 된 윤동주를 3회에 걸쳐 조명한다.

◇2030세대가 호명하는 동주

가온차트·소리바다 등 음원 사이트 1월 첫째 주 차트 1위는 윤동주였다. 래퍼 개코(36)가 윤동주의 삶을 랩으로 만들어 발표한 '당신의 밤'. "때론 사는 게 허무하고 무기력할 때 당신의 육첩방을 밝혔던 등불을 기억할게. … 오늘 밤은 어둡기에 당신이 쓴 시가 별이 돼, 광장 위를 비추는 빛이 돼."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는 "체념을 일삼던 청년이 성찰을 통해 각성하는 가사 내용이 젊은 층에게 공명을 일으킨 것 같다"면서 "최근 불안한 정국과 맞물리면서 좌절을 경험한 2030세대가 노래를 소비하며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반응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MBC ‘무한도전’이 기획한 역사 특집에서 윤동주를 랩으로 형상화한 ‘당신의 밤’을 부르고 있는 래퍼 개코(왼쪽)와 아이돌 멤버 황광희. /MBC

열풍의 시발은 시였다. 지난해 2월 출간된 초판 복각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인터넷 서점 인터파크도서 '2016 올해의 책' 2위를 차지했고, 알라딘 집계에서도 소설 '채식주의자'에 이어 전체 도서 판매량 2위에 올랐다. 예스24에 따르면 이 시집 구매자의 55%가 2030세대였다. 이들이 윤동주 열풍을 점화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청년으로 죽은 윤동주는 정점으로 치달아가는 과정에서 종료된 일종의 사건"이라며 "청년들이 지닌 미완의 가능성이라는 측면도 동일시 효과를 일으키는 요소"라고 말했다.

◇다양한 장르로의 확산

윤동주의 청년 이미지는 발랄하고 새로운 감각의 변주를 쉽게 한다. 소설 분야에선 미스터리 요소를 섞은 '동주'(구효서·2011) '별을 스치는 바람'(이정명·2012) 등이 출간돼 화제를 모은 바 있고, 윤동주에서 모티프를 얻은 웹툰 '소동헌을 위한 기록'은 2014년까지 연재되다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스크린으로 옮긴 저예산 흑백 영화 '동주'는 지난해 117만 관객을 동원했고, 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는 작년에 이어 올 3월에도 막을 올린다.

3월에 개막하는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의 한 장면. 투옥된 윤동주가 심적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서울예술단

인간 윤동주 전기(傳記)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도 새로운 창작의 씨앗이 되고 있다. 지난해 10월엔 윤동주의 시 '소년'에 나오는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등의 문장에서 영감을 얻어 파랑의 심상을 옮긴 그림책 '소년'이 나왔다. 일러스트레이터 이성표(59)씨는 "윤동주의 파랑을 그리움의 감정으로 그려냈다"며 "윤동주의 마음속에 있는 소년을 통해 독자의 내면을 위로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림책으로는 이례적으로 2주 만에 초판 2000부가 나갔고, 2쇄를 3000부 찍었다. 지난 12일엔 윤동주 시 패러디 54편을 엮은 시집 '다시, 별 헤는 밤'이 출간되기도 했다.

◇"소비로 끝나선 안 돼… 실천적 성찰로 이어져야"

윤동주 시인의 시 ‘소년’에서 영감을 얻어 파랑의 이미지로 그려낸 그림책 ‘소년’의 한 장면. /보림출판사

'윤동주 콘텐츠'가 다양해지면서 대중과 접점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 2014년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 소설가는 "영화 '동주'를 본 뒤 윤동주 관련 서적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는 편지를 여러 통 받았다"면서 "콘텐츠의 수준과 상관없이 윤동주라는 관문에 들어서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선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각에선 "윤동주를 팬시 상품처럼 가볍게 소비하고 끝내선 안 된다"는 우려도 나온다. 윤동주 전문가인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는 "윤동주는 자기 성찰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시는 성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진다"며 "소비에서 한발 더 나아가 불의에 맞서며 괴로워했던 그의 정신이 실천적 삶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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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요약 및 결론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실력과 경력을 쌓아가며 자기 연마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것뿐이 아니다. 실력과 경력이 있다하더라도 결코 인간관계에서 사람다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공자의 사상은 오랫동안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람다움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공자 사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논어에서는 사람됨의 길사람다움의 도리를 제시하고 있다. 논어論語는 논인(論仁)이며 또한 논인(論人)이었다. ()은 모든 덕행의 근본이요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인()이라고 하는 덕목을 통하여 사람됨이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삶과 사람과 사랑은 하나이다. 그렇듯이 인()함은 사람다움[仁者人也]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仁者愛人]이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되어야 할 언행일치(言行一致)를 말하고 있으며, 일과 사람 관계에 대한 성실과 충실을 가르치고 있다. 결국 자기를 이겨 사람다움을 유지하고 마땅히 사람을 사랑해야 하며 인간의 도리인 예를 실천하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곧 인()의 요체이며 사람됨의 길이다.

논어는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다운 사람을 가르치고 있다. 공자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군자(君子)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논어는 군자학이다. 군자는 소인과 대비되는 사람이다. 군자는 의로움에 깨닫고, 소인은 이로움에 깨닫는다.(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은 풀이라(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쓰러진다.” 또한 군자는 지천명하고 자신과 천명 앞에 당당한 인격완성자이다. 또한 도덕을 숭상하여 인의예지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나아가 배우기를 좋아하는 호학자이며 지혜로운 자이다. 언행일치하기 위해서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먼저 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나아가서는 백성을 사랑하여 바르게 다스리는 경세가이다.

 

이 시대에 과연 군자다운 사람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특별히 안중근 의사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그가 민족과 조국 그리고 나아가 동양 평화를 위해 의로운 일을 거행하고 숭고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삶 전체가 공자가 말한 군자다움이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의연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은 말 그대로 견위수명하며 살신성인한 군자요 대장부 그 자체이다. 그는 옥중에서 많은 유묵(遺墨)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논어의 명구를 필묵으로 많이 전했다. 글은 그 사람의 인격이다. 공자가 가르친 인()과 군자(君子)의 정신을 안중근 의사는 삶으로 실천하였으며, 그는 유묵을 통하여 자신의 삶과 의거가 정의로웠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유묵은 안중근 자신의 자서전과 다름없다.

우리는 결코 사람됨의 도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사람다움이며 사랑이다. 이익 앞에서 의로움을 먼저 생각하고 사리사욕에 현혹되며 이기심을 극복하여 사람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 하늘을 공경하며 애국애족하며 나아가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

 

< 參 考 文 獻 >

성백효. 2005. 현토완역 논어집주. 서울:전통문화연구회

신정근. 2005. 사람다움의 발견. 서울:이학사

예술의 전당. 2009. 의거순국 100년 안중근, 독립을 넘어 평화로. 서울:예술의 전당

안중근. 2011. 안중근 의사의 삶과 나라사랑 이야기 : 옥중자서전. 서울:안중근의사 숭모회

강세순. 2006. “공자 중용사상의 인간학적 연구서울: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국방송공사, 성균관. 1995. “서울에 공자”-공자유물 2500년 특별기획전 도록. 서울:KBS, 성균관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8&nNewsNumb=002271100025

: 주간조선 - 조정육의 [그림으로 읽는 공자] (검색일:2015915)

 

[공자와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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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논어유묵.pdf

3절 안중근 의사의 논어유묵에서 얻은 삶의 교훈

안중근의 유묵(遺墨)은 현재 실물이나 사진으로 50여점이 확인된다. 이중 국내 소재는 26점으로 모두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 개인의 작품으로 놓고 볼 때 국가보물로 가장 많이 지정되어 있고,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작품가격으로도 가장 높다.

안중근의 유묵은 모두 사형 선고일(1910. 2. 14)에서 순국(1910. 3. 26)까지 라는 점, 수신자가 모두 일본인이라는 점은 역사상 어떤 다른 사람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다. 특히 내용이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고발이나 감계와 같이 자기 체험이나 자각으로 걸러낸 것이라는 점에서 안중근의 유서이자 또 다른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옆의 견리사의 견위수명’ -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의 위기를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 - 유묵새김돌 사진은 안중근 의사기념관 앞에 전시되어 있는 논어명구의 안중근 유묵글이다.

안중근 의사로부터 유묵을 건네받은 사람은 모두 일본인이다. 이들은 여순 옥중 취조 검찰관, 대련세관 세무관, 뤼순 감옥 간수, 경관, 전의(典醫), 경시, 경호책임 헌병, 경수계장, 뤼순초등학교 교사, 일본 교토 정심사 사형수 교화승 및 여타 일본인들이다.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인 입장에서는 그들의 최고 지도자를 사살한 사람을 글씨를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안의사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시 이런 정황에 대해 그는 안응칠 역사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고 있을 그 때 법원과 감옥의 일반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글로써 필적(筆跡)을 기념하고자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으며 청구하였다. 나는 부득이 자신의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지도 못하고서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

 

그렇다면 안중근은 어떤 마음에서 무슨 까닭으로 이들에게 글을 써서 주었을까?

원수까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안중근 의사의 인품과 정신세계의 위대성을 읽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의 유묵 중에서 논어의 글을 모두 모아서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 등 그의 정신세계를 조망하며, 그로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가라는 교훈을 얻고자 한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다. 그는 가히 군자 중의 군자이며 대인 중의 대인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논어> 명구 유묵은 위의 pdf파일을 열거나 다운 받아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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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1970년 당시 대통령의 지시와 국민의 성금 등으로 서울 남산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건립 하게 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기념관이 노후 협소해짐에 따라 2004년 안중근의사숭모회와 광복회의 요청을 받은 대통령의 지시로 새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항일 독립 정신과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얼을 새겨볼 수 있는 역사 교육현장이다. 안의사는 19093월 항일투사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왼손 무명지의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며,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래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단지동맹을 한 12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12개의 큐브 모양으로 디자인되었다. 건축물에도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면 영혼을 지니게 된다. 500년 도읍의 한양 성곽길 탐방에 목멱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과 인왕산의 윤동주문학관 만큼은 꼭 들러 보야 할 만큼 매우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작년 고양의 OO중학교 근무할 적에 사제부 행복동행 - 남산과 인왕산 인문학 산책을 주관 진행했을 적에 이곳에 들렀다. 그때의 모습은 블로그에 정리해두었다.

 http://munchon.tistory.com/558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소에 갇힌 이후 옥중에서 쓴 유묵과 자서전 등 수십 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유묵은 약 200여 점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나 40여 점만이 발견되었다. 중앙홀을 중심으로 3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및 체험전시실이 구비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안의사 초상화와 생애와 독립운동 등 관련 역사와 사진건국공로 훈장과 서한공판 당시 신문 보도 내용유명 인사 휘호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학생들의 역사체험 공부를 위해 잘 구비되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사단법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 사무실이 있어 안중근 의사에 대한 각종 유물과 자료를 발굴 수집하고 매년 기념식과 학술 심포지엄, 애국순례, 서예 백일장 등의 행사를 개최한다. 기념관 밖에는 안의사의 동상과 유묵 글을 돌에 새겨 정원을 꾸미고 있다. 주변에는 서울시 교육연구정보원, 백범광장이 인접해 있고, 그 아래로 한양도성의 성곽이 복원되어 있다. 이 성곽길을 따라 내려오면 숭례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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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안중근 의사를 찾아서

 

1. 중국, 뤼순(여순) 감옥소

19091026일 하얼빈 역에서의 의거 후, 일제의 뤼순(지금의 중국 여순) 감옥소로 압송된 때가 113일이다. 투옥 143일 동안 늘 그러하지는 않았지만, 일제는 국제적인 관심이 된 안중근 의사를 특별히 대우하였다. 의사는 붓글씨를 써서 일본인들에게 주었다. 의사의 글을 얻고자 일부러 찾아오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사형선고일 이후부터 순국되기 전까지 짧은 기간에 이곳에서 안응칠 역사<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곧 죽을 이에게 베푸는 마지막 은전인가? 아무튼 일제는 이런 특별 대우와 은전(?) 덕분에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저서가 남아서 전해 질 수 있었고,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넋과 정신을 숭고하게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체면을 유지하고 양심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감사해 한다. 뤼순 감옥소에서의 생활을 안의사는 그의 안응칠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감옥에 갇힌 뒤로 여러 사람과 차츰 가까이 지내는 중에 전옥(典獄, 교도대장)과 간수계장 그리고 일반관리들도 나를 후대하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이것이 꿈인가 참인가 의심했었다. ‘같은 일본인인데 어째서 이같이 서로 다른가. 대한에 있는 일본인들은 횡포하기가 말할 수 없는데 뤼순에 있는 일본인은 어째서 이같이 후한가. 종자가 달라서 그런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중략) 매주 목욕을 시켜주고 오전 오후 두 차례씩 사무실로 데리고 나와 고급 담배, 서양과자와 차를 주기에 배불리 먹기도 했다. .... 이같이 특별히 대우해 준 것에 대해 다 적지 못한다.”

 

 

 

중국 다렌의 뤼순감옥소(정식 한자명>여순일아 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 일아(日俄)일본과 러시아의 준말이며, 구지(舊地)옛 터이다.)는 본시 러시아의 감옥이었으나 러일전쟁 이후에 일제가 1907년부터 차지하여 주로 한국인중국인러시아인 등을 수감하였다. 1906부터 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2년에서 19458월 사이에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이곳이 특별한 것은 바로 우리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구금되고 사형으로 옥사한 곳이기 때문이다. 1909113일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이곳의 간수부장 당직실 옆에 있는 감방에 단독 구금되었다. 애국지사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도 이곳에 구금되어 고문 받고 또한 옥사하였다. 1988년 현재 중국정부는 일제의 침략을 기록하고 전하기 위해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필자는 2010년 겨레의 영산 백두산을 등정하고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국내성 등 고구려 역사문화 유적지를 탐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중근 의사가 투옥되고 순국한 이곳을 방문하였다. 이 사진들로 그 때의 기억과 감개를 반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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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 4. 영웅의 숭고한 죽음

안중근과 윤동주 2015.10.05 16:54 Posted by 文 寸 문촌

4. 영웅의 숭고한 죽음

 

[순국 5분전 안중근 의사의 모습, 어머님이 보내온 수의를 입었다. 우리 겨레의 옷이다.]

 

안중근은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사형집행장으로 나아간다. 전옥은 사형집행문을 읽고 유언할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안중근은 다른 유언은 없으나 나의 의거는 오로지 동양평화(東洋平和)를 도모하려는 성심(誠心)에서 한 것이니 바라건대 오늘 임검한 일본 관헌들도 다행히 나의 미충(微衷)을 양해하여 피아 구별 없이 합심 협력해 동양평화를 기필코 도모할 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어 안의사는 마지막으로 “‘동양평화만세를 삼창하고자한다고 하였으나 전옥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사형집행을 명하였다.

다음 글은 안의사의 통역 역할을 한 일본인 소노키 스에키(圓木末喜)가 만주일일신문에 안중근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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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최후 - 소노키 스에키(圓木末喜)

 

부슬비가 내리는 1910326일 오전 10,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旅順)감옥에서 행해졌다. 안은 전날 밤 고향에서 보내온 옷을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먼저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와 교수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갔다. 당일 입은 옷은 상하의 모두 조선에서 만든 명주옷이었다. 저고리는 흰색이고 바지는 검은색이어서 흑백의 분명한 대조가 아무래도 수 분 후면 밝은데서 어두운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수인의 운명과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감개를 느끼게 했다.

집행을 언도하고 드디어 미조부치(溝淵)검찰관, 구리하라(栗原)전옥(형무소장), 소노키통역, 기시다(岸田)서기가 교수대 앞에 있는 검시실(檢屍室)에 착석하자 안이 대기실에서 끌려 나왔다.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24일 뤼순지방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안은 아무 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간수가 반장짜리 종이 두 장을 접어 안의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천을 씌웠다. 안의 최후가 일각일각 다가왔다.

재판 당초부터 언도 이후까지 안을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했던 관헌은 안이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는 마음껏 최후의 기도를 하도록 허락했다. 안은 전옥의 말에 따라 수분 간 묵도(黙禱)를 했고 기도가 끝나자 수명의 간수에 둘러싸여 교수대로 향했다. 교수대의 구조는 마치 2층 집 같아서 작은 계단 7개를 올라가면 화로방 같은 것이 있는데 안은 조용히 걸어서 한 계단 한 계단 죽음의 길로 다가갔다. 그때의 감정이나 얼굴색은 흰옷과 어우러져 더욱 창백했다. 드디어 안이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옥리 한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으니 바닥이 꽈당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1015분 안은 완전히 절명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다.

보통 사형수의 유해는 좌관(座棺)에 넣은 것이 관례였으나 특별히 안(의사)을 위해서는 새롭게 송판으로 침관(寢棺)을 만들어 시체를 넣고 그 위를 흰 천으로 씌워 매우 정중하게 취급했다. 일단 이 관을 교회실에 넣고 안이 형장에 갈 때 품고 있던 예수의 상은 관 양쪽에 걸었다.

안의 공범자인 조도선(曺道先) 우덕순(禹德淳) 유동하(柳東夏) 3명은 교회실로 불려와 안의 유해를 향한 최후의 고별을 허가받았다. 세 사람은 모두 천주교인이 아니어서 조선식으로 두 번 절을 하며 안의 최후를 조문했다. 그들은 모두 감격한 듯 했고 그 중에서 우덕순은 하얼빈 이후 안중근의 소식이 끊겼는데 최후의 고별을 하게 돼 안도 만족할 것이라며 당국의 취급에 감사했다.

이리하여 시체는 매우 정중한 취급을 받으며 오후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공동묘지에 묻혔다. 두 동생은 안중근의 죽음을 듣고 아이고라고 외치며 통곡했다. 그들은 시신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안된다는 말에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해서 26일 오후 5시 뤼순발 열차로 안동현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출전 : 만주일일신문 191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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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전하기에 안의사의 최후 장면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의심할 수도 있지만 달리 그 순간에 가까이에서 목도(目睹)한 조선인은 아무도 없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최후의 순간을 상상해본다. 사형집행의 순간이지만 가슴 뭉클한 감격과 경외심이 일어난다. 다만 소노키의 말대로 침관으로 모시고 정중하게 장례와 발인의 예를 거쳐서 공동묘지에 묻었다면 의사의 유해를 찾을 길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라도 속히 그의 유언대로 조국의 땅으로 모셔 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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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사형 선고를 받은 옥중의 아들에게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를 보면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요, 그 아들에 그 어머니를 알 수 있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네가 만일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선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께 드린 유서>

어머니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 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아들 도마 올림

 

안중근 의거 후 모친 조 마리아 여사는 자부 김아려, 손자 분도와 준생 그리고 두 아들 정근과 공근 등 일가를 거느리고 연해주에 망명하였으며, 안중근 일가를 조국독립운동의 명문으로 이끌었다.

 

191039, 10일 두 아우인 정근과 공근 그리고 홍석구(프랑스 신부)가 마지막으로 안의사를 면회하였다. 그 자리에서 안의사는 두 동생들에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이니 두려움이 없다. 나는 천주님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너희들은 오히려 기뻐해다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고.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라고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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