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안중근 의사를 찾아서
1. 중국, 뤼순(여순) 감옥소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의 의거 후, 일제의 뤼순(지금의 중국 여순) 감옥소로 압송된 때가 11월 3일이다. 투옥 143일 동안 늘 그러하지는 않았지만, 일제는 국제적인 관심이 된 안중근 의사를 특별히 대우하였다. 의사는 붓글씨를 써서 일본인들에게 주었다. 의사의 글을 얻고자 일부러 찾아오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사형선고일 이후부터 순국되기 전까지 짧은 기간에 이곳에서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곧 죽을 이에게 베푸는 마지막 은전인가? 아무튼 일제는 이런 특별 대우와 은전(?) 덕분에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저서가 남아서 전해 질 수 있었고,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넋과 정신을 숭고하게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의 인도주의적 체면을 유지하고 양심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감사해 한다. 뤼순 감옥소에서의 생활을 안의사는 그의 《안응칠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감옥에 갇힌 뒤로 여러 사람과 차츰 가까이 지내는 중에 전옥(典獄, 교도대장)과 간수계장 그리고 일반관리들도 나를 후대하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이것이 꿈인가 참인가 의심했었다. ‘같은 일본인인데 어째서 이같이 서로 다른가. 대한에 있는 일본인들은 횡포하기가 말할 수 없는데 뤼순에 있는 일본인은 어째서 이같이 후한가. 종자가 달라서 그런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중략) 매주 목욕을 시켜주고 오전 오후 두 차례씩 사무실로 데리고 나와 고급 담배, 서양과자와 차를 주기에 배불리 먹기도 했다. .... 이같이 특별히 대우해 준 것에 대해 다 적지 못한다.”
중국 다렌의 뤼순감옥소(정식 한자명>여순일아 감옥구지((旅順日俄監獄舊址), 일아(日俄)란 ‘일본과 러시아’의 준말이며, 구지(舊地)란 ‘옛 터’이다.)는 본시 러시아의 감옥이었으나 러일전쟁 이후에 일제가 1907년부터 차지하여 주로 한국인ㆍ중국인ㆍ러시아인 등을 수감하였다. 1906부터 1936년 사이 수감자는 연간 약 2만여 명에 달했다. 1942년에서 1945년 8월 사이에 약 700여 명의 수감자가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이곳이 특별한 것은 바로 우리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구금되고 사형으로 옥사한 곳이기 때문이다. 1909년 11월 3일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이곳의 간수부장 당직실 옆에 있는 감방에 단독 구금되었다. 애국지사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도 이곳에 구금되어 고문 받고 또한 옥사하였다. 1988년 현재 중국정부는 일제의 침략을 기록하고 전하기 위해 국가중점역사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필자는 2010년 겨레의 영산 백두산을 등정하고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국내성 등 고구려 역사문화 유적지를 탐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중근 의사가 투옥되고 순국한 이곳을 방문하였다. 이 사진들로 그 때의 기억과 감개를 반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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