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이불루ᆞ사이불치

한국문화유산의 길 2018.11.17 10:03 Posted by 文 寸 문촌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 華而不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인, 유홍준 교수가 백제 궁궐 건축미를 평한 말이다.
이 말은 한국미를 한마디로 평하는 특징이기도 하다. 경주 불국사에서도 느낄 수 있다.

검이불루, 석가탑.
단순하면서 안정된 조형미는 한복을 단아하게 차려 입은 양갓집 규수같다.

화이불치의 다보탑.
수려한 미모에 눈을 뗄 수 없다. 볼수록 기품이 돋아 함부로 말을 건낼 수도 없다.

우리의 고찰, 7곳의 산사가 우리나라 13번째의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지난 30일 오후(한국시각) 바레인에서 회의를 열어, 지난해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7곳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확정했다. 등재목록에 오른 산사는
경남 양산 통도사, 경북 영주 부석사,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해남 대흥사, 경북 안동 봉정사, 충남 공주 마곡사, 전남 순천 선암사다.
모두 7~9세기 산속에 세워져 지금까지 법맥이 이어져온 절들이다. (한겨레 기사일부 발췌)

이들 산사는 특정 종교만의 재산과 사찰로 국한해서 생각하지 말며,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아끼며 보존해야 할 소중한 문화이다.

어릴 적부터 산사는 삶이었다. 엄마와 형님을 따라 자주 들리고 불전에 절하고 불공도 드렸다. 산과 절이 하나였고, 삶과 신앙이 한 울 안에 있었다.
그러다가 한일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뜻 있는 선생님과 [@산사로 가는 길ᆞhttp://www.korearoot.net/sansa]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그리고 같은 교과의 선생님과는 여름방학을 맞아 해인사 4박 5일 템플스테이에도 참여하였다.
종교와 관계없이 뭘 제대로 알아야 불교 사상을 가르칠 것 아닌가?
시작부터 하심ᆞ차수ᆞ안행ᆞ묵언(下心ᆞ叉手ᆞ雁行ᆞ默言)의 4계명을 받았다. 세상의 직업과 지위는 산사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의 마음은 가장 낮은 곳에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좋은 일은 묵언 수행하는 것이었다.
특별히 명을 받아, 천주교 신자이면서 참여하게 된 동기를 묻기에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계신다기에 이 산사에도 있는가 찾기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마지막 수계식에서 각명(覺明, '깨우쳐 밝다') 법명을 얻었다.
이제 '각명 요셉'이 되었다.
수료식에 나에게 "그래, 하느님은 찾았습니까?"라며 재차 소감을 묻기에,
"이 산사에도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교회에서도 부처님이 계신지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참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세계유산이 된 7곳의 산사 중에 통도사, 부석사, 법주사는 해인사, 송광사, 범어사, 수덕사 등과 더불어 나의 [산사로 가는 길] 홈페이지의 주인공들이다.
  선암사, 봉정사, 대흥사는 [산사로 가는 길]보다 1년 전(2001년)에 제작된 나의
@한국사상 현장순례ᆞ
(http://www.korearoot.net/sasang) 길에서 찾았던 도량이다.

부석사는 원효의 도반이자 라이벌인 의상대사의 주석지이다.
선암사는 보조국사 지눌과 쌍벽을 이루는 대각국사 의천의 도량이다. 이곳에는 의천의 진영(보물 1044호)이 보존되어 있다. 특히 송광사로 넘어가는 산 길 속의 추억, <@가는 길입니다.http://munchon.tistory.com/m/135'>은 지금도 아름다운 화두가 되어 흐르며, 송광사에서 만난 우뢰와 불전사물의 울림은 천지인 묘합의 멋진 하모니였다.

봉정사는 퇴계 이황 선생님을 뵈러 하회마을에서 도산서원 가는 길에서 지나칠 수 없는 곳이기에 들렀다.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극락전이 단아하게 앉아 있고, 가까운 곳에 퇴계의 제자 김성일의 학봉종택도 있기 때문이다.

전라도 해남의 대흥사는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제자이자 조선 다도의 중심에 있는 초의선사(일지암)를 뵙고자 찾아갔다.
또한 이곳은 초의의 동갑절친 추사 김정희의 유배길 일화가 있으며, 서도가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서산대사(표충사)의 호국불교 성지이기도 하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길에 대흥사의 초의에게 들러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를 보고, 당장 떼라고 하였다. 유배가 풀려 돌아오는 길에는 다시 걸라고 하였단다. 누구의 글씨길래? 무엇이 그의 태도를 고치게 하였을까? 어떤 이는 이야기는 허구라고 하였다. 일리가 충분히 있다.

마곡사는 백범 김구가 명성왕후 시해 사건의 범인인 일인을 타살하고 옥에 갇혔다가 탈옥하여 은거한 곳으로 더욱 알려졌다.
@마곡사에서 김구를 만나다.

용연과 용머리바위에는 무슨 전설이 있겠지 싶어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전국 곳곳에 용머리바위가 산재해있고 몇 군데에 해당되는 전설이 있지만 수원화성의 용머리바위와 용연에는 그럴 듯한 전설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 아내와 다시 수원화성 나들이에 나섰다. 창룡문에서 시작된 산책은 남으로 내려가면서 봉돈과 팔달문에 다다랐다. 사통팔달의 팔달문에 걸맞게 장터가 넓었다. 그 앞에서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말라’며 술을 흥건히 따라주시는 정조대왕을 만났다. ‘예. 다음엔 그러겠나이다.’ 속으로만 답하고서는 수원천을 걸으며 화성박물관과 행궁에 들렀다.

그러고선 주일 저녁 미사에 맞춰 천주교 수원성지 본당에 들렀다. 정조대왕 사후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11세의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면서 천주교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 정약용 등 남인들이 대거 축출되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곳 수원성지는 당시 포도청이 있던 자리로써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던 곳이다. 그 어느때의 미사보다 경건하였다. 오늘 수원화성에 오길 참 잘했다. 미사 후 신부님의 안내말씀에서 <파체(破涕)>라는 소설이 소개되었다. 이백여 년 전 수원화성과 천주교 신앙 그리고 사랑에 얽힌 이야기란다. 그 속에서 정말 그럴듯한 용머리바위와 용연에 대한 전설을 얻게 되었다. 이규진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아래의 이야기는 소설 <파체> 속에서 얻은 용머리바위의 전설에 살을 더하고 내 나름대로 치장을 하여 다시 구성해보았다.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후대로 이어지나 보다.

옛날부터 이 연못에는 용이 되기를 갈망하는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천년이나 가까이 견디며 이제 승천하는 날 만 기다렸다. 어느 누구도 이 연못에 천년의 이무기가 살고 있는지 모른다. 연못가 마을에는 예쁘장한 소녀가 살고 있었다. 소녀는 종종 혼자서 연못 가까이에 와서 놀았다. 어느 날 꽃을 찾아 나는 나비를 쫓아 따르던 소녀가 그만 발을 헛디뎌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 허우적대며 물에 가라앉을 때 연못 속의 이무기가 소녀를 살포시 안아 연못가로 건져 주었다. 소녀는 물 한 방울 젖지 않았다. 깊은 잠을 자다 깨어났기에 물에 빠진 줄도 모르고 있다. 그러니 이무기를 본 적도 없고, 누가 구해주었는지도 더더욱 모른다. 다만 용이 되어야 할 이무기만이 그 소녀를 잊지 못하였다. 깊은 연못 속보다 더 차가운 몸으로 소녀의 따뜻한 몸살을 품었으니 그 체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 그리움이 되었고 그리움은 상사병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소녀는 어느듯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다. 사랑에 빠진 이무기는 승천일이 다가오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사랑하는 소녀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이 되어 승천할 것인가? 아니면 천년의 세월을 포기하고 소녀를 사랑하며 이 세상에 남을 것인가?’
간절한 기도 끝에 이무기는 결국 마음을 고쳐먹었다. 소녀에 대한 사랑은 한 때의 감정이며, 인간 세상의 삶도 아침 이슬같이 부질없는 것이다. 천년의 용은 결국 승천을 결심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삶이라는 결심을 굳혔다. 드디어 승천하는 날. 하늘을 오르던 용은 잠시나마 미련과 추억을 떨쳐버리고자 연못가로 눈길을 내렸다. 그 순간 사랑했던 여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아, 저 여인도 나를 사랑했나보다’ 그리하여 마음이 흔들렸고 사랑하는 여인을 자세히 바라보고자 머리를 돌렸다. 앗! 바로 그 순간, 온 몸이 굳어버리고 그만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움으로 눈이 멀어버린 용의 머리가 곤두박질로 떨어진 곳이 바로 용머리바위이며, 짝사랑했던 용의 마음이 깊이 가라앉아 버린 곳이 바로 지금의 용연이다. 연못가의 아름다운 여인은 아무것도 모르며 밤하늘의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의 눈으로는 용을 볼 수 없다. 아무도 용의 사랑하는 마음을 모른다. 하물며 그 소녀, 그 여인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그렇게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용연에
깊이 묻혀있다.


꽃보다 아름다운 방화수류정은 슬픈 사랑의 용머리가 되어 바위 위에 걸터 앉아있다. 용연의 배수구에는 입을 벌리고 화홍문으로 물을 내려 보내고 있는 용머리가 있다. 팔달문 장터 입구에서 앉아 백성들
에게 술을 따라주는 불취무귀(不醉無歸)의 정조대왕 모습이 떠올랐다. 과연 뜻을 이루지 못한 용은 누구인가? 백성을 사랑하여 무한히 베풀고자 했지만 뜻이 꺾여버린 정조인가? 뒤주에 갇혀 죽은 비운의 사도세자인가?

한선생의 한양이야기

한국문화유산의 길 2017.03.12 19:19 Posted by 文 寸 문촌

http://m.gokorea.kr/news/articleView.html?idxno=5689

정선은 다르게 본다.
수성동 계곡의 진면목을 담고자 위에서 내려보았다. 그래야 계곡을 좀 더 깊숙히 담아낼 수 있었다.
진경산수화는 눈에 보이는(see)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되는 산수의 진면목을 담아 내고자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상상하며,  바라보고(look) 재구성하여 그렸다. 정선이 혹시 드론(drone)을 띄워 촬영한 영상을 그린 것은 아닐까? 재밌는 상상도 해본다.

[참고 > 서촌나들이 약도]

통인시장 서쪽 입구

사직단에서 서촌ㅡ세종마을을 걸으며 통인시장 서쪽입구에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선인재 비빔밥의 후식으로 핸드드립커피를 마시고 싶어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재즈가 정겹다. 인터넷 라디오란다. "라디오스위스재즈"를 검색하면 종일 재즈를 들려준단다.
나도 즐감하련다. 젊은이가 꾸민 카페도 예쁘다.

박노수 미술관이다. 이번엔 그냥 지나친다.

콘크리트 담장틈에 자라는 이름없는 잡초에도 생명을 기도한다. 얼마나 고운 심성인가?

꽃을 가꾸며 그 아름다움을 이웃과 나그네에게 나누는 이는 꽃보다 더 아름답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ㅡ경복궁역에서 수성계곡 바로 입구까지 올라오는 마을버스 종점에도 예쁜 카페가 있다.
'청년 취업난으로 이렇게 골목마다 카페가 이리 많은가? '

드디어 겸재 화백의 수성동도 현장!

겸재 정선의 수성동도 ㅡ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는 것을 상상하며 계곡의 진면목을 화폭에 담아 내었다. 이것이 진경산수화의 진면목이다. 우리 아이들 깊숙한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아이들을 판단하지 말아야겠다. 그것이 다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아이들의 진면목을 바라보고 찾아줘야겠다.

눈에 보이는 수성계곡. 계곡의 진면목을 다 볼리 만무다. 그래도 아름답다.  푸른 산과 초목들 따스한 햇살, 말 그대로 물소리(수성)까지 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나는 몸으로 수성동계곡의 그림을 담았다.

수성계곡을 찾은 도회여인네들을 질투하듯 까치 연인이 온갖 희롱과 교태로 담소를 훼방놓고 있다. 이 또한 수성동의 진면목.

처음은 인왕산을 너머 서대문 안산의 산책로를 걸을까 했는데 약속시간이 늦어 다시 내려간다.

겸재 정선의 "수성구지" - 이 그림은 아래의 현재 군인아파트에 살았던 정선이 눈 앞에 펼쳐진 수성동계곡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현재의 군인 아파트 - 이 곳이 겸재 정선이 살았던 '인곡정사'터라는 설이 유력하다.

정선의 "인곡유거" - 정선 자신이 살았던 집의 모습을 그렸다. 그렇다면, 방안의 선비는 정선, 자신이겠다.

           인곡유거란 - 인왕산 계곡에 그윽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사직단에서ㅡ 수성계곡 가는 길

   길을 걷다보면, 계획에도 없고 바라지도 않은 소중한 것을 얻을 때가 많다. 그게 바로 청전 이상범 가옥이고 한식당 선인재이다. 그래서 걷는 여행은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그런 소소함이 이어질 때 그것을 행복이라 한다. 통인시장 서쪽 끝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자 마자 들린 카페에서의 핸드드립커피와 재즈도 나의 행복에 소소함 더하기이다.

이상범 / 박노수 더 읽기 : http://navercast.naver.com/magazine_contents.nhn?rid=2860&contents_id=76052

 

서울 길 나들이2 -사직단

한국문화유산의 길 2016.05.04 20:04 Posted by 文 寸 문촌
사직단 이야기  

한 나라의 주권은 백성에게서 나온다. 그 백성이 편안히 거처하고 배불리 먹고 살기 위해서는 국토가 안정되고 식량이 풍부해야 한다. 그래서 땅과 곡식은 백성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맹자는 말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볍다(百姓爲貴, 社稷次之, 君爲輕)"고.  
그는 참으로 위대한 사상가이다.    
 

사직단은 바로 국토와 식량의 근본인 땅과 곡식을 신(神)으로 섬기며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토지(땅)의 신을 사(社)라 하며, 곡식의 신을 직(稷)이라 한다. 좌묘우사(左廟右社)의 배치 양식에 의거하여 국왕이 거처하는 법궁(정궁)을 가운데 두고 동쪽(임금의 왼쪽)에 종묘를, 서쪽(임금의 오른쪽)에 사직단을 세우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드린다. 그래서 '종묘사직'이라 함은 곧 국가의 상징이 된다.  

겸재의 수성동도 현장인 옥인동 수성계곡을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사직단을 오랜만에 다시 들렀다. 그냥 답사겸 스쳐지나갈 작정이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보며 새로운 의문점이 일어나 훨씬 많은 시간을 이곳에다 투자했다.  다시 오길 참 잘했다. 그래서 그때는 몰랐던 것을 이제서야 새삼 알았다.

사직단의 정문은 북신문이란 것을. 그리고 그 안에 예감이 두개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토지신 사단(社壇)의 제단 위에는 돌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석주(石主, 돌주인)이라 한다는 것을.
사직단에서도 사직대제라는 제향의식을 가진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해설사와 함께 정문인 북신문을 거쳐 유문(幽門)으로 들어가 두개의 제단을 내 손으로 만져봤다는 것에 오길 잘 왔다 싶었다.

한편, 새삼 물을거리가 생겼다. 사방의 사신문은 홍살문과 같이 생겼는데 화살과 창살이 없다. 왜 그럴까? 고증과 복원의 실수였는가? 


(위의 사직단 안내도에서는 북신문(삼문)이 동쪽을 향하고 있다. 방위의 표시가 잘못되었거나 그림을 우하(右下) 방향으로 잘못그렸다.) 

북방에 위치한 북신문만 삼문(三門)이다. 그렇게 정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성과 도읍과 궁성 등 모든 문은 남문이 정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수원화성의 정문은 남문인 팔달문이 아니라,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이는 임금님이 계신 한양도성이 수원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사직단의 주인인 사신(社神)과 직신(稷神)은 하늘(Heaven)에 있으며, 그 하늘은 북(北)에 있기 때문에 북문이 정문인 것이다. 물론 모든 나라 모든 도읍의 사직단이 한결 같이 정문은 북문이라는 것은 자신하지 못하겠다.

북신문과 향축로 - 판위 - 어로 : 판위 위에서 임금은 남향하여 제단을 바라보며 사신과 직신을 맞이하고자 국궁사배하며 향을 피운다.

좀 더 높은 곳에 올라가야 사직단을 제대로 내려볼 수 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서신문 밖에 있는 낮은 언덕에 올랐는데, 정문인 북신문 방향에서 내려보기 위해서 서울 어린이 도서관 3층에 올라가서 찍었다. 사단(좌)과 직단(우)의 모습과 사직단을 두르는 유(壝)라는 낮은 담장과 네개의 유문도 분명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판위에서 오른편 서신문으로 이어지는 어로와 신실에서 사직단으로 이어지는 신위행로도 보인다.
아직 사직대제의 제향의식을 보진 못해서 잘 모르지만, 신실에 보관된 사신위패와 직신위패를 꺼내어 신위행로와 이어딘 남유문으로 들어와 사직제단위에 모셔놓고, 임금은 서신문으로 들어와 판위에서 남향하여 제단을 바라보고서 국궁사배하며, 북신문으로 들어온 향을 피워 하늘에 있는 사신과 직신의 혼(魂)을 모시고 폐(幣:비단)를 올린다. 이렇게 제향의식이 시작될 것이다.
 

신실에서는 4신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4신은 태사(太社)지신, 태직(太稷)지신과 그들의 아내라 할 수 있는 후토(后土)씨지신, 후직(后稷)씨지신이다. 사직대제를 지낼 때에는 신실에서 4신위를 모셔나와서 네개의 위판을 각 단에 배치하는데, 국사(國社)와 국직(國稷)은 각 단의 남쪽에서 북향하고, 후토와 후직은 각단의 북서쪽에서 동향하여 세운다.

정문인 북신문으로 들어가면 사각형의 웅덩이가 보인다. 예감이라 한다. 왕릉에서는 한개의 예감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곳은 좌 우 두개가 있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 제단이 둘이라서 그런가보다.  왕릉의 예감은 축문을 태운 재를 묻는데, 사직대제에서도 이 예감에 축문과 폐(비단)와 서직(黍稷:기장)을 태워 묻는다. 내가 만난 해설사님은 소,양,돼지의 털과 피와 백초와 오곡의 으뜸인 기장을 묻음으로써 땅으로 돌아간 백신(魄神)을 초청한다는 것이다.   

즉, 일반적인 제사의 영신례는 제주가 향을 피워 하늘로 돌아가신 조상의 혼(魂)을 신위에 모신 다음, 잔에 받은 을 모사기에 세번에 나누어 따르면서 땅으로 돌아간 조상의 넋인 백(魄)을 모신 다음에 제주를 비롯한 제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절을 두번올리면서 제사는 시작된다. 그런데, 해설사님의 말씀으로는 사직대제에서는 먼저 가축의 모혈과 기장을 예감에 묻음으로써 백신을 부르고 다음에 향을 피워 혼신을 모신다는 것이다. 또한 본래의 예감은 사람이 들어갈 만큼훨씬 크고 깊었다한다. 내가 잘못 듣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닐까 우려되지만, 일단 기억된 것으로 기록에 남겨놓고 시간을 가지며 알아볼 일이다. 

   

1미터 정도의 제단은 3층으로 되어있다. 위는 하늘이요. 아래는 땅이며 가운데 두터운 돌은 사람(백성)이라는 것이다. - 해설사의 말씀.  정사방의 제단으로 오르는 사방의 계단도 계단석이 3개씩이다.   
특히, 사단(社壇) 위에는 직경 30센티미터 정도의 둥근 돌이 남쪽 계단 쪽에 박혀있었다. 사직단 안내도 그림에서도 자세히 보면 구분하여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이걸 묻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해설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직단은 지방 군현에도 있었으니 조선 땅에 400여 개 정도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이 곳 한양의 사직단에서만 유일하게 이 돌이 있다는 것이다. 이 돌을 석주(石主)라 한다. 석주(石柱) 아닌가 되물었지만, 주인 주(主)가 맞다고 하면서 한양의 사단(社壇)과 석주가 바로 조선 땅의 중심이며 그 주인이라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직경 30센티이며 깊이는 75센티 정도로 땅에 묻혀 있다고 한다.  

또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는 국토의 상징인 사단(社壇) 위를 덮고 있는 흙은 일반적인 흙으로 덮여 있지만, 그 안에는 오방색에 따라서 청토(동), 백토(서), 적토(남), 현토(북) 그리고 황제를 상징하는 황토(중앙)로 다섯 구역을 나눠 채워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곡식의 상징인 직단에서는 겉과 속이 똑같이 일반적인 흙으로 채워지고 덮여 있단다. 

비록, 정사각형의 제단이 한 나라의 국토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오행(五行) 오방(五方)을 다 가졌으니 우주를 상징하기도 한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지만, 사각형은 우주를 상징하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의문점이 떠올라 엉뚱한 질문을 드렸다. "사단에 채워진 오방색의 흙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사단이 국토(흙)의 상징이니 흙으로 채워졌다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식량(곡식)의 상징인 직단에서는 흙 위에 곡식을 심던가 곡식을 상징하는 풀이라도 자라도록 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웃으면서 말씀하시길, 결국 흙이 있어야 곡식이 자라니 '흙(土)'이 근본이란다.   

동에서 서향하며 서유문, 서신문을 찍은 사진. 지금은 숲을 이룬 작은 언덕이지만 사직단 본래의 모습은 이곳에 전사청과 제기고, 제정 등이 여기에 있어 제사 준비를 한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사직단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여러 부속 건물들을 허물어 사라졌다. 정문도 근대화 과정에서 도로폭이 확장되며 24미터 가량 뒤로 옮겨진 상태라 한다. 장기적인 복원계획에 의해 부속건물들이 차츰 복원될 예정이란다. 

 

사단을 오르는 남쪽 계단 오른편으로 치우쳐서 석주가 박혀 있다.

남유문에서 북향으로 바라보며 찍은 사진, 즉 오른쪽이 사단이고 왼쪽이 직단이다. 파란색 지붕이 서울 어린이 도서관이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현장을 찾아가는 길이다. 저녁이면 선생님들의 협의회가 있다. 겸사겸사 아침부터 길을 나서 서울 나들이에 나셨다. 코스 잡기를, 동탄에서 광역급행버스를 타고 을지로입구역 정류장에서 버스하차, 여기서부터 걷기를 시작한다.
서울시민청ㅡ성공회주교좌 성당과 영국대사관ㅡ조선일보미술관ㅡ새문안교회ㅡ한글학회ㅡ주한중국문화원ㅡ사직단

새로 지어진 서울시청과 옛 서울시청(도서관)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곡선과 직선의 대조, 유리와 돌의 대조, 참 어울리지 않은 짝과 같다. 그렇다면 새 것을 옛 것에 좀 더 어울리게 할 순 없었을까? 그래도 어쩌랴. 지나간 것은 지나 간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니....보기에 따라 좋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 뭐. 

대한성공회 주교좌 성당

  : 높은 곳에서 바라본 주교좌 성당이다. 왼쪽 위에는 덕수궁과 석조전이 보인다. 오른쪽 뒤로는 영국 대사관저이며, 바로 뒤에는 성당 사제관이다. 87년 6월 민주화항쟁의 진원지가 이곳이라며 기념비가 놓여 있다.  

대한성공회 주교좌 성당 전경

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주한 영국대사관저이다. 그 앞에 초소가 있다. 성당은 여기서 오른쪽으로 들어간다.

사제관

성공회서울대성당에 있는 유월민주항쟁진원지 기념비

대한성공회서울대성당 사제관 앞에는 유월민주항쟁 진원지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있다. 1987610일 민주항쟁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을 기념하려고 대한성공회 6월 민주항쟁 10주년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에서 1997610일에 6월 민주항쟁 십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유월민주항쟁진원지를 크게 쓰고 유월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라는 설명이 있다. 1987년 성공회서울대성당은 민주화의 열망을 가진 인사들로 가득했고 이곳에서 그 열망이 610일 표출되었으며 시민들의 결집된 힘을 끌어내 이 땅에 민주화를 가져오게 했다.

 

 

성당을 나와 왼쪽 골목길을 걷는다. 조선일보사 뒤에 조선일보 미술관이 있다. 마침 여성작가 미술작품 전시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덕분에 혼자서 구경한 번 잘했다.

새문안교회 신축공사 현장을 지나면서 오른쪽을 걸었다. '이 곳이 한글학회이구나' 감탄하는 순간 낯선 건축물이 눈에 띠었다. 아, 이런 걸 아라베스크하다는 구나. 주한 오만 대사관 건물이었다. 새문안교회와 한글학회와 아라베스크문화가 하나로 이어져있어 감정이 묘했다. '오만' - 오만과 편견? 그 참 나라이름도 묘하구먼. 무슨 뜻일까?  

북악산 백악마루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미끄러지듯 내려오면 비둘기 바위가 보인다. 육안에서는 잡히는데 스마트폰 카메라가 크게 확대해서 찍는데는 한계가 있다. 정선은 백악산 그림을 여기쯤에서 그렸을까?

 

백악산
현재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의 모습이다.  왼쪽의 가파른 능선을 따라 쌓아올린 산성이 보인다.  전국 각지의 인력을 차출하여 쌓은 우리나라 최초의 실명제 산성이다. - [출처] 겸재 정선의 삶과 예술(2)-조선 진경을 그리다 (청원미학역사연구소) |작성자 청원 이근우

서울(주한) 중국문화원
  : 우리 학교 아이들, 중국문화탐방 자율동아리 회원들이 곧 찾아가고 싶어 한다기에 사전답사를 겸해서 찾았다.

河 (순자왈 부적규보 무이지천리 부적소류 무이성강하)

▶ 순자가 말하기를, “반걸음을 쌓지 않으면 천리에 이르지 못할 것이요, 작게 흐르는 물이 모이지 않으면 강하()를 이룩하지 못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 명심보감 25. 권학편[勸學篇]

두보의 시 " 독서파만권, 하필여유신" ~ 책을 만권을 읽으면, 글쓰기는 신의 경지에 이른다.

  가방 속에 넣어다니는 붓펜을 들어 적어본다. 난 몇 권의 책을 읽었던가?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냥 文寸"이다.

 사직공원 바로 북쪽 옆에는 서울 어린이도서관이 있다. 사직단을 잘 내려다보기 위해 도서관 3층에 올라갔다.

홀에서는 아이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독서의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아이들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참 재미가 있다. 아이들 눈과 마음으로 동화를 읽어보고 싶다. 좋은 교육방법이다 싶다.  

참 예쁜 책 한권이 정원에 펼쳐져 있다.

이런!!  나는 무슨 꽃을 피웠는가? 어떤 꽃을 피울 것인가? 새삼 이 나이에 이 화두를 물었구나. 낚였다.

 

중간고사 끝나고 토요일ㅡ자율동아리 "중국문화탐방" 아이들과 같이 인천차이나타운 다녀왔어요.
인천역에서부터 100여 년전의 개항, 최초의 짜장면, 최초의 근대 공원 등등 이야기가 줄줄이 시작되네요.
일단, 공화춘에서 짜장면 한그릇부터, 길거리 중국음식 디저트, 단골찻집 '보이명차'에서 홍차, 보이차 다도 이야기,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인천 자유공원에서의 맥아더장군 동상이야기, 삼국지ㅡ초한지 벽화이야기, 청ᆞ일 조차지와 조계지 경계에 있는 공자상과 공자이야기.
ㅡ 슬픈 근대 역사의 현장을 쓱 다녀와서는 참 공부할거리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동아리 아이들에게 협업하여 스스로 묻고 함께 답을 찾아보라 권했습니다.

 

  • 언뜻 동묘를 찾다.

    한국문화유산의 길 2016.04.03 21:52 Posted by 文 寸 문촌
    약속이 취소된 줄 모르고 나선 서울 나들이. 언뜻 떠올린 생각따라 동묘를 찾았다.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
    성균관의 대성전이 공자를 위한 문묘라면, 이곳 동관왕묘는 삼국지의 관우를 위한 무묘란다. 임진왜란에서 조ᆞ명의 연합군이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에 관우의 은덕이라 여겨 사당을 짓고 제사드렸다 한다.
    올해 중국문화 동아리 학생들이 지도교사 되어 달라기에 덕분에 언뜻 생각이 나서 먼저 들렀다. 동묘 담장 둘레에는 골동품 시장이 열려있다. 늙고 닳은  중고 물건을 닮아 사람들도 모두 늙었다. 봄꽃도 벌써 바람에 흩떨어진다. 목마른 비둘기가 정겹게 모여 목을 축인다. 나도 목마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