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헷갈렸죠. 우리나라의 독립에 중대한 사건이었던 국제회담에서 포츠담회담사진과 포츠담선언의 주체가 달라서 말입니다.

미국 루즈벨트ᆞ영국 처칠ᆞ소련 스탈린의 포츠담회담 장면ㅡ독일 포츠담 체칠리엔 호프궁전에서

미국ᆞ영국ᆞ중국 수뇌의 포츠담 선언문 일부

오늘 포츠담 회담(미영소)과 포츠담 선언(미영중)은 다른 사건이라는 상세한 설명을 읽었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1/04/20170104000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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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동독의 시민혁명 ‘월요데모’ 

[양창석의 통일이야기]

 입력 : 2014.07.13 16:37 | 수정 : 2014.10.25 06:50
독일통일을 '흡수통일'로 규정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동독 주민에 대한 모욕이다. 통일의 주체를 서독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체커 통일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독일 엘리트들은 통일의 주체를 동독 시민으로 보고 있다. 동독 주민들의 대규모 탈출을 '발에 의한 결정'으로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탈출자들은 희망이 없는 동독 정권을 버리고 자유와 풍요의 땅 서독으로 떠났다. 반면 상당수의 주민은 '우리는 이곳에 머물겠다'라고 외치면서 거리로 나가 개혁을 요구했다. 이 대규모 시위가 바로 '월요데모'다. 이것은 시민들이 독재정권에 자발적으로 저항한 자유혁명이었으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평화혁명이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의 성공적인 시민혁명이었다. 월요데모는 어떻게 시작됐고 평화혁명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월요데모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됐다. 이 교회 퓌러 목사에 따르면 월요데모의 기원은 1981년에 시작한 '평화를 위한 10일 기도회'였다. 이것이 1982년부터 '평화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월요일마다 열렸다. 당시 유럽에서는 소련의 SS-20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와 이에 대응해 나토가 미국의 퍼싱Ⅱ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평화운동 단체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기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100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기도회 참석자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 1시간여 동안 침묵시위를 벌였다. 동독 정권으로서도 '반핵 평화 시위'를 저지할 이유가 없었다. 그 후로 기도회와 시위는 계속됐고 1989년 5월 대규모 탈출사태와 부정선거를 계기로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으로 발전하게 됐다.

1989년 5월 7일 실시된 지방선거의 부정이 드러나자 조직적인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5월 8일 니콜라이 교회에는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부정선거에 격분한 저항인사들이 동독 전역에서 100여 차례의 시위를 갖고 민주화를 요구했다. 150여개 단체들이 교회의 보호 아래 규합해 동독 정권에 대항했다. 이렇게 조직화된 월요데모는 10월 들어 동독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0월 7일 동독 정권 출범 40주년 기념일에는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베를린 등 도처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동독 경찰과 보위부원들은 시위대원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체포하는 등 그 어느 시위 때보다 강력하게 진압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 월요데모는 10월 9일 7만명이 참가해 동독 역사상 최대 규모였으며 10월 16일 12만명, 10월 30일 30만명, 11월 6일 50만명으로 규모가 늘어만 갔다. 11월 4일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시위에는 무려 100만명이 참가했다. 여행의 자유와 민주화를 외치던 초기 구호도 종교와 언론의 자유, 자유선거와 장벽 철거 등으로 강도를 높여갔다. 강력한 시민혁명의 물결 속에 10월 18일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 19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마침내 11월 9일 '철의 장막'이라 불리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대규모 시민혁명이 어떻게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을까. 첫째, 주도 단체들과 참가자들 모두 '비폭력'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퓌러 목사는 시위자들에게 '경찰에게 절대로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또한 촛불 시위자들이 모두 촛불을 두 손으로 들어야 했기 때문에 손에 몽둥이나 돌을 들 수 없었다고 한다. 둘째, 시위자들의 숫자가 수만명에 이르자 경찰이 무력을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고르바초프가 소련군의 시위 개입과 무력 사용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호네커 서기장은 무력진압을 요청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반대했다.

 

'우리는 국민이다'라는 구호가 월요데모에 등장했다. 독재정권의 핍박을 당하던 동독 시민들이 '우리가 주인이다'라고 외치고 나온 것이었다.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베를린 봉기 등 끔찍한 폭력으로 점철된 독일 땅에서 동독 시민들이 무혈 혁명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평화 통일을 이룩한 역사가 부럽다.
 
양창석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감사

 

 

http://kofice.or.kr/c30correspondent/c30_correspondent_02_view.asp?seq=12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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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염돈재의 독일통일 이야기

'21세기의 기적'으로 불리는 독일통일의 과정
[염돈재 독일통일 이야기] 독일통일은 "민주적 통일·평화적 통일·주변국의 동의"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  2014-07-03 14:27

 

'염돈재의 독일통일 이야기'는 1990년부터 3년 동안 독일 통일을 직접 목도(目睹)한 염 원장의 소중한 경험과 이를 통해 얻은 교훈 등으로 채워집니다. 2011년 염 원장이 집필한 '올바른 통일준비를 위한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단행본 내용을 바탕으로 게재합니다. 총 50여 차례 연재될 예정이며, 남북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독일통일 과정을 요약하면

①동독주민들의 시위로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되고,

②자유선거 실시로 체제선택권을 갖게 된 동독주민들이 동독 공산정권을 버리고 서독에의 편입을 선택했고,

③서독정부가 기민한 외교를 통해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를 받아 냄으로써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독일통일은 ①주민의 자유로운 의사표시를 통해 이루어진 민주적 통일이라는 점, ②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평화적 통일이라는 점, ③주변국의 동의를 받으면서 이루어진 통일이라는 점에서 "21세기의 기적"이라고 불린다.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과정은 헝가리에서 시작되었다. 1989년 6월 28일 헝가리 개혁정부가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제거하자 동독주민들의 대량 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동베를린 주재 서독 상주대표부, 헝가리·폴란드·체코 주재 서독대사관에 동독주민들이 몰려들어 서독행 비자를 요구했다. 서독정부는 소련 및 동독 당국과 협의, 체코·폴란드에 있던 동독주민 2만여 명을 열차 편으로 서독으로 수송했다. 그러나 서독 텔레비전을 통해 이를 알게 된 동독주민들의 탈출이 늘어나 매일 2,000여 명이 서독으로 탈출하고 시위가 전국규모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10월 7일 동독 공산정권 수립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늦게 오는 자는 인생의 벌을 받는다"는 소련 속담을 인용, 동독의 개혁을 촉구하자 시위가 가열화 되었으며, 10월 16일에는 라이프치히에서 12만 명이 시위에 참가하는 등 시위규모가 급속히 커지기 시작했다.

https://brunch.co.kr/@leipzig/5 [라이프치히 프로젝트 에서]

 

갑작스러운 시위확산과 소련의 유혈진압 반대로 무력진압을 포기한 동독 지도부는 10월 18일 호네커를 퇴진시켰고, 개혁성향으로 알려진 에곤 크렌츠가 서기장에 취임했다. 크렌츠는 과감한 개혁을 약속했으나 주민들의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공보담당 정치국원 샤보프스키의 실수로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었다. 샤보프스키는 11월 9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여행 자유화 계획을 설명하던 중 "누구나 지금부터 서독여행을 할 수 있다"고 잘못 발표했고, 동서독 주민들이 대거 국경으로 몰려가 국경개방을 요구, 겁에 질린 국경 경비병들이 국경을 개방함으로써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사태를 되돌리기 어렵다고 판단한 공산지도부는 이를 기정사실화 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장벽 붕괴 후 시위가 더욱 가열되자 다시 희생양이 필요해진 동독 지도부는 11월 13일 슈토프 총리를 퇴진시키고 개혁성향으로 인기가 높던 드레스덴 시당 위원장 모드로우를 총리에 임명했다. 그러나 11월 하순부터 호네커 등 실각한 공산지도자층의 호화생활과 부패행위가 폭로됨으로써 시위는 더욱 가열화 되었다.

동독 지도부는 '동독'의 존속을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개혁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 12월 1일 인민회의에서 사회주의통일당(SED, 동독공산당)의 권력독점 조항을 삭제, 정치적 다원주의를 허용했다. 이어 12월 3일에는 당 중앙위원회 특별회의에서 당 정치국과 중앙위원회를 해체했으며, 12월 6일에는 크렌츠가 당서기장, 국가평의회 의장 및 국방위원장 등 모든 직책에서 사퇴함으로써 정치권력이 공산당에서 내각으로 넘어갔다. 동독 공산당은 12월 16일부터 17일간 개최된 제2차 특별 당 대회에서 스탈린주의와 결별하는 새로운 당 강령을 채택하는 한편, 기존의 사회주의통일당(SED) 당명에 민주사회주의당(PDS)을 덧붙여 SED-PDS로 개칭했다. 그 후 공산당은 개신교 연합을 '원탁의 각료급 회의'에 초대하여 12월 7일부터 '원탁회의'가 출범되었다. 7개 정당 대표 17명, 민주세력과 사회단체 대표 19명 등 36명으로 구성된 원탁회의는 형식상으로는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단체로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12월 초 사회주의통일당(SED) 각 지역 서기장 회의 결정에 따라 공산정권에 대한 '적의'를 수렴하여 동독주민들의 불만과 분노를 진정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편, 베를린장벽 개방을 계기로 동독 탈출자들이 계속 증가하여 1989년 한 해 동안에만 343,854명이 탈출, 경제·사회 마비상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11월 13일 취임한 모드로우 총리는 위기모면을 위해 11월 13일 서독과의 "조약공동체" 구성을 제안하는 한편, 12월 콜 총리와의 회담에서 120억 마르크의 경제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콜 총리가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지원을 거부, 그 이후에는 서독 측의 요구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 기간 중에도 동독주민의 서독이주가 계속되고 동독 경제가 더욱 악화되어 모드로우 정부는 1990년 2월 콜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화폐동맹 창설 원칙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그 후 동독 공산정권은 급속히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동독주민들의 서독에의 편입 선택

 

1989년 12월 초부터 시위군중의 민주화 요구 구호인 "우리는 국민이다"가 "우리는 한 국민이다" 또는 "마르크가 안 오면 우리가 가겠다" 는 통일구호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동독주민은 통일보다는 '사회주의 동독'의 존속을 원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공산당 지도부와 원탁회의 관계자들은 조기 선거가 '동독의 존속'에 유리하다고 판단, 1990년 5월로 예정되었던 인민의회 의원 선거를 3월 18일로 앞당겨 실시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압도적으로 승리함으로써 동독 공산정권 멸망과 독일통일 과정은 가속화되었다.

동독 기민당과 사민당이 4월 5일 개원한 동독 민주의회에서 연립정부를 구성, 서독정부와 통일협의를 개시함으로써 통일작업은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로타 드메지에 동독총리는 4월 24일 서독의 수도 본(Bonn)에서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화폐·경제·사회통합 원칙에 합의했다. 5월 18일에는 동서독 재무장관이 「화폐·경제·사회통합조약」(일명, 국가조약)을 체결, 7월 1일 발효됨으로써 동서독은 사실상의 통일을 이루었다. 이어 8월 22일부터 23일까지 개최된 동독 인민의회에서 10월 3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 가입할 것을 결의한 데 이어 8월 31일 동서독 내무장관 간에 통일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어 9월 20일 동서독 의회가 통일조약을 비준하고 10월 3일 독일정부가 통일을 선포함으로써 독일은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앞서 동독은 9월 24일 동유럽 공산국가들 간의 군사동맹 기구인 바르샤바조약기구(WTO: Warsaw Treaty Organization)에서 정식 탈퇴했으며, 10월 2일 동독의회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소멸을 의결함으로써 독일통일은 인류역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합법적,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2+4 회담과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 확보

 

2차 대전 종전 이후 서독정부는 주변국의 반대를 의식,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를 기피해 왔다. 그러나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장벽붕괴를 통일로 연결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조치로 베를린 장벽 붕괴 3주 후인 11월 28일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하여 베를린 장벽개방을 통일로 연결시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콜 정부는 미국이 독일통일에 적극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요구조건을 초기부터 전폭 수용하면서 미국의 협조를 받아 주변국을 설득해 나갔다. 우선 통일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로부터 탈퇴할 경우 독일통일에 동의하겠다는 소련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처음부터 통일독일의 NATO 잔류의사를 분명히 했다. 프랑스의 동의 확보를 위해서는 유럽통합의 신속한 추진을 약속했고, 영국은 통일독일이 더 이상 패권추구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 동의를 얻어냈다. 소련과는 오더-나이세 국경선의 인정, 통일독일 병력의 37만 명 선 유지, 90억 달러의 원조제공 등을 약속하여 동의를 받았다. 특히 소련은 마지막 순간까지 독일통일을 지연시키려고 했으나, 미국이 영국 및 프랑스와 연합하여 압박함에 따라 결국 독일통일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통일의 외부적 절차 완성을 위해 개최된 2+4 회담은 사실상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 동서독이 이미 통일에 합의한 데다, 미국과 서독이 관련국들과의 양자협상을 통해 합의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회담은 1990년 5월 5일 서독의 수도 본(Bonn)에서 1차 회담을 시작하여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4차 회담에서 「독일문제의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종결되었다. 또한 조약에 따른 후속조치로 1990년 10월 12일에는 「소련군의 기한부 주둔에 관한 조약」, 11월 14일에는 폴란드와의 「국경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독일통일과 관련된 대외적 문제는 완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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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이지만 교과서 통일 단원을 집필에 어깨가 무겁다. 머리를 달래려 애장 음반을 골라 틀었다.
2014년 10월. 독일통일의 현장을 탐방하며 들렀던 라이프치히를 그리워 하며 잠시 눈을 감고 감상하고 있다.
독일통일의 물꼬를 튼 성니콜라이 교회와 게반트하우스가 무척 그립다.
교회에서 오래 머물며 통일과 평화를 기도했더라면....
도시에 오래 머물다 게반트하우스의 연주회를 감상할 수 있었더라면...
다시 가고 싶다.
오래 머물고 싶다.
다행히도 게반트하우스에서 구입하여 가져온 음반이 그때의 라이프치히와 지금의 나를 이어주고 있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악장에 젖어들고 있다.

게반트하우스 이야기(go classic 동호회에서)
http://www.goclassic.co.kr/club/board/viewbody1.html?go=&code=diary&page=12&group=620&number=857&keyfielda=&keyfieldb=&keya=&keyb=&andor=
1800년대 (Alte)게반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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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건설과 붕괴 그리고 통일

1989년 12월 25일, 세계적인 음악가 레오나드 베른슈타인(Leonard Bernstein)이 지휘하는 가운데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가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악보에는 ‘환희’가 들어갈 자리에 ‘자유’가 들어 있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단일팀이 아니라 서독과 동독 그리고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된 혼성팀이었다. 이들은 모두 오랜 세월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서독과 동독,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축하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진 것은 1961년이었다. 1961년 8월 13일 동독이 쌓기 시작한 장벽은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주변 동독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콘크리트로 축조된 장벽을 따라 곳곳에 감시탑이 설치되었다. 동독 정부는 이 장벽을 공식적으로 ‘반파시즘 방어벽’이라고 불렀다. 이에 반해 서독 정부는 브란트(Willy Brandt)가 베를린 시장 시절 만들어 낸 어법에 따라 ‘수치의 벽’이라고 일컬었다. 이름이야 어떻든지 세계인들은 베를린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이 장벽을 떠올렸고, 이 장벽은 철의 장막으로 여겨졌다. 1961년부터 1989년까지 5000여 명이 이 벽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고, 그 가운데 100명에서 200명가량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1)

베를린장벽 건설은 소련의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가 동독의 사회통일당 제1서기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 8월 12일 자정 동독군과 경찰이 전격적으로 국경을 폐쇄하고, 철조망 설치 작업을 시작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장벽의 길이는 43킬로미터였고, 서베를린 외곽 장벽은 156킬로미터에 달했다. 갑작스러운 조치와 더불어 동독 주민 대부분의 서독 방문이 불가능해졌고, 이산가족까지 생겼다. 서베를린은 적대 국가에 둘러싸인 섬이 되어 버렸다. 브란트 시장을 비롯한 서베를린 시민들이 항의했지만, 사태의 진행을 막지는 못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나누는 철조망이 설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1년 동독 장교 콘라트 슈만(Conrad Schumann)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고 있다.

 

1962년 6월에는 이미 축조된 장벽에서 100미터 이내에 있던 건물이 철거되고, ‘죽음의 지대(Death Strip)’로 불리던 무인 지대가 만들어졌다. 1965년에는 다시 콘크리트 벽이 세워지고, 1975년에는 통일 때 붕괴된 형태의 장벽이 세워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벽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량된 ‘제4세대 장벽’이다. 높이는 3.6미터, 폭은 1.2미터였으며, 감시탑은 116개소, 벙커는 20개소에 달했다. 공식적으로 국경을 횡단할 수 있는 장소는 모두 아홉 곳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와 침머 거리(Zimmerstraße) 구석에 있던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다. 연합국 소속 요원과 외국인만 통행할 수 있던 이 검문소는 오늘날 베를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가 되었다.

1987년 6월 12일 베를린 시 탄생 750주년을 기념해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의 대통령 레이건(Ronald Reagan)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에게 동유럽 진영의 자유를 확대하겠다는 징표로 베를린장벽 철거를 촉구했다.2) 그러나 이때만 해도 레이건 자신을 비롯해 장벽의 붕괴를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사건은 갑자기 찾아왔다.

1989년 9월 헝가리 국경이 느슨해진 틈을 타고 동독 주민 1만 3000명 이상이 헝가리를 지나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다가 체포된 사람들은 부다페스트로 이송되었는데, 이들은 동독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하고 서독 대사관을 찾았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뒤이어 동독 내에서 대대적인 대중 시위가 일어나자 동독의 최고 지도자 호네커(Erich Honecker)는 사임했다. 그런데도 시위는 더 확대되어 갔고, 많은 주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해 서독으로 가고자 했다. 호네커의 뒤를 이어 등장한 크렌츠(Egon Krenz)는 사태 완화를 위해 난민들의 서독 방문을 허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상황이 와전되고 급기야 서독 방문이 즉각 허용될 것이라는 언론의 오보까지 발생했다. 이에 고무된 많은 동독 시민이 무력해진 국경 경비대를 뚫고 서베를린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베를린장벽 붕괴는 공식 연표에는 1989년 11월 9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장벽 전체가 철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아무튼 이때를 기점으로 시민들은 해머와 곡괭이를 가지고 벽을 부수기 시작했고, 동독 정부도 추가로 국경 초소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중에는 포츠담 광장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들이 포함되어 있어 상징적 의미가 더욱 컸다. 동서독 통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린 것은 크리스마스를 며칠 남기지 않은 12월 22일이었다. 다음날인 23일부터 서베를린 시민을 포함해 서독 주민들이 비자 없이 자유롭게 동베를린을 비롯한 동독 지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동독 정부가 공식적으로 장벽 철거를 시작한 것은 다음 해인 1990년 6월 13일이었다. 다음 달 1일 동독이 서독 통화를 수용하면서 국경에 대한 통제도 공식 종료되었다. 장벽 붕괴의 논리적 결과인 통일은 1990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고, 역사의 기념물로 남기기로 결정한 약간의 구간과 감시탑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1991년 11월까지 철거되었다. 오늘날 포츠담 광장에 남은 장벽은 살아 있는 기념물이 되어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각주

  1. 1 희생자들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Hans-Hermann Hertle, Maria Nooke, Die Todesopfer an der Berliner Mauer 1961~1989: Ein Biographisches Handbuch (Berlin, 2009)를 보라.
  2. 2 Hans-Hermann Hertle, The Berlin Wall: Monument of the Cold War (Berlin, 2008),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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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시는 역사다, 2011. 6. 1. 표제어 전체보기
도시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인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시의 공간을 산책하듯 도시의 역사를 거닐어 보자. 도시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도시 속...자세히보기
기획 도시사학회, 저자 이영석, 민유기 외
제공처
서해문집 http://www.booksea.co.kr, 제공처의 다른 책보기

[네이버 지식백과] 베를린장벽 건설과 붕괴 그리고 통일 (도시는 역사다, 2011. 6. 1.,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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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염돈재의 독일통일 이야기

'염돈재의 독일통일 이야기'는 1990년부터 3년 동안 독일 통일을 직접 목도(目睹)한 염 원장의 소중한 경험과 이를 통해 얻은 교훈 등으로 채워집니다. 2011년 염 원장이 집필한 '올바른 통일준비를 위한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단행본 내용을 바탕으로 게재합니다. 총 50여 차례 연재될 예정이며, 남북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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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돈재의 독일통일 이야기'는 1990년부터 3년 동안 독일 통일을 직접 목도(目睹)한 염 원장의 소중한 경험과 이를 통해 얻은 교훈 등으로 채워집니다. 2011년 염 원장이 집필한 '올바른 통일준비를 위한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 단행본 내용을 바탕으로 게재합니다. 총 50여 차례 연재될 예정이며, 남북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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