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영웅의 숭고한 죽음
[순국 5분전 안중근 의사의 모습, 어머님이 보내온 수의를 입었다. 우리 겨레의 옷이다.]
안중근은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사형집행장으로 나아간다. 전옥은 사형집행문을 읽고 유언할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안중근은 다른 유언은 없으나 “나의 의거는 오로지 동양평화(東洋平和)를 도모하려는 성심(誠心)에서 한 것이니 바라건대 오늘 임검한 일본 관헌들도 다행히 나의 미충(微衷)을 양해하여 피아 구별 없이 합심 협력해 동양평화를 기필코 도모할 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어 안의사는 마지막으로 “‘동양평화만세’를 삼창하고자한다”고 하였으나 전옥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사형집행을 명하였다.
다음 글은 안의사의 통역 역할을 한 일본인 소노키 스에키(圓木末喜)가 만주일일신문에 ‘안중근의 최후’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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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최후 - 소노키 스에키(圓木末喜)
부슬비가 내리는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의 사형은 뤼순(旅順)감옥에서 행해졌다. 안은 전날 밤 고향에서 보내온 옷을 입고 예정된 시간보다 먼저 간수 4명의 경호를 받으며 형장으로 불려나와 교수대 옆에 있는 대기실로 갔다. 당일 입은 옷은 상하의 모두 조선에서 만든 명주옷이었다. 저고리는 흰색이고 바지는 검은색이어서 흑백의 분명한 대조가 아무래도 수 분 후면 밝은데서 어두운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수인의 운명과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감개를 느끼게 했다.
집행을 언도하고 드디어 미조부치(溝淵)검찰관, 구리하라(栗原)전옥(형무소장), 소노키통역, 기시다(岸田)서기가 교수대 앞에 있는 검시실(檢屍室)에 착석하자 안이 대기실에서 끌려 나왔다. 구리하라 전옥은 안에게 “금년 2월24일 뤼순지방법원의 언도와 확정명령에 따라 사형을 집행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소노키의 통역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전옥은 다시 한번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안은 “아무 것도 남길 유언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의 유지를 도모할 것을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간수가 반장짜리 종이 두 장을 접어 안의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천을 씌웠다. 안의 최후가 일각일각 다가왔다.
재판 당초부터 언도 이후까지 안을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했던 관헌은 안이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는 마음껏 최후의 기도를 하도록 허락했다. 안은 전옥의 말에 따라 수분 간 묵도(黙禱)를 했고 기도가 끝나자 수명의 간수에 둘러싸여 교수대로 향했다. 교수대의 구조는 마치 2층 집 같아서 작은 계단 7개를 올라가면 화로방 같은 것이 있는데 안은 조용히 걸어서 한 계단 한 계단 죽음의 길로 다가갔다. 그때의 감정이나 얼굴색은 흰옷과 어우러져 더욱 창백했다. 드디어 안이 교수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자 옥리 한명이 그의 목에 밧줄을 감고 교수대 한쪽을 밟으니 바닥이 ‘꽈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10시15분 안은 완전히 절명했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1분이었다.
보통 사형수의 유해는 좌관(座棺)에 넣은 것이 관례였으나 특별히 안(의사)을 위해서는 새롭게 송판으로 침관(寢棺)을 만들어 시체를 넣고 그 위를 흰 천으로 씌워 매우 정중하게 취급했다. 일단 이 관을 교회실에 넣고 안이 형장에 갈 때 품고 있던 예수의 상은 관 양쪽에 걸었다.
안의 공범자인 조도선(曺道先) 우덕순(禹德淳) 유동하(柳東夏) 등 3명은 교회실로 불려와 안의 유해를 향한 최후의 고별을 허가받았다. 세 사람은 모두 천주교인이 아니어서 조선식으로 두 번 절을 하며 안의 최후를 조문했다. 그들은 모두 감격한 듯 했고 그 중에서 우덕순은 하얼빈 이후 안중근의 소식이 끊겼는데 최후의 고별을 하게 돼 안도 만족할 것이라며 당국의 취급에 감사했다.
이리하여 시체는 매우 정중한 취급을 받으며 오후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공동묘지에 묻혔다. 두 동생은 안중근의 죽음을 듣고 “아이고”라고 외치며 통곡했다. 그들은 시신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안된다는 말에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해서 26일 오후 5시 뤼순발 열차로 안동현을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출전 : 만주일일신문 1910ㆍ3ㆍ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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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전하기에 안의사의 최후 장면을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의심할 수도 있지만 달리 그 순간에 가까이에서 목도(目睹)한 조선인은 아무도 없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최후의 순간을 상상해본다. 사형집행의 순간이지만 가슴 뭉클한 감격과 경외심이 일어난다. 다만 소노키의 말대로 침관으로 모시고 정중하게 장례와 발인의 예를 거쳐서 공동묘지에 묻었다면 의사의 유해를 찾을 길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라도 속히 그의 유언대로 조국의 땅으로 모셔 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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