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안중근 의사의 삶과 《논어》의 교훈
1. 그의 탄생과 군자로서의 삶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서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안인수는 일찍이 진해 현감을 지내며, 자선가로서 도내에 명성이 자자했으며, 부친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8, 9세에 사서삼경에 통달하였고, 13, 4세에 과거공부를 하고 사륙병려체를 익혀 선동(仙童)이라 불리며 널리 명성이 자자했으며, 18세에 과거에 올라 진사가 되고 조씨와 혼인하였다. 그해 1879년 9월 2일에 장남 중근이 태어났으니, 중근은 명문 선비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중근은 태어날 때에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과 같이 일곱 개의 점이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중근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고 하여 응칠(應七)이라는 아명을 지어 불렀다.
부친 안태훈은 박영효 등의 개화파 정변(갑신정변)으로 선진문명탐방 해외 유학생 70명에 선발되었으나, 개화파 정권이 삼일 만에 무너지는 바람에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안태훈도 숨어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신천군 청계동 산중으로 이사하였다. 이때의 중근은 6, 7세로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서당에 들어가 팔구년간 한문과 보통학문을 익혔다. 중근은 어려서부터 줄곧 사냥을 즐기며, 학문보다는 장부로서 세상에 이름을 떨칠 뜻을 품었다. 하도 학문에 힘을 쓰지 않자 부모와 교사들이 크게 꾸짖기도 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 친구들이 타일렀을 때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 말이 옳다. 그러나 내 말도 좀 들어보아라. 옛날 초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자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라고 했는데 만고 영웅 초패왕의 명예가 오히려 천추에 남아 전한다. 나도 학문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너희들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 너희들은 다시 더 나를 설득하지 말라.”
그는 장부의 기상과 의리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학문을 등한시하고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랬었다면 어찌 학교를 설립하고 옥중에 그 많은 유묵(遺墨)을 남길 수 있었겠으며,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수 있었겠는가? 중근이야말로 학덕과 무예를 연마하여 문무를 겸비한 군자 중의 군자요. 장부 중에 대장부임을 알 수 있다.
1894년 16세에 김아려와 혼인하여 이후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다. 사이비 동학당, 훗날 일제의 앞잡이인 일진회(一進會)의 전신에 맞서 부친 안태훈이 의병을 일으킬 때, 부친을 따라 출전하여 선봉 겸 정탐독립대가 되어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후 큰 병에 걸렸으나 두서 달 만에 소생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 무렵에 부친의 초청으로 청계동에 온 백범 김구와 상면하게 된다.
17, 8세 때에 그는 하도 바른 말을 잘한다 하여 ‘번개 입[電口]’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그때의 중근 자신의 모습을 《안응칠 역사》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내 나이 17, 8세의 젊은 나이로 기골이 장대하여 무슨 일이든지
남에게 뒤지지 않았다. 특성으로 평생 즐겨하든 일이 네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친구와 의를 맺는 것이요(親交結義)
둘째는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요(飮酒歌舞)
셋째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이요(銃砲狩獵)
넷째는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騎馳駿馬)”
요새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놈팡이들 짓이라 비난하겠지만, 중근은 시대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자신이 할 일을 대비한 듯하다.
1895년 10월 안중근(17세)은 을미사변이 발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때부터 중근은 나라를 구할 방도를 찾기 시작하며 항일 운동의지를 키워나갔다.
1897년(19세)에 중근은 프랑스 선교사 홍요셉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도마[多默ㆍThomas]라는 세례명을 얻는다. 홍신부를 도와 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전도하고 군중들 앞에서 연설도 하였다. 24세에 장녀, 25세에 장남을 얻는다.
1905년(27세) 러일전쟁이 가속되면서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였다. 부친과 상의하여 독립기지 건설을 위해 산둥지역을 두루 살펴보고, 상하이의 민영익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려 여러 차례 찾아갔으나 만나주지 않아 크게 욕을 퍼부으며 꾸짖고 돌아섰다. 대신 상하이에서 만난 프랑스인 곽신부의 ‘이천만 동포와 함께 본국에서 활동하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으니,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 네가 할 일을
1906년 중근은 가족과 함께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에 이사를 하고 살집을 지어 집안을 안정시킨 후에 남은 재산을 출연하여 두 곳에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웠다.
1907년(29세) 중근은 재정마련을 위해 평양에서 석탄광산 사업을 시작하고 미곡상을 운영하였으나 일본인의 방해로 모두 실패하였다. 서울에 체류하면서 안창호 등과 교류하면서 향후 계획을 도모하였으며 서북학회에 가입하였다. 7월에는 국채보상회 가담하여 나라 빚을 갚는 일에 앞장섰다. 그 해 7월에 일제는 강제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급기야 정미 7조약으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대한제국의 내정군마저 박탈하였다. 이에 2천만 국민들이 격분하여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9월 중에 간도에서 고통 받는 동포들의 실상을 보고 의병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10월 말경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였다.
1908년(30세) 중근은 동의회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회장 이위종, 부회장 엄인섭에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6월에는 홍범도를 만났다. 중근은 연합의병부대의 운영장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이끌었으나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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