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제주43사건

19473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43일에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9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관군 등 3만 여명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 43사건은 한국 근현대사에 큰 고통을 남긴 상처이다. 아직도 그 상처는 다 아물지 못하고 응어리도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그냥 제주 43’으로도 부르고, ‘제주 43사건으로도 불린다. 한마디로 정리하기에 참으로 복잡하다. 그래도 21세기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꿈꾸면서 제주 43사건의 상처를 그냥 묻어버리고 지울 수는 없다. 고통 받은 영령과 유족과 지역주민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빌며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43사건의 과정 주요 일지

1947. 3. 1 : 미군정 시절, 3·128주년을 맞아 제주북국민학교에서 기념식을 마치고 군중은 시가행진을 하였고, 관덕정 앞 광장에서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에 차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수습과 사과 없이 지나가는 기마경찰을 쫓아 일부 군중이 돌멩이를 던지며 쫓았고,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이 군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는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강경 진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유투브] 3.1절 발포사건 70주년
https://www.youtube.com/watch?v=FFAZZRzANW4&t=28s

1948. 4. 3 : 새벽 2시를 전후하여 350명의 무장대가 미군정 치하의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와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경찰 4명과 민간인 8, 무장대 2명이 사망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남한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반미 구국투쟁을 무장봉기의 기치로 내세웠다. 이때부터 폭력은 다른 폭력을 불러오고 사건은 점점 미궁에 빠지면서 방화와 탈취와 살인과 학살로 이어졌다. 분노의 골은 더 깊어졌다.

1948. 5. 10 남한 단독 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고, 미군정은 강경진압을 계속하면서 6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이마저도 무산되었다. 이후 남쪽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같은 해 99일에는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던 해, 1017일 제주 해안선으로부터 5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포고문에서 언급한 해안선으로부터 5이외의 지점은 한라산 등 산악지역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해변을 제외한 중산간 마을(한라산 해발 200m~600m사이의 지역) 전부가 해당하여 통행금지란 결국 거주를 금지한다는 의미였다. 11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1949. 1. 17 토벌대에 의한 북촌사건이 발생하여 주민 약 400명이 학살되었으며, 10. 2 군법회의 결과 사형 선고된 249명이 총살되고 제주 비행장 인근에 암매장 되었다. 이후 1950. 6. 25부터 1953. 7. 27까지 동족상잔의 6.25 전쟁 중에도 제주 43사건은 진행되었다.

 

1954921: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19473·1절 발포사건과 1948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77개월 만에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제주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2000년에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2003년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다. 20051월에 제주도는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고 2014년에서야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