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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융건릉)-정조의 부, 사도세자

by 문촌수기 2020. 11. 24.

융릉(隆陵) : 추존 장조의황제(사도세자)와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의 능
추존 장조의황제 莊祖懿皇帝
(1735-1762, 사도세자)는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의 생부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글과 시를 잘 지었고, 무예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 (대리청정)를 보게 되며서 노론정권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급기야 영조 38년(1762) 나경언의 고변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된 후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곧 이를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조는 즉위 후 존호를 장헌세자라 올렸으며, 광무 3년(1899) 장종莊宗을 거쳐 장조의 황제로 추존하였다.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1735 1815, 혜경궁 홍씨)는 영풍부원군永興府院君 홍봉한의 딸로 영조 20년(1744) 왕세자빈에 책봉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혜빈에 봉해졌고, 정조 즉위 후 혜경궁으로 칭호를 올렸다. 이후 자전적 회고록인 《한중록》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광무 3년(1899) 헌경왕후王后를 거쳐 현경의황후로 추존하였다.

 

융릉, 연꽃봉오리와 연잎 모양의 인석
융릉 앞, 곤신지. 일반적으로 왕릉에서 보기 드문 원형 연못이다.
금천교
융릉, 홍살문과 정자각
융릉의 능침, 문ㆍ무석인이 한계단에 있다.
문석인
무석인
무석인의 뒷모습, 투구와 갑옷의 무늬가 섬세하다

 

혼유석과 귀면
고석의 귀면, 섬세ㆍ화려ㆍ선명하다

 

병풍석과 인석

 

장명등
망주석ㆍ세호
세호 細虎 - 이름대로 '작은 호랑이'를 닮은 듯하다.

* 인석: 병풍석의 구성요소 중에 인석은 병풍석 상단의 만석을 제자리에 있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기다란 사각기둥 형태로 열 두 귀퉁이에 튀어 나와 그 끝에는 국화, 규화(접시꽃), 모란 같은 꽃들로 장식되어있으며, 『세종오례의』에 언급 되어 있다.
*세호(細虎): 망주석의 가운데 기둥에는 세호(細虎)가 새겨져 있다. 세호는 중국의 망주석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세호의 한자의 뜻풀이대로 하면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나, 실제는 호랑이 모습과 닮지는 않았다. 세호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국조상례보편』(1752)에서 인데, “세호를 조각하여 왼쪽의 망주에는 오르게 하고 오른쪽의 망주에는 내려가게 하였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즉,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에 보이는 명칭인 ‘세호’는 그 정체나 새긴 목적이 밝혀지지 않아 상징성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장식화 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구멍이 막혀 있으며 꼬리가 긴 동물이 조각되었다. 또한 세호가 동물의 형태로 바뀌며 운동성이 생겼는데, 대체로 좌승우강(左陞右降)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망주석 명칭

 




융릉 곤신지에 연잎이 덮혀있다.

 

<조선왕조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뒤주의 비극 속에 가려진 아버지의 마음”(추존 장조 - 사도세자)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자결하라!"

영조의 노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격해졌다. 땅에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선 피가 흘렀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영조의 노여움은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려만 달라는 세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영조는 끝내 명을 내린다.

"세자를 폐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깊이 가두라!"

『영조실록』 권99, 38년(1762) 윤5월 13일의 기록이다. 역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사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비극을 실록은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 사로잡힌 나머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세상 단 하나뿐이었던 아들, 더욱이 대리청정을 시켰을 정도로 기대가 크고 귀하게 여긴 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맏아들 효장세자를 일찍이 떠나 보내고 7년 간 후사가 없어 애태우던 영조는 마흔 둘에 이르러 아들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러니 영조의 아들 생각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즐겁고 기쁜 마음을 어찌 말하랴! 내전에서 아들로 취하고 원자의 호를 정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겠는가? 즉시 이를 거행해 종묘와 사직에 고하도록 하라.”
-『영조실록』 권40, 11년 1월 21일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왕위를 물려줄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조금도 망설임 없이 사도세자가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하고 신하들에게 온 정성을 다해 교육에 힘써줄 것을 부탁했다.
세자가 3세이였던 영조 13년 '세자가 이미「효경』을 읽고 글을 쓸 줄 알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세자가 썼던 글이 '천지왕춘' 이다. 이에 놀란 여러 신하들이 앞 다투어 나와 세자의 글을 하사하여 줄 것을 청하니, 영조는 기쁜 나머지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하며 세자의 재간을 보았다고 하고 그 후에도 영조는 여러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 세자와 동행해 세자가 쓴 글씨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영조 역시 아들의 재능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여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세자의 대리청정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노론이 외면한 시도세자의 대리정정이 순탄할 리 없었고,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괴이한 행동을 하던 사도세자는 끝내 영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히게 한 죄목은 다음과 같다. 정신질환으로 궁녀를 죽인 것, 여승을 궁녀로 만든 것, 그리고 아무도 몰래 20여일 동안이나 관서지방을 유람했던 수상한 행동을 한것.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일 뿐, 그 이면에는 더욱 무서운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처단해야 했던 아버지의 비극 또한 잠들어 있다. 왕과 세자이기 전에 부자 사이였던 두 사람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더욱 가슴 시린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임금이 열 살이 된 세자에게 묻기를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 하니, 세자가 한참 동안 있다가 대답하기를 "싫을 때가 많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의 이 말은 진실한 말이니, 내 마음이 기쁘다." 하였다.
영조실록, 권60, 20년(1744)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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