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靖陵)ㆍ조선 제11대 중종의 능
정릉은 중종의 단릉單陵이다. 서울 강남구의 선정릉 능원에 같이 있다.
중종中宗(1488~1544, 재위 1506~1544)은 제9대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이후 1506년 박원종元宗 등이 연산군山君을 폐위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을 등용하여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고,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새로운 향촌질서를 확립하였다.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였고,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여 국방체제를 정비하였다. 재위 39년에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의 능침은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石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원래 정릉은 중종이 세상을 떠난 후 1545년(인종 1)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고양 서삼릉) 서쪽 언덕에 등을 조성하고 정릉이라 하였다가, 1562년(명종 17)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능을 옮겼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침이 풍수상 좋지 않아 등을 옮겨야 한다고 했으나, 사실상 문정왕후 본인이 중종과 묻히기를 원하여 등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옮긴 정릉이 홍수 피해가 잦자, 문정왕후의 능은 현재의 태릉泰陵에 조성하였다.
추존왕릉과 왕후릉을 제외하고 왕릉으로 단릉인 것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단종의 장릉 그리고 여기의 정릉 뿐이다.
불행히도 중종은 세 명의 왕비들과 죽어서도 멀리 떨어져있다.
첫번째 왕비는 열 아홉살에 왕비가 되었다가, 고모가 연산군의 부인이었던 까닭에 7일 만에 폐위된 단경왕후이다.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과 드라마 '7일의 왕비'의 주인공이다. 단경왕후는 영조 때에 복위되고, 양주 온릉에 묻혀있다.
한해가 지났건만 겨울에 들면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서울과 수도부리는 다시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서도 시만들은 마스크를 쓰고 강남 도심 속의 숨터(쉼터 그 이상의)와 같은 왕릉의 숲을 찾았다. 출입구에서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한방향 걷기 안내에 따라 정릉부터 탐방한다.
선정릉은 서울 강남의 중심에 있다보니 산보다 빌딩 숲이 더 높다.
참도(향로와 어로) , "향로香路~제향을 지낼 때 혼령을 위한 향이 지나가는 길입니다. 밟지 마시고 오른쪽의 낮은 어로(임금의 길)을 이용바랍니다."
친절한 안내판은 역사산책길에서 예의도 지키고, 문화재도 지키도, 좋은 공부도 된다.
정릉 기신제 ;12월 9일
절차; 행렬-전향축례-취위-국궁사배-진선-초ㆍ아ㆍ종헌례-망료-예필
제례 상세 절차
준비의식- 궁궐
예조에서 제관 선정
제례를 행하기 전 임금과 신하가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재계(산재2 일, 치제1일)를 함
전교서에서 축문을 작성하고 왕의 서명을 받아 향축을 전달.
준비의식- 왕릉
임금의 행렬이 궁궐을 나서서 왕릉에 도착하는 행차 의식(거가출궁)
제관들이 재실에서 홍살문까지 이동
홍살문 앞 전향석(향로 香路)에서 전향축례를 행함
제관이 사배하고 손을 씻고 정해진 위치에 나아가는 의식
임금이 제향을 행하기 위해 소여(小輿)를 타고 홍살문 앞에 도착하여 소차(小次)로 들어가는 의식
제례의식
제례 의식 전 전사관(典祀官)과 능사(陵司)가 제수를 진설하는 의식
왕이 정자각의 판위(版位)에 북쪽을 향하여 서는 의식
제관이 손을 씻고 정해진 위치에 나아가는 의식
신에게 초헌관(왕), 아헌관(왕세자), 종헌관(영의정)이 네 번 절하는 의식
왕이 제주를 따르는 것을 살펴보는 의식
신을 모시기 위하여 향을 세 번 피우는 의식
초헌관이 첫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는 의식
축문을 읽는 의식
아헌관이 둘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는 의식
종헌관이 셋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는 의식
신을 보내기 위하여 네 번 절하는 의식
제례에 쓰인 축문을 태우는 의식
임금의 행렬이 다시 궁궐로 돌아가는 행차 의식
전사관과 제관들이 제찬을 거두는 의식
기신제 진설도
선정릉 재실과 오백년 은행나무
이야기 더하기 :
[문정왕후의 질투와 정릉의 천장]
~<신의 정원 조선왕릉>, 이창환. 가져옴
인종은 중종이 위독할 때 늘 먼저 약을 맛보고, 잠자리를 살피는 등 효성이 지극했지만 병약하였다. 상주인 인종의 옥체가 좋지 않으나 수차에 걸쳐 산릉행차를 주장한다. 결국 능역 조영 한 달 후 배알하였다. 인종의 지나친 효심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종은 재임 8개월 만에 31세로 승하했다. 인종은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기록하고, 아버지 중종의 능 옆에 안장됐다.
중종의 능은 오늘날 경기도 고양 서삼릉(西三陵) 능역에 있는 제1계비 장경왕후 (인종의 생모) 윤씨의 능인 희릉 오른쪽 언덕에 동원이강릉으로 모시고, 정자각은 가운데 이설한다. 능호를 정릉 (靖陵)이라 고쳤다. 처음에는 시호를 국가 중흥의 공이 크다 하여 중조(中祖)로 하고자 했으나, 폐왕 연산이 아니라 성종의 대를 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종으로 결정하였다.
인종의 뒤를 이어 동생 명종(明宗: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은 중종이 묻힌 정릉 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일찍이 세조가 며느리 장순왕후의 공릉 터를 잡으면서 직접 이곳에 와 보고 좋은 땅이 아니다 했으며, 당대 최고의 풍수가인 임원준도 불길하다고 했음을 이유로 사림과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62년 8월 22일 정릉을 천장한다. 오늘날 서울 강남구 삼성동이다.
이때 문정왕후와 봉은사 주지 보우가 은밀히 계획하여 봉은사 곁으로 문정왕후에 의해 명종 때 옮긴 것이다. 구릉 터가 득수득파(得水得破)가 좋지 않아 옮긴다는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문정왕후 후손의 번영을 위한
신후지계(身後之計 : 죽은 뒤 자손을 위한 계획)였다.
산릉 일에 승군이 동원된다. 이때는 세종의 외손 임꺽정이 반란을 일으켜 정국이 혼란하여 임꺽정 수배령이 내려졌다. 천릉 후 능호를 정릉이라 하고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으로 다시 고치고 정자각은 원래의 위치에 이설하였다. 이때 신하들은 정자각을 옮기는 것도 성령을 편안치 않게 하는 것인데 18년이 된 중종의 능침을 천장하는 것을 한탄하며 말없이 순종하는 좌의정 총호사 이준경을 들어 '저따위 정승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한탄한다. 신하들이 문정왕후의 압력에 못 이겨 명종이 억지로 천장하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까닭없이 능을 옮기니 백성들도 한탄했다고 한다. 제2계비였던 문정왕후가 사후 남편과 묻히고자, 억지로 제1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과 아들 인종의 효릉으로부터 한강을 건너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옮겼다.
천릉 후, 애달픔이 사림의 울음으로 변했고, 밤이면 경기도 고양에 있는 희릉 숲 속의 울음소리가 한강 건너 정릉까지 이르렀으며, 안개가 세능을 감싸고 구름 속을 떠다녔다고 한다. 모두 정릉의 천장을 슬퍼하는 이야기들이다. 사림들은 "고금을 막론하고 유명을 달리한 남편의 무덤을 옮겨 전처의 무덤과 멀리 떨어지게 하는 투기는 듣지 못했다”며 한탄한다. 천릉 때 한강을 건너는데 비협조적이었던 수원목사가 하옥되고, 경기감사는 파직됐으며, 선창(船槍)들도 협조하지 않아 벌을 받는 이가 속출했다. 천장 후 문정왕후가 선릉과 정릉에 친제를 행하려 하나 조정에서 후비 혼자서는 제례를 할 수 없다 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종의 능을 어렵게 옮겼으나 이곳은 지세가 낮아 장마 때마다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다. 구정릉을 옮긴지 3년이 되었으나 특별히 나아진 것이 없고, 3년 내 변고가 두 번이나 있었다며 명종은 또 다시 천릉하려하나 이루지 못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다. 그토록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으나 정릉이 물이 차고 변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문정왕후는 태릉(泰陵)에 단릉(陵)으로 안장되었다.
정릉의 상설은 아버지 성종의 선릉과 장경왕후의 희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며, 문·무석인 얼굴의 퉁방울 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임진왜란 당시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석호의 익살스러운 입 모양은 보는 사람의 호감을 갖게 한다.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의 가치]
많은 개발 압력 속에도 도심을 지켜 온 조선왕릉은 역사경관림으로서 세계유산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선릉과 정릉 주변 지역은 1970년대에 집중 개발되면서 고층 빌딩이 들어서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세계문화유산 실사자도 빌딩 숲과 야경을 보고 감탄했다. 선 · 정릉은 특별히 저녁 9시까지 개장(3월~10월)해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
조선 왕릉은 오랜 세월을 이어온 한국인의 자연관과 장례문화, 40기의 왕릉을 온전하게 보존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다른 나라 왕릉 관리인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왕릉 관리의 어려움으로 도굴을 꼽는다. 세계 학자들도 우리나라 왕릉에 대해 이 문제를 많이 염려했다.
그러나 조선 왕릉은 능역 조영 간소화와 회격실 구조 덕분에 지금까지도 온전히 보존됐음을 확인하고 우리의 보존관리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곳 선 · 정릉만은 예외다.
[임란 중에 왜군에게 도굴 훼손되는 수모]
|1593년 4월 13일 선조 일행이 평안도 가산을 출발하여 박천(川), 안주(安州)에 도착했다. 왜군이 쳐들어와 임란중이었다. 경기좌도관찰사 성영(成泳)이 선릉과 정릉이 파헤쳐져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다고 보고하면서 속히 경성을 수복하자고 한다. 1592년 8월 태릉과 강릉도 왜적 50명과 동원병 50여명이 도굴하려 했으나 회격이 단단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선·정릉은 왜군의 손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선조의 증조부모(선릉)와 조부모 (정릉과 태룡), 친부모의 묘 등 조상의 유택이 파헤쳐진 것이다. 전쟁 통에 일어난 변고라 조정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선릉 왕의 능침과 왕비 능침은 광중에 불이 나서 전소됐고, 정릉 현궁은 소실돼 훼손되고, 소실되지 않은 옥체가 있어 중종의 옥체인지 가리고자 송산(松山)에 옮겨져 진의 여부를 가리기 위해 수차에 걸쳐 현직 신
하와 중종 때 신하들과 궁인들을 불러 확인하나 유체가 훼손되고 오래되어 확인이 어렵게 된다. 이때 송산의 유택을 확인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정철, 이항복, 이덕형 등이 심혈을 기울여 확인하나 신빙성이 없어 결국
미확인 옥체는 관에 넣어 깨끗한 곳에 묻었다. 그리고 정릉 광중에 있던 옥체인 성종과 정현왕후, 중종의 유골은 소실된 유회와 재흙을 수습해 각각의 현궁에 봉안하였다.
1593년 7월 27일 임란 중 선조에 의해 선릉이 개장되었다. 이후 9월 29일 선조가 한성에 입성하여 선·정릉을 봉심하였다. 소실된 지석과 옥책은 전주 사고의 실록을 보고 재작성했다. 이렇게 문정왕후의 투기와 법석으로 천장을 하고 병풍석으로 둘러친 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梓宮)이 불타는 변고를 겪었다. 만약 세조의 유시대로 회격실로 조영하고 난간석을 설치했다면 어땠을까?? 때늦은 유감일 뿐이다. 정릉은 조선시대 왕릉 중 바로 옆의 선릉과 더불어 유일하게 도굴되는 수모를 당한 능이다. 특히
중종의 정릉은 천장해 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문정왕후가 정성들여
만든 능원이라 그 견고함이 대단했음에도 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광주목사는 하옥되고 경기관찰사는 파직된다. 변고 후 정릉을 옛 터(고양)로 다시 옮기자는 주장도 나왔으나 현장에 재봉안했다.
*광중(壙中): 시체나 관을 묻는 구덩이 속. 광내(壙內). 둔석(窀穸). 지실(地室). 지중이라고 함.
*현궁: 임금의 재궁(梓宮)을 모신 광중(壙中). 현실(玄室)이라고도 함.
*재궁(梓宮): 황제 또는 왕, 황후나 왕후의 관
[정릉의 원찰, 봉은사]
정릉의 원찰인 봉은사는 보우가 주지로 있던 사찰로, 794년 연회국사가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이후 1498년(연산군 4년)에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개칭하였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국가 통치철학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택했으나, 정작 왕실에서는 왕실의 종교로 불교를 믿어왔
고, 능원을 조영할 때 선왕의 안식과 왕권의 영원성을 위해 사찰을 지었다. 이것이 능침사찰이다. 능침사찰은 조선 초기에는 능원마다 한 곳 이상 씩 두었다. 태조 건원릉의 개경사, 신덕왕후 정릉의 흥천사,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의 신륵사, 세조와 정희왕후 광릉의 봉선사, (융릉의 화성 용주사)가 대표적이다.
억불숭유정책의 논리 속에 불교는 성행하지 않았으나 특히 중종 때 문정왕후는 정릉을 삼성동으로 천장하고 두부를 만든다는 이유를 대서 봉은사를 중건하고 번성케 하였다. 이때 봉은사 주지 스님을 병조판서에 앉히고, 조선시대 내내 시행하지 않던 승과시험을 부활하였다. 그리고 승과시험을 봉은사 앞에서 행하기도 했다. 능침사찰은 두부를 만드는 조포사(造泡寺)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능원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두부는 스님 두 분이 만든다. 제례 중 두부가 쉽게 변질 부패해 능원 근처의 스님들이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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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포사(造泡寺) : 조선시대에는 산릉을 모시면 반드시 근처에 제사 음식을 공급하기 위한 절을 지었는데 이를 조포사라 함.
https://weekly.donga.com/List/3/all/11/90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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