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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미술

마지막 낭만주의자, 라흐마니노프

by 문촌수기 2023. 10. 25.

더 높은 하늘, 시원한 바람, 참 좋은 가을. 중앙공원 단풍이 예쁘게 물들었다. 그 바로 앞의 부천아트센터. 아침 일찍 헬스장 들러 간단히 운동하고 둘이서 강연 시간에 맞춰 길을 나섰다.
오늘은 라흐마니노프 음악을 감상하며 그의 생애를 음악평론가 조희창 선생의 강연으로 듣는 좋은 시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러시아에서 태어나, 광기(狂氣)의 20세기 전반을 살면서도 낭만을 지켜온 '마지막 낭만주의자(Last Romantist)' 라흐마니노프.

그의 첼로소나타 3악장(Op19)은 이 가을 맑은 하늘과 낙엽에 너무 잘 어울린다. 첼리스트 얀 포글러(Jan Vogler)와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
(Hélène Rose Paule Grimaud)의 연주가 아름답다. 아니 그 보다 영상이 더 매력적이다. 문득 첼로 주제가락에 노랫말을 붙이고 가을 산책길을 걸으며, 흥얼거리고 단풍과 햇살과 바람을 즐기고 싶다.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 물들어가는 숲사이로 걸어가는 노년의 뒷 모습에 마음 흡족해진다.

https://youtu.be/SvoKzdw6wIo?si=vvqJQTWhVvYVrro6

강연중 소개된,
영화 <샤인> 중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

미치지 않으면 연주할 수 없다는 곡이란다. 주인공은 "전 충분히 미쳤어요"라며 연주를 준비한다.
연주하는 날, 스승은 제자에게 말한다.
"내일은 없다고 연주하게."
허허허 ~~
둘 다 내가 즐겨 했던 말이다.

https://youtu.be/Th157m9Vmfo?si=feVM9dcz-fFORkW1

<부천아트센터 알쓸클잡 #2>
조희장 음악평론가 강연 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Sergei Rachmaninov, 1873~1943 러시아)

마지막 낭만주의자
"음악에 한 인생은 충분치 못하다.
그러나 한 인생에는 음악이면 충분하다."


귀족의 후예
라흐마니노프의 가문은 15세기 모스크바 대공 때부터 시작된 뼈대 있는 귀족 집안이었다. 고위 장교와 명망 있는 지주들을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아버지 바실리는 이 모든 재산과 명성을 몽땅 날려버리고 결국은 아내와 여섯 명의 자식까지 버린 인물이었다. 그때 라흐마니노프의 나이 아홉 살이었다. 어머니는 먹고살기 위해 자식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이주한다.
어머니는 공부에 게으른 아들을 당시 최고의 피아노 선생 중의 한 사람인 니콜라이 즈베레프(Nikolai Zverev, 1832~1893)에게 맡겼다. 모스크바음악원 교수인 즈베레프는 가난하지만 재능이 엿보이는 아이들을 골라서 혹독하게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곳에서 라흐마니노프는 스파르타식 피아노 교육을 받는다.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스승에게 금시계를 물려받았다. 그는 그 시계를 평생 사용했을 정도로 스승 즈베레프를 존경했다.

교향곡 1번의 상처
그는 피아노와 함께 작곡을 배웠고, 1891년에는 자작곡 <데우스 메우스>의 연주회에서 직접 지휘를 했다. 젊은 라흐마니노프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인물은 역시 차이콥스키였다. 피아니스트가 되어야만 한다는 스승 즈베레프 뜻과는 다르게 차이콥스키 같은 작곡가가 되기 위해 스승을 떠나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음악원 졸업시험에서 교향곡 <젊음>과 오페라 <알레코>를 제출해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고상을 받게 되면서 그는 드디어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1897년에 야심만만하게 교향곡 1번을 작곡했고 3월 27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추앙받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Alxender Glazunov, 1865~1936)의 지휘로 이 곡을 초연했다. 그러나 초연은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나중에 글라주노프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글라주노프가 리허설을 마치고 너무 많은 술을 마셔서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그날 밤 라흐마니노프는 도시를 방황하며 저주받은 공연을 곱씹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신문에 혹평이 이어졌다. 당시 러시아 5인조 중의 한 사람인 세자르 큐이는 <누벨 상트페테르부르크>지에다 "지옥에 음악원이 있다면, 거기서 가장 뛰어난 학생에게 '이집트에 내려진 10가지 재앙'을 주제로 한 교향곡을 써달라고 했다면, 아마도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과 같을 것이다"라고 어마어마한 혹평을 썼다. 음악원 최고상을 받으며 졸업한 스물네 살의 청년 라흐마니노프는 엄청난 충격을받았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교향곡 1번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악보는 그의 책상 서랍에 봉인되어 있다가 그가 죽은 후 발견되어 1945년 모스크바에서 재상연되었다.

잘할 수 있을 거야!
교향곡 1번 초연 실패 후 라흐마니노프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한 채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내 속에서 뭔가가 부러져버렸다. 여러 시간 스스로 질문하고 반성해 본 결과, 나는 작곡을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깊은 무감각의 세계에 빠져버렸다. 낮의 절반 이상을 침대에 누워 파괴된 내 삶을 한탄하면서 보냈다." 밤낮술에 절어 사는 그를 보다 못한 가족은 이 문제를 치료할 의사를 수소문했고 니콜라이 달 박사를 소개받았다. 그는 최면 요법을 이용한 심리 치료의 대가였으며 뛰어난 첼리스트이기도 했다. 그는 라흐마니노프에게 끊임없는 '자기 암시'로 그를 안정시켰다.
"당신은 이제 협주곡을 쓰기 시작할 거예요. 정말 잘 할 수 있어요. 누가봐도 최고의 작품이 될 거예요."라고 속삭였다. 그 속삭임에 얼어붙어 있던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치료를 받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라흐마니노프는 새로운 곡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불멸의 명곡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작품18이 탄생했다.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을 치료해 준 의사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헌정했는데, 이 곡으로 러시아 음악계 최고의 상인 글린카상을 받았다. 그때부터 미국으로 떠나는 1917년까지 작곡가로서 라흐마니노프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러시아를 떠나다.
라흐마니노프는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고 동시에 탁월한 지휘자였다.
1904년에는 볼쇼이극장 음악감독이 되었지만, 이듬해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고 봉건체제에 대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는 통에 감독직을 얼마 못하고 사임했다. 그는 이 불안하고 복잡한 정세 속에서 교향곡 2번, 교향시 <죽음의 섬>, 합창교향곡 <종 Op.35>, 합창곡 <철야기도 Op.37> 같은 명작들을 내놓았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미국으로 가서 초연했는데 엄청난 반응을 몰고 왔다. 그러나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더는 러시아에서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 귀족 가문이자 지주 집안 출신이었다. 게다가 유럽과 미국의 순회 연주로 돈을 많이 벌게 돼 고급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귀족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뒤집히는 혁명의 불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때에 마침 북유럽에서 연주 의뢰가 들어왔다. 라흐마니노프와 그의 가족은 도망가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최대한 단출하게 가방을 챙겨 스웨덴 스톡홀롬과 덴마크 코펜하겐을 거쳐 1918년 11월,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출발하는 미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미국이 준 것과 앗아간 것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외젠 이자이(Eugene Ysaye, 1858~1931), 미샤 엘만(Mischa Elman, 1891~1967), 예프렘 짐발리스트(Efrem Zimbalist, 1889~1985), 요제프 호프만(Josef Hofmann, 1876~1957) 등 그보다 먼저 망명한 음악가들이 잇달아 그가 머무는 호텔을 방문했다. 먼저 와있던 프로코피예프는 환영의 표시로 그의 독주회 프로그램에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을 포함했다. 무엇보다 미국 청중이 환호성을 질렀다. 미국에 온 지 6개월도 안 돼 그에겐 연주 요청과 녹음 요청이 줄을 이었다. 스타인웨이(Steinway & Sons)사는 그를 위해 피아노 한 대를 선뜻 기증했다.

스타이웨이앤선스 피아노

미국에서의 생활은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작품이 더 이상 써지지 않았다. 미국으로 망명해온 1918년부터 15년이 지나도록 그는 작곡에 손을 대지 못했다. 1934년이 되어서야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정도를 쓸 수 있었고, 그 뒤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내놓은 작품은 교향곡 3번, 교향적 무곡 등 몇 편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그는 월간《뮤지컬 레코드»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어쩌면 나태함이거나 아니면 잦은 연주회로 인해 마모되고 피곤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중요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장르의 음악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받아들여 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진정한 이유는 아닐 겁니다. 러시아를 떠나면서 나는 작곡하려는 욕구를 뒤에 버려두고 온 겁니다.조국을 잃어버리면서 나 자신도 같이 잃었습니다. 망명 과정에서 내 뿌리, 내 전통이 떨어져 나가 버렸고, 나를 표현하려는 욕구를 다시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위한 피아노곡
미국에서의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로 인식되었다. 그는 2미터 가까운 키에다 손가락을 벌리면 거의 30센티에 가깝다는 큰 손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의사들은 그가 '마르판 증후군'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파가니니 같은 경우도 비슷한 증상으로 보고 있는데 선천적으로 발육이 이상해지는 병으로 비정상적으로 키가 크거나 관절이 유연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쨌거나 라흐마니노프의 연주 스타일은 누구도 모방하기 힘들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서 살인적인 피아노 연주 일정을 소화해나갔다. 관절염과 요통에 시달리면서도 연주회를 멈추지 않았다. 70세 생일을 앞둔 1943년 초에도 순회 연주를 했다. 통증이 심해진 라흐마니노프는 그해 2월 27일 녹스빌의 테네시대학에서 열린 연주를 마지막으로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3월 28일 70세 생일을 나흘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섬세하고 내성적이어서 신경쇠약에 시달려야 했던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세계는 우수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아이브스, 버르토크 등이 활동하던 20세기를 19세기적 감성으로 살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피아노 교향곡"이라고 말할 정도로 피아노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최대한 드러낸 작곡가였다. 또한, 영화음악을 연상케 하는 세련된 선율과 화려하지만 복잡하지는 않은 관현악법,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짙은 서정미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ㅡㅡㅡ

감상곡 평
전주곡 C#단조
Preludes C# minor Op.3 No.2

라흐마니노프는 열아홉이 되던 1892년에 전주곡 작품 3의 2번 C#단조를 작곡했다.이 곡의 인기가 좋아서 이후 <10개의 전주곡 작품23>을 작곡했고, 다시 열세개의 전주곡 작품32를 작곡했다. 이 전주곡들은 템포를 바꾸어가며, 또한 단조와 장조를번갈아 가며 진행된다. 영웅적인 곡, 춤곡, 녹턴 풍의 곡, 행진곡풍의 곡 등, 곡의성격도 다채로워서 피아노의 보석 상자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그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곡은 역시 C#단조의 곡이다. 곡의 시작부터 라흐마니노프가 좋아한 모스크바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피아노 협주곡 2번
Piano Concerto No.2 C minor Op.18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4개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하다.1901년 11월 9일 알렉산더 질로티가 지휘한 모스크바 필하모니와 라흐마니노프자신의 피아노로 초연했고,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해준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헌정했다. 1악장은 일명 '크렘린의 종소리'로 시작하는 무겁고 장엄한 악장이다. 2악장 아다지오는 '마지막 낭만주의자'라는 라흐마니노프의 별명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All by myself>라는 팝송에 쓰이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3악장 알레그로에선 춤곡풍의 리듬으로 시작하여 환희의 클라이맥스로 돌진한다.
https://youtu.be/DIl38baX_oo?si=CE5jTz67TIQdqyIQ

https://youtu.be/g6eXxHs96v0?si=ASeEwxDqXUmFHDVl

교향곡 2번
Symphony No.2 E minor Op.27
라흐마니노프는 1897년에 야심 차게 초연한 교향곡 1번이 혹평을 받게 되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치료까지 받는 지경에 이른다. 다행히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성공하여 재기하게 되었고, 여세를 몰아 1907년에 2번 교향곡을 작곡했다. 190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에서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지휘를 맡아 초연했으며 대성공을 거뒀다. 그는 이 곡으로 다시 글린카상을 수상했고, 차이콥스키를 잇는 러시아 낭만주의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네 개의 약장이 모두 훌륭하지만, 특히 아다지오로 흘러가는 3악장이 주는 서정미는 일품이다. 에릭 카르멘이라는 가수가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이라는 팝 음악에 사용해서 널리 알려진 악장이다.
~ All by myself
https://youtu.be/g6eXxHs96v0?si=T_0D6r2pHmI5WUpg

https://youtu.be/h-t3Q6s7qvc?si=xs5L6jQsbqCr_29S

https://youtu.be/1cp6AZDNmqU?si=mIrJKQjMts2gXtqX


피아노 협주곡 3번 D단조
Piano Concerto No.3 D minor Op.30

2번 협주곡을 쓴 지 8년 만의 작품으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곡이다. 라흐마니노프 스스로 "코끼리를 위해 작곡했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1909년 11월 28일, 미국 연주 중에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피아노 연주와 발터 담로슈(Walter Damrosch, 1862~1950)가 지휘하는 뉴욕필하모닉의 협연으로 초연되었다. 1악장 '알레그로'에선 슬라브 풍의 멜로디와 카덴차 부분의 가속도가 일품이다. 2악장 '인터메초'는 동양적인 음색이 매력적이며, 3악장 '피날레'는 고난도의 카덴차와함께 박진감 있는 피아노의 돌진을 맛볼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에게 헌정했는데, 정작 호프만은 곡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한번도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라는 피아니스트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 자신만 연주할 수 있는 곡으로 여겼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Op.43
미국으로 이주한 후 작곡과는 멀어진 채 연주 생활만 하던 라흐마니노프가 오랜만에 만든 명작이다. 1934년 스위스의 휴가지에서 작곡했으며 그해 11월에 자신의피아노와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 1882~1977)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 중에서 24번 A단조의 멜로디를 주제로 하여 스물 네게로 된 변주곡을 만들었다. 앞부분 열개의 변주는 빠른 템포로, 11번에서 18번의 변주는 느린 템포로, 그리고 다시 19번에서 24번까지 빠른 템포로 진행한다. 꿈결같이 서정적인 부분과 고도의 테크닉이 요구되는 빠른 부분을 골고루 맛볼 수 있다. 특히 18변주 '안단테 칸타빌레'는 파가니니의 주제 멜로디를 역전시켜서 만든 걸작이다. 외면적으로는 변주곡 형식이지만 실제로는 피아노 협주곡에 가깝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빙하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
https://youtu.be/J5ooLrRKjiE?si=v8Mp0MuAjTTm9ChW


~이탈리아 폴카, 1906
2018 월드컵 갈라 콘서트

~영화, <슬픔의 결실>
Isle of the Dead Dreams
라흐마니노프의 편지 다큐
https://youtu.be/EqEsTQGprlY?si=BFqs-A3w35dn9X0i

교향시 '죽음의 섬'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1908년 작곡한 교향시. 스위스 화가인 뵈클린의 "죽음의 섬"이라는 그림의 흑백 복사본을 보고 감명을 받아 작곡하였다고 한다. A단조의 조성을 띠고 있으며, 라흐마니노프의 오케스트라 작품 중 인지도가 높은 편에 속한다.

죽음의 섬, 1883년, 알테 내셔널갤러리(베를린) 소장

아르놀트 뵈클린 '죽음의 섬'
ㆍ수차례 사별의 아픔 겪었던 뵈클린. 망자를 애도하는 그림 그리며 상처 치유
ㆍ死後 세계를 '침묵의 공간'으로 묘사 /달리·라흐마니노프에 특별한 영감 주기도

~전주곡(Prelude) op3-2
The bell of Moscow
예브게니 키신 1971
요람에서 무덤까지 러시아 인들은 종소리와 함께 살다.

~Op 23-5 alla Marcia,  욜가 셰프스
~ 피아노 협주곡 2번 & All by myself
  Eric Carmen
영화 <셉템버 어페어>
마츠예프, 조성진

~교향곡 2번 3악장,1907
pop>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
https://youtu.be/1cp6AZDNmqU?si=yrGfVoFoIhsRrJy5

https://youtu.be/DyeMWBXu6-Q?si=XDGGBFNU03Mx_pE8

https://youtu.be/59cLZSkkjPA?si=Cn8TIVyYvf518HdW


~보칼리제 / 14개 성악곡
전자악기 teremin & piano
테레민이라는 악기는 처음 듣고 본다.

https://youtu.be/7xqExxtwx40?si=s1yCNe_s5sUYLCm5

~ 파가니니 주제의 의한 광시곡
제 18번 변주
차이콥스키 빙하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
안단테 칸타빌레
~피아노 협주곡 3번 D단조
영화 샤인,

중앙공원 앞 부천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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