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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미술

화가 장욱진과 藝술

by 문촌수기 2023. 11. 8.

술을 잘 못하는 나는 술을 멋있게 잘 마시는 사람이 부럽다. 주정부리지 않고 좌중을 흥겹게 하며, 그러면서도 말 많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끝낼 줄 알며, 이튿날이면 아무런 일도 없었던처럼 맑게 깬 모습을 보이는 이가 정말 멋있고 부럽다. 술 중에 최고의 술은 '예(藝)술'이란다. 술과 예술은 통하니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술과 예술의 신,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박쿠스-로마의 신)는 술의 신이며 감성적 인간의 상징이다. "삶은 예술을 통해서 구원된다"고 말한 니체는 아폴론적인 삶과 디오니소스적인 삶을 겸비할 것을 강조하였다. 나는 이것을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 이해하면서 공감하고 아이들에게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지닌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그러면서 나를 돌아봤다.
'나는...좀 디오니소스적인걸.'

디오니소스(Dionysos)는 어원적으로 두 번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어머니 세멜레의 배에서 한번 태어나고, 아버지 제우스의 허벅다리에서 다시 태어나 ‘두 번(Dio) 태어난 자(nysos)’라는 뜻을 가졌다. 세멜레의 어머니는 하르모니아(Harmonia)이다. '조화'라는 하모니의 어원이 된다. 하르모니아는 아프로디테와 아레스의 딸이다. 아프로디테(Aphrodite, 비너스-로마)는 미(美)의 여신이다. 이렇게 족보를 따지니 결론은 '술+부활과 재생+조화+아름다움'으로 조합된다. 이것이 예술(藝術, arte)을 낳고 예술의 가치가 되며, 예술을 통해 인간은 탁월한 미덕(아레테, arete)을 지니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디오니소스의 탄생, 제우스와 세멜레

화가 장욱진과 술
지난달 아내와 지인들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뮤지움의
장욱진 회고전을 보고왔다. 그의 그림은 언제봐도 편하고 참 좋다. 화가 장욱진은 이렇게 말했다.
“40년을 그림과 술로 살았다.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니까.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버릴 작정이다. 남는 시간은 술을 마시고...
난 절대로 몸에 좋다는 일은 안 한다. 평생 자기 몸 돌보다간 아무 일도 못 한다”

기가 찬 명언이다. 술 마셔서 좋고, 그림 그려 좋고, 그래서 '나날이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다. 그래서 그의 심플함과 천진함은 그대로 그림과 삶 속에서 나타날 수 보다.

장욱진, 일일시호일
장욱진
우산, 1961, 캔버스에 유화, 41× 32


근원(近園) 김용준과 술

성북동 노시산방 주인, 김용준(1904~1967, 호가 근원)은 <근원수필>에서 화가의 습벽 중 술을 논하면서 '술이란 세속적인 흥취보다도 도연히 취하는 가운데서 예술에 대한 정열은 더 뜨거워질 수 있고, 기개는 점점 더 호방해져서 부지불식간에 생각지 않은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술에 의해 예술적 소지를 기를 수도 있고 또 감흥을 얻을 수 있다' 하였다.

이중섭의 그리움과 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최순우(1916~1984)는 김환기(1913~1974)를 회고하는 글에서 동갑내기 이중섭(1916~1956)에 대해 이렇게 썼다.
-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 에서

'부산 피난살이 동안은 서로 집으로 찾아다닐 형편이 못 되어서 대폿집이나 사무실에서 만났는데, 그 무렵 우리 박물관은 피난살이의 무료함도 메울 겸 박물관 부산본부 사무실 한 층을 치우고 국립박물관화랑을 마련해서 국립박물관으로서는 파격적인 '현대 작가 초대전'을비롯해서 현대미술 전람회를 몇 번인가 꾸몄다. 그때 재부산 중진 화가들이 박물관에 자주 모이곤 했는데 이중섭(李仲燮)을 나에게 자주 데리고 온 이도 바로 수화(樹話, 김환기의 호)였다. 이 박물관 화랑에서 두어 번 화가들이 모여 석양배판*을 벌인 일이 있었고, 이중섭이 거나하게 취해서 그 구성진 목청으로 <산타루치야>나 <내 고향 남쪽 바다>를 들려준 것도 그 시절의 일이다. 그때 누구니 누구니 해도 이중섭이나 장욱진을 마음으로 아낀 사람도 수화(김환기)였던 듯싶다.'
(*夕陽杯板: 해질 무렵에 시작된 술 자리)

아! 이중섭...1951년12월에 부산으로 피난촌을 전전하며 가난한 살림살이를 이어오다가 1952년 7월에 일본인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홀로 외로운 처지였지만, 그때처럼 유쾌하게 오래 오래 살아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바닷가의 아이들, 부산피난시절 1952-53년에 그린 그림. 아마도 가난했지만 온 가족이 오손도손 함께 살았던 제주도 서귀포 시절의 행복을 그리워하며, '내고향남쪽바다'를 노래하고,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술로 術을 더해야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술을 잘 못하는 내가 저녁 술자리에서 한문을 잘하는 친구에게 내기를 걸어 공짜 술을 얻어 마신 적이 있다. 소주를 한자로 제대로 쓰면 내가 술을 사고, 못 쓰면 자네가 술을 사라고 했다. 소(燒)자 못쓰는 이가 허다한데 친구는 맞췄다. 그런데 주가 틀렸다.
소주병을 들어 상표를 보여줬다. 소주(燒酎)로 쓰여있다. 물탄 술은 酒라 쓰고, 불로 태워 증류한 센 술은 酎라고 쓴다. 요새는 소주도 많이 싱거워졌다. 물을 많이 타는가 보다. 그러니 이젠 소주(燒酒)라해도 무방하겠다. 酒가 되든 酎가 되든, 술로써 술(術, 예술과 기술)을 해치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