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상풍 : 안중근 의사를 찾다.
동에서 올라 서로 내려왔습니다. 지금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에서 올려바라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경내 - 대한국인 안중근 동상
견리사의 견위수명 - "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의 위기를 보거든 목숨을 드리우라.
- 안중근 옥중 유묵 - 비석
국가 안위 노심 초사
합성산패 만고 정리
안중근 의사 기념관
백범광장 경내의 백범 김구 선생님 동상
독립운동가,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빼앗기자 6형제의 가족 50여 명을 이끌고 남만주에 들어가 사재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 조국해방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1912년 학교를 퉁화 현[通化縣]으로 이전·확충했고, 1913년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하자 베이징[北京]으로 가 위안 스카이[袁世凱] 총통을 만나 한인들의 보호를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1919년 3·1운동 때는 베이징[北京]에서 이동녕·조완구 등과 함께 본국과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4월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법무총장·재무총장 등을 지냈다.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었다.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고, 1942년 재무부장으로 다시 피선됐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귀국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민족진영을 이끌었다. 1947년 정국이 혼란과 대립을 되풀이하고 정당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자 이에 회의를 느껴 일체의 공직과 절연하고 신흥대학(新興大學)을 설립해 육영사업에 전념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초대 부통령에 취임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해 1951년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1951년 대종교(大倧敎) 원로원장을 지냈다. 1952년 민주국민당 후보로 제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1953년 4월 피난지인 부산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국민장으로 정릉(貞陵)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동으로 옮겨졌다. 1949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저서로 〈감시만어〉가 있다.
백범광장에서 돌아본 남산 - 남산 서울 타워 / 서울시 교육정보연구원
회현역/숭례문 방면으로 내려오는 남산공원 - 백범광장의 한양성곽
가을 나들이 나온 가족의 행복 - 서울 도심에 이렇게 아름다운 공원과 역사의 현장을 쉽게 만날 수 있으니 행복하다.
아, 산은 산이요. 사람은 사람이다. 도심 속의 삶은 투쟁이다. 비정규직 교육종사자들의 시위 가두행진
복원 중인, 숭례문
회현역에서 들어간 남대문 시장 - 아직 2시가 안 되었기에 노점상이 들어차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뒤,,....
2시, 늦은 점심, 오랜 만에 줄을 서서 허기진 배를 칼국수로 채웠다.
한순자 할매 칼국수 집 바로 건너편 또, 유명하다는 손왕만두 집 -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을 위해 또 줄을 섰다.
칼국수 먹고 나온 사이, 2시가 되자마자 어디서 나타났는지....노점 리어카들이 행진을 하듯 줄을 지어 오더니만, 금새 길을 채우고는 전을 펼쳤다. 어느 한편에서의 삶은 전쟁이다. 다른 한 편에서의 삶은 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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