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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과 인문학 산책

낙산자락 비우당 자주동샘

by 문촌수기 2017. 10. 10.

■ 낙산정상에서 북으로 바라본 전경

한양도성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북한산

한양도성 낙산정상에서 동으로, 왼쪽으로는 한성대학교, 오른쪽에 쌍용2차아파트 담장 사이로 난 길을 내려오면 아파트단지 정문 가까이에서 자주동샘 안내 이정표가 보인다. 이 내리막길을 50여 미터 쯤 내려오면 비우당이 있다.

■ 비우당(庇雨堂)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비우당은 ‘비를 가리는 집’이라는 뜻으로, 조선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의 저자, 실학자 지봉 이수광(1563~1628)이 살던 곳이다. 낙산 동쪽 상산의 한 줄기인 지봉 아래 있었는데 이수광의 호 지봉이 여기에서 나왔다. 원래는 창신동 쌍용2차 아파트 자리에 있었는데 서울시에서 낙산공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복원하였다. 조선 초기의 청백리로 명성이 높은 류관(柳寬)이 이곳에서 살았는데 지붕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면서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라 농담을 하였다는 ‘류재상의 우산(柳相手傘)’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이곳은 외손인 이수광 집안으로 상속되었는데, 그 집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이수광이 집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이수광의 비우당
비우당 뒤 바위의 자주동샘

지봉은 이러한 사연을 <동원비우당기>에 자세히 적었다.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
            ㅡ 지봉 이수광 지음
나의 집은 흥인문 밖 낙봉 동쪽에 있다. 상산(商山)의 한자락이 남으로 뻗어 고개를 숙인듯 지봉(芝峯)이 있고,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한 넓은 바위와 십 여그루의 소나무가 비스듬이 있다. 서봉정(棲鳳亭)아래 백여 묘(畝)의 동원(東園)이 그윽하게 펼쳐져 있는데 이곳이 청백(淸白)으로 이름을 떨친 류관(柳寬)정승이 초가 3칸을 짓고 사셨다.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빗물을 피하고 살았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 온다. 이분이 나의 외가 5대 할아버님이다. 아버님이 이 집을 조금 넓혔는데 집이 소박하다고 누가 말하면 우산에 비하여 너무 사치스럽다고 대답하여 듣는 이들이 감복하였다. 나는 이 집을 보전하지 못하고 임진왜란에 없어진 이 집터에 조그만 집을 짓고 비우당(庇雨堂)이라고 하였다. 비바람을 겨우 막겠다는 뜻이다. 우산을 받고 살아오신 조상의 유풍(遺風)을 이어 간다는 뜻도 그 속에 담겨있다.

청계천의 비우당교

청계천의 비우당교(庇雨堂橋)
청계천의 다리이다.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9번째 다리이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 100번지와 성동구 상왕십리동 12번지 사이에 있다. 하정로의 기점이며 마장로19길의 종점이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고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다리이다. 현대건설에서 시공했으며 2005년 9월 30일에 준공했다.
이름은 종로구 숭인동에 있던 ‘비우당(庇雨堂)’이란 옛 집에서 유래했다. 조선 세종 때 정승을 지낸 류관은 굉장히 청빈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비가 오는 날에도 방 안에서 우산을 펴고 비를 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그의 집을 '우산각(雨傘閣)'으로, 그 동네를 '우산각골'이라 불렀다. 그리고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수광이 그 뜻을 살려 우산각 자리에 작은 집을 짓고 ‘비(雨)만 피한다(庇)’는 뜻의 ‘비우당(庇雨堂)’이라 이름붙였다. 후일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류관의 청빈 정신을 기리기 위해 다리 이름을 따온 것이다.

비우당 팔경
이수광은 비우당에 살면서 이 일대의 여덟 곳을 ‘비우당 팔경’이라 하고 시를 읊었다.
동지세류(東池細柳)에서 흥인문 바깥의 못가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노래하였으며,
북령소송(北嶺疎松)에서는 북악의 산마루가 낮에도 늘 어둑한데 푸른 솔 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고,
타락청운(駝駱晴雲)에서는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하였다.
아차모우(峨嵯暮雨)에서는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하였다.
전계세족(前溪洗足)에서는 비가오고 나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에 드러눕는다고 하였고,
후포채지(後圃採芝)에서는 지봉과 상산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사호처럼 살고 싶다 하였다.
암동심화(巖洞尋花)에서는 복사꽃 핀 꼴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였고,
신정대월(山亭待月)에서는 맑은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는 흥취를 말하였다.

지금의 비우당은 부엌 1칸, 방2칸으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전형적인 서민가옥 형태를 하고 있다. 최근에 옛모습을 복원한 것으로 실제 초가집과는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한양에 거주했던 선비들이 소박하게 살았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봉 이수광(芝峯 李睟光)
이수광은 조선중기 실학자의 선구자로 세차례에 걸쳐 사신으로 중국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은 물론 중국, 일본, 유구, 베트남 등 중국 주변국은 물론 영국, 포르투갈 등 서양세계를 비롯한 다양한 내용을 담은 백과사전 성격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을 저술하였다. 그는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이조판서까지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세번씩이나 다녀올 정도로 고위층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지만, 그가 살았던 작은 초가집은 당시 그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주동샘(紫芝洞泉)
비우당이 있던 곳은 조선시대 자지동이라 불렀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가 폐위되어 영월로 간 단종을 기다리면서 이곳에 와서 빨래를 하였는데 빨래가 붉은 빛으로 염색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위쪽에 거북바위가 있었다. 정순왕후가 단종이 탄 거북이를 타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는데 아침에 보니 이 바위가 나타났다는 전설도 전한다. <출처:서울시청>

비우당 뒤 자주동샘
자주동샘
비우당 뒤 암반, "紫芝洞泉"

지봉 이수광선생 약전

지봉선생(1563~1618)은 선조, 광해, 인조 때에 승문원,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이조판서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芝峯類說을 비롯한 주옥같은 저서를 내어 實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고결한 인품과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선생은 세 차례 중국을 다녀오면서 유럽과 아시아 각국의 사정을 넓게 이해하여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타파하였고 출세 도구로 변질한 성리학을 務實의 학문으로 바꾸어 선비사회의 淨化와 民生안정에 평생을 바쳤다. 선생은 임진왜란의 참화를 경험하면서 民族正氣를 북돋기 위해 國學에 힘을 기울였고 국가중흥을 위한 12개조의 개혁안을 인조임금에게 올려 世人의 칭송을 받았다. 民族魂과 世界眼을 함께 갖춘 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후세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오늘의 우리에게도 師表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