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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단종의 장릉만의 특별함

by 문촌수기 2023. 11. 27.

처가 식구들과 함께 한 영월 관광, 마지막 행선지가 단종의 장릉이다. 먼저, 조선왕조의 가장 슬픈왕, 단종 약사를 정리해본다.

단종 약사
● 출생 : 1441년(세종 23)에 세자(문종)과 세자빈(현덕왕후) 사이에서 출생
● 어머니는 난산으로 3일 만에 죽고, 할머니뻘인 세종 후궁 혜빈 양씨가 양육함
● 8 세 : 1448년(세종 30) 세손에 책봉됨. 조선왕실 최초의 왕세손
● 10세 : 1450년(세종 32) 세종 승하, 문종 즉위. 단종은 왕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됨
12세 : 1452년(문종 3) 문종 승하, 단종 즉위.
13세 : 1453년(단종 1) 10월, 수양대군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 안평대군 사사, 고명대신 영의정 황보 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 분 등 피살
14세 : 1454년(단종 2)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음 (정순왕후)
● 15세 : 1455년(세조 1) 6월, 수양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남 (재위 3년2개월)
16세 : 1456년(세조 2) 성삼문의 난(상왕 복위사건), 사육신 처형
17세 : 1457년(세조 3) 노산군으로 강봉, 6월 22일 청령포로 유배
두달 만에 관풍헌으로 이배
금성대군 2차 단종 복위사건으로 단종은 서인으로 강봉됨
● 17세:1457년
10월 24일 사사됨, 동강에 버려진 시신을 엄홍도가 거두어 암장.
● 암장된 60년 후 무덤을 겨우 찾았다. 그로부터 15년 후 그곳에 간단한 석물을 세웠다.
● 180년이나 지난 1698년(숙종24) 비로소 단종이란 묘호와 장릉이란 능호를 받고서 종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장릉의 특별함]
세계문화유산이 된 조선왕릉 중에서 영월의 장릉은 매우 특별하다. 그 특별함을 정리해보면,

1) 조선 왕릉 중 한양에서 가장 멀다.
세종대왕이 묻힌 여주의 영릉도 100리 밖이지만,영월의 장릉이 한양 도성에서 가장멀다. 그것도 왕이 죽고 묻힌 그 자리에 능을 조성한 것으로 유일하다.


2) 망주석에 세호가 없다.
망주석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세호(細虎)가 없다. 봉분 좌우에 세우는 기둥인 망주석에 조각하는 세호는 처음엔 별다른 형태를 갖지 못하다가 점차 동물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다. 그 의미와 용도에 관해서는 특별히 정립된 이론은 없다. 영월 장릉의 망주석은 조선 왕릉 중 세호가 없는 유일한 것이다.

3) 무석인과 석호도 없다.

석마, 문석인, 망주석, 석양 만 있다.
문석인과 석마


4) 조선왕릉 최초의
4각형 장명등


5) 정령송(精靈松)이 되어 만나다.
죽어서도 만나지 못한 정순왕후 송씨가 외롭게 묻힌 경기도 남양주의 사릉(思陵)에서 1999년에 옮겨와 단종릉 앞에 심었다. 어린 부부의 한이 정령이 되어 이렇게 해후(邂逅)하고 있다.

단종의 장릉앞에 마주한 소나무

6) 영천(靈泉)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했던 우물이다. 통한이 씻기지 않듯이, 그때의 눈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고 샘 솟는다.


7) 정자각에서 능침이 보이지 않는다.


8) 'ㄱ'자로 꺾인 참도(參道)
참도(參道)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이다. 왼쪽은 신의 길인 신로(神路), 오른쪽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御路)이다. 'ㄱ'자로 꺾인 참도가 파주의 공릉에도 있지만, 이 곳의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택지된 능이 아니고 암장된 후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조선 왕릉의 구조와 다른 점이 많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는 일반적으로 일(一)자형으로 조성되는데 반해 영월 장릉은  'ㄱ' 자형으로 꺾여 있다.


9) 충신들의 배식단과 장판옥, 정려비 등 건조물
장릉에는 다른 왕릉에는 없는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많다.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묘을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재실 옆에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장판옥은 정조 15년(1791)에 건립된 곳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과 조사위 186인, 환관군노위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여기에 고명대신 영의정 황보 인(皇甫 仁), 나의 할아버지도 계신다.
매년 한식날 단종제향 후 이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단종을 향한 충신들의 혼이 남아 변치 않는 충절로 단종의 능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바로 건너편에는 이들에게 제를 올리기 위한 배식단이 보인다.

홍살문 밖에 장판옥, 그 맞은 편에는 배식단이 보인다.
장판옥 안에 모셔진 정단 배식자 32위 명단ㅡ 안평대군·금성대군·화의군·한남군·영풍군·이양 등 여섯 종실(육종영)과 송현수·권자신·정종·권완 등 네명의 외척(사의척)과 황보인ㆍ김종서·정분 세 재상(삼상신), 민신·조극관·김문기(삼중신), 성승과 박쟁(朴崝)(양운검), 그리고 사육신과 엄홍도 등, 문경공은 허조, 문헌공은 박연
장릉(莊陵) 배식단. 정단과 별단에 배식한 268위의 제단. 단종 복위 후, 1791년(정조 15)에 처음으로 정위 32인과 별단의 제위 198인을 지정. 그 후 순조 연간 이래 추가되어 268위로 증가. 제사의 시일은 한식 때이며, 그 축문은 정조가 직접 지었다. 제단은 정단과 별단을 구분하였으며, 별단은 공로의 다소와 신분에 따라 셋으로 나누었다.
배식단
엄홍도 정려각
정려비

엄흥도 정려각(嚴興道 旌閭閣)
이 비각은 엄흥도의 충절(忠節)을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세운 것이다.
충신 엄흥도가 영월호장(寧越戸長)으로 있을 때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유배되어 관풍헌(觀風軒)에서 1457년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진 사약을 받고 승하하여 그 옥체가 강물에 버려지자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함께 단종의 시신을 암장하여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순조 33년(1833)에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추증되었고 고종 13년(1876)에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10) 장릉이라는 이름의 조선왕릉이 셋이나 있다.
영월 장릉(莊陵)은 조선의 6대왕 단종릉
파주 장릉(長陵)은 16대왕 인조와 인열왕후의 합장릉
김포 장릉(章陵)은 추존왕 원종(인조의 생부)과 추존왕비 인헌왕후(인조의 생모)의 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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