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세한도>에서 읽는 군자의 절의(節義)
▣ 읽기 : <세한도>속의 이야기
<세한도>(국보 180호)는 제주도에 유배 온 지 5년이 지난 추사(秋史) 김정희가 나이 59세(1844년) 때 그린 것이다. 척보면 그다지 잘 그렸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안견, 겸재, 단원, 혜원 등 내노라는 전문화가의 그림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아마추어인 선비들이 그린 문인화 중에서 최고봉으로 손꼽을 만하다. 특히 이 그림이 담고 있는 심의(深意)를 알고 나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보물(국보 180호)이 되었다.
죄를 짓고 귀양 간 사람을 자주 찾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행여라도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까 두려울 것이다. 방문이 잦았던 여러 제자들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발걸음이 점차 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관(譯官)이었던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은 통역관으로 청나라로 다녀올 적마다 귀한 책들을 구해서 스승에게 보내드렸다. 이에 스승은 제자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여 고마움을 전하고자 그림을 그려서 주었다. 그림 속에는 자신의 처한 상황과 제자의 한결같은 마음을 그려내고 기록하였다. 이 그림이 세한도이다.
세한도는 그림과 글자로 크게 두 개 영역으로 나누어 있다. 그림은 반듯하게 자란 세 그루 잣나무, 세파에 휘어지고 늙은 한그루의 소나무 아래에 허술하게 지어진 집이 한 채 보인다. 추운 때라는 ‘세한(歲寒)’이라는 화제가 없어도 참으로 써늘한 기운과 찬바람이 불어온다. 집도 낯설다. 우리의 와당도 아니고 초당은 더욱 아니다. 낯선 지붕 뿐 아니라 둥근 창도 낯설다.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집이 아니라 빈 축사나 창고와 같다. 갈필(渴筆)로 그린 소나무는 메마르게 늙어있고 잎이 다 떨어지고 줄기가 꺾인 상태에서 겨우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빈 집과 소나무는 마치 추사 자신을 그린 듯하다. 그렇다면 추운 겨울철에도 푸른 잎을 간직한 채 곧게 뻗어 있는 세 그루의 잣나무는 누구일까? 허물어 질듯 한 빈집을 바로 곁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가운데의 잣나무는 외로울 적에도 곁을 떠나지 않고 귀한 책들을 보내 왔던 제자 이상적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왼쪽의 두 그루 잣나무는 누구란 말인가? 유배당한 죄인을 멀리 않고 차와 그림으로 교유를 이어간 초의선사와 소치 허유이지는 않을까? 억지 추측이지만 나름 재미있는 상상도 해본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예서체로 ‘세한도(歲寒圖)’라며 화제(畫題)를 쓰고, 제자 이상적에게 이 그림을 준다는 의미로 예서의 기운을 간직한 해서체로 ‘우선시상(藕船是賞)’과 ‘완당(阮堂)’을 썼다. ‘우선이에게 드리네. 완당이’이라는 뜻이다. ‘우선(藕船)’은 제자 상적의 호이다. 그림과 글씨를 감상하다가 눈길을 왼쪽으로 가면서 자칫 놓치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꼭 눈여겨 보고 가야할 곳이 있다. 바로 가장 오른쪽 하단의 붉은 색 ‘장무상망(長毋相忘)’ 유인(遊印) 낙관(落款)이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정을 새겼다. 나에게도 이렇게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며 약속한 제자가 있었던가? 스승이 있었던가? 그런 친구 있었던가?
이 그림은 보면 볼수록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한 추사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림을 보았으니 이제 그림의 사연을 적은 발문(跋文)을 읽어보자.
지난해에 두 가지 <만학>, <대운> 책을 부쳐왔고, 금년에는 <우경문편>이라는 책을 부쳐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 아니요. 머나먼 천리 밖에서 구한 것이며, 여러 해를 걸쳐 얻은 것이요, 일시적인 일이 아니다. 더구나, 세상은 물밀듯이 권력만을 따르는데, 이와 같이 심력을 써서 구한 것을 권력 있는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밖의 한 초췌하고 메마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권력자에게 추세하는 것과 같구나. ......(중략)...........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 잣나무는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고 하였다. 송백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날이 추워지기 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날이 추워진 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이 특히 세한을 당한 이후를 칭찬하였는데, 지금 군은 전이라고 더한 것이 없고, 후라고 덜한 것이 없구나. 세한 이전의 군을 칭찬할 것 없거니와, 세한 이후의 군은 또한 성인에게 칭찬 받을 만한 것 아닌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한갓 시들지 않음의 정조와 근절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세한의 시절에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 (후략) - 완당(阮堂) 노인(老人)이 쓰다.
[나의 세한도] ~ 세한도 패러디 하기
'논어와 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어11. 죽음의 친구, 잠의 인문학ㅡ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0) | 2018.07.03 |
---|---|
논어10.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1) | 2018.07.03 |
논어08. 비주얼 씽킹으로 표현하는 《논어》공부 (0) | 2018.07.03 |
논어07. 돈과 도(道), 참된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3) | 2018.07.03 |
논어06. 소확행(小確幸)과 안빈낙도(安貧樂道) (0) | 2018.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