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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스토리텔링

다산의 유배지, 포항 장기

by 문촌수기 2018. 2. 17.
개혁의 주인 정조가 서거(1800년)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 정약용은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되면서 다산(1784년 세례명, 요한)은 천주교인으로 지목 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이때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1786년 세례명, 아우구스티노)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곧 조카 사위인 황사영(세례명, 알렉시오)의 백서사건(1801년, 신유박해의 전말을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주교에게 알리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사형당함)이 일어나서 한양으로 다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다산은 그때의 고통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 아십니까? 기막힌 이 일을
어머니 아십니까? 서러운 이 맘을
우리 집안 갑자기 뒤집히어서 
죽고사는 갈림길에서 헤메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父兮知不知 / 母兮知不知 /
家門[炎欠]傾覆 / 死生今如斯"
ㅡ [하담별] 중에서

1801년 다산이 유배생활을 한 장기를 다시 찾았다. 강진의 다산초당과 같이 장기에는 다산 적거지가 남아 있지않다.
다만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장기초등학교 운동장 한 켠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사적비가 있다. 그 옆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사적비도 나란히 있다. 우암도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사적비 앞에서 고개를 들면 장기읍성곽이 눈에 들어온다.
다산은 이곳에서 열달 유배생활을 하면서 바닷가의 습기차고 짠 바람에 고통받았다. 그러다고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다시 심판을 받고 전라도 강진으로 기나긴 유배길을 나선 것이다.

다산의 적거지는 어딜까? 장기초등학교 뒤일까? 그 옆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