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916 공자의 <논어> 군자와 안중근 논문 > 제 4장 요약 및 결론 제4장 요약 및 결론 참으로 각박한 세상이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실력과 경력을 쌓아가며 자기 연마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그것뿐이 아니다. 실력과 경력이 있다하더라도 결코 인간관계에서 사람다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공자의 사상은 오랫동안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람다움의 길을 가르치고 있다. 공자 사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논어》에서는 ‘사람됨의 길’과 ‘사람다움의 도리’를 제시하고 있다. 《논어ㆍ論語》는 논인(論仁)이며 또한 논인(論人)이었다. 인(仁)은 모든 덕행의 근본이요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인(仁)이라고 하는 덕목을 통하여 사람됨이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삶과 사람과 사랑’은 하나이다. 그렇듯이 인(仁)함은 사람다움[仁者人也]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仁者愛.. 2015. 10. 5. 안중근 > 제3절 안중근 의사의 《논어》 유묵 제3절 안중근 의사의 《논어》 유묵에서 얻은 삶의 교훈 안중근의 유묵(遺墨)은 현재 실물이나 사진으로 50여점이 확인된다. 이중 국내 소재는 26점으로 모두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한 개인의 작품으로 놓고 볼 때 국가보물로 가장 많이 지정되어 있고,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작품가격으로도 가장 높다. 안중근의 유묵은 모두 사형 선고일(1910. 2. 14)에서 순국(1910. 3. 26)까지 라는 점, 수신자가 모두 일본인이라는 점은 역사상 어떤 다른 사람의 경우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다. 특히 내용이 동양고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고발이나 감개와 같이 자기 체험이나 자각으로 걸러낸 것이라는 점에서 안중근의 유서이자 또 다른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위의 ‘견리사의 견위수.. 2015. 10. 5. 안중근 >제2절 안중근 의사를 찾아서 > 2.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2. 서울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 1970년 당시 대통령의 지시와 국민의 성금 등으로 서울 남산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을 건립 하게 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기념관이 노후 협소해짐에 따라 2004년 안중근의사숭모회와 광복회의 요청을 받은 대통령의 지시로 새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항일 독립 정신과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얼을 새겨볼 수 있는 역사 교육현장이다. 안의사는 1909년 3월 항일투사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왼손 무명지의 첫 관절을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 쓰며,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래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단지동맹을 한 12명의 열사를 기리기 위해 12개의 큐브 모양으로 디자인되었다. 건축물에도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면 .. 2015. 10. 5. 안중근 >제2절 안중근 의사를 찾아서 > 1. 중국 뤼순 감옥소 제2절 안중근 의사를 찾아서 1. 중국, 뤼순(여순) 감옥소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의 의거 후, 일제의 뤼순(지금의 중국 여순) 감옥소로 압송된 때가 11월 3일이다. 투옥 143일 동안 늘 그러하지는 않았지만, 일제는 국제적인 관심이 된 안중근 의사를 특별히 대우하였다. 의사는 붓글씨를 써서 일본인들에게 주었다. 의사의 글을 얻고자 일부러 찾아오는 일본인들도 있었다. 사형선고일 이후부터 순국되기 전까지 짧은 기간에 이곳에서 《안응칠 역사》와 을 집필하였다. 곧 죽을 이에게 베푸는 마지막 은전인가? 아무튼 일제는 이런 특별 대우와 은전(?) 덕분에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저서가 남아서 전해 질 수 있었고,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넋과 정신을 숭고하게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최소한의 인도주의.. 2015. 10. 5. 안중근 > 4. 영웅의 숭고한 죽음 4. 영웅의 숭고한 죽음 [순국 5분전 안중근 의사의 모습, 어머님이 보내온 수의를 입었다. 우리 겨레의 옷이다.] 안중근은 전날 고향으로부터 보내온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사형집행장으로 나아간다. 전옥은 사형집행문을 읽고 유언할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안중근은 다른 유언은 없으나 “나의 의거는 오로지 동양평화(東洋平和)를 도모하려는 성심(誠心)에서 한 것이니 바라건대 오늘 임검한 일본 관헌들도 다행히 나의 미충(微衷)을 양해하여 피아 구별 없이 합심 협력해 동양평화를 기필코 도모할 것을 간절히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어 안의사는 마지막으로 “‘동양평화만세’를 삼창하고자한다”고 하였으나 전옥은 그럴 수 없다고 하면서 사형집행을 명하였다. 다음 글은 안의사의 통역 역할을 한 일본인 소노키 스에키(圓木末喜)가.. 2015. 10. 5. 안중근 >3.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 3.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사형 선고를 받은 옥중의 아들에게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를 보면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요, 그 아들에 그 어머니를 알 수 있다. “네가 만일 늙은 이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2015. 10. 5. 안중근 > 2. 그의 정의로운 전쟁 2. 그의 정의로운 전쟁 1909년(31세) 3월 2일 안중근은 김기용, 강기순, 백남규 등 11인과 동의단지(同義斷指)동맹을 결성하였다. 3월 5일에는 총기를 휴대한 약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수청 방면으로부터 합십마 부근으로 이동하는 등 의병활동을 하다 이튿날 일진회 회원 박모를 응징하였다. 그해 4월 10일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병탄안을 찬성하였으며 7월 10일에는 일본 정부 각의에서 의결되고 일본 국왕은 그날로 재가하였다. 그해 10월 9일 이토는 일본 국왕을 만나 3, 4주간 예정으로 만주를 여행한다는 계획을 알리고 18일 중국 다렌에 도착한다.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던 안중근은 이 소식을 듣고 우덕순을 만나 이치권의 집으로 함께 돌아와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합의한다. 10월 22일 안중근,.. 2015. 10. 5. 안중근 의사의 삶과 교훈 > 1. 그의 탄생과 군자로서의 삶 제3장 안중근 의사의 삶과 《논어》의 교훈 제1절 의사 안중근의 삶 1. 그의 탄생과 군자로서의 삶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서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안인수는 일찍이 진해 현감을 지내며, 자선가로서 도내에 명성이 자자했으며, 부친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8, 9세에 사서삼경에 통달하였고, 13, 4세에 과거공부를 하고 사륙병려체를 익혀 선동(仙童)이라 불리며 널리 명성이 자자했으며, 18세에 과거에 올라 진사가 되고 조씨와 혼인하였다. 그해 1879년 9월 2일에 장남 중근이 태어났으니, 중근은 명문 선비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중근은 태어날 때에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과 같이 일곱 개의 점이 있었다. 할아버.. 2015. 10. 5. 꿈을 이루기 위하여 - 1) 꿈만 꾸면 뭐해? 꿈을 이루기 위해 - 수석교사 황보근영 「‘꿈만 꾸면 뭐해?’」 여러분! 이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시죠? 유명한 이야기랍니다. 예! 맞았어요. 조각가 피그말리온이랍니다. 그는 못난이라서 그런지, 아님 세상 여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사랑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늘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여인이 있어서 그 여인을 상아로 조각을 했답니다. 자기가 조각한 너무나 아름다운 상아 여인상을 보며 사랑에 빠졌고 날마다 입맞춤을 하며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기도를 했죠. ‘이 여인과의 사랑을 이루게 해주소서.’ 간절한 기도에 감동했는지 미의 여신은 피그말리온의 기도를 들어주셨답니다. 상아조각상은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되어 피그말리온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이 이야기에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 2015. 10. 4. 이전 1 ··· 148 149 150 151 152 153 154 ··· 21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