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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나들이2 -명동 공원

by 문촌수기 2022. 12. 30.


<명동 이야기>
유행과 쇼핑·관광의 중심 명동 그 안에 숨겨진 역사적 이야기들을 알고 있나요?
명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이 지역을 가리키던 이름인 명례방(明禮坊)에서유래되었는데, 당시 명례방에는 종현(鐘峴, 종고개), 이현(泥峴, 진고개), 동현(銅峴,구리개) 등 여러 고개가 있었습니다. 종현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며숭례문에 있던 종을 걸어둔 데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1898년에는 명동성당이들어섰습니다. 진고개는 땅이 질어서, 구리개는 흙이 구릿빛이어서 붙은 이름으로,약방이 즐비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옛 명동의 모습은 지금과는 무척 달랐습니다. 명동은 시대를 따라 변화하면서다양한 이야기들을 품어 왔던 것입니다. 명동에 얽힌 사람, 공간, 그리고 사건들 하나하나짚어가면서 또 다른 명동의 모습을 만나보세요.

1) 시를 사랑한 선비와조선판 노블리스 오블리주

600년 수도 한양의 한복판에 위치했던 만큼, 명동에는여러 명문가의 집터가 남아 있습니다.

조선 시조 문학의 최고봉 윤선도(1587~1671) 또한바로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에 살았다고 합니다. 사계절어부의 생활을 눈에 보이듯 묘사한 <어부사시사》, 물,돌, 소나무, 대나무, 달을 선비의 다섯 벗으로 비유한<오우가>가 윤선도의 대표작입니다.
윤선도의 대표작 <어부사시사>
'오성과 한음'의 유쾌한 이야기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1556~1618)의 후손들이 살았던 경주 이씨 집터(지금의 명동 1가 YWCA 앞)도 명동에 남아 있습니다.이항복은 특유의 대담함과 결단력을 통해 임진왜란을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평생의 우정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1556~1618, 왼쪽)과
한음 이덕형(1561~1613, 오른쪽)

19세기 말 국난의 시기, 경주 이씨 명동 저택에서는조상의 의기를 물려받은 인물들이 태어났습니다.이항복의 10대손인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이시영(1869~1953) 형제가 그들입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이회영, 이시영을 포함한6형제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독립운동을 위해만주로 떠났습니다. 처분한 재산은 40여만 원으로,당시소 13,000마리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현재가치로는 수백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돈입니다.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떠난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
이후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당하여 순국했으며 다른형제들도 모두 망명지에서 사망했습니다. 임시정부에참여했던 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광복 후 초대부통령을 지냈습니다. 이회영, 이시영 형제가 보여준조선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큰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시영(1869~1953).독립운동 중 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떠난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




2) 사람이름은 잊었지만..



명동이 군화대술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로, 그 중심에는 1936년 설립된 극장 '명치좌'가있었습니다. 명치좌는 해방 후 시공관으로 이름을바꾸어 시립극장이 되었다가, 1957년 국립극장명동예술회관으로 다시 개관했습니다. 국립극장을중심으로 1960년대 명동은 문인과 예술인들의 거리로자리매김했습니다.
당시 명동의 명물은 다방들이었습니다. 다방은 문인과예술인들의 살롱 역할을 했는데, 다방마다 모이는사람들의 성격이 달랐습니다. '모나리자'에는 문인들이,'금꿩다방'에는 화가들이, '라이뿌룸'에는 방송인,'은하수다방'에는 연극인들이 모였습니다.
또 다른 명소로는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 여사가운영했던 은성주점이 있었습니다. 소설가 이봉구를비롯하여 시인 김수영, 작곡가 윤용하 같은 당대의예술인들이 은성에 모였습니다.
특히 소설가 이봉구는 명동과 은성주점을 사랑하여'명동배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언제나은성주점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예사람들은 이봉구에게 편지를 쓸 때 은성주점으로 보낼정도였다고 합니다.
낭만의 거리 명동의 주제가라고 할 수 있는 노래<세월이 가면> 역시 은성주점에서 태어났습니다. 30세로요절한 시인 박인환이 은성주점에서 즉석으로 지은 시가노래로 만들어진 것이죠. <세월이 가면》은 이후 여러차례 리메이크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2004년에는 EBS 문화사 시리즈의 제 1편으로 1960년대 명동 문화예술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명동백작》이 방영되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EBS 사상최초로 시청률 1%를 돌파하며 많은 시청자들에게 그때그 시절의 낭만을 추억하게 했습니다.
한편 국립극장은 1975년 폐관했다가 2009년'명동예술극장'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명동 문화예술의명맥이 부활하게 됩니다.

3) 신앙과민주화의 성지,명동대성당

건축 중인 명동성당과 그 일대의 모습(1894)
1882년, 천주교회는 조선 최초의 순교자였던 통역관김범우의 집터를 포함한 명례방 종현 일대의 땅을사들였습니다. 처음에는 신학생 교육을 위해 종현서당을세우고 운영하다가, 1887년 주변 땅을 더 확보하여성당을 짓기 위한 터 닦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당시신자들은 한겨울의 큰 추위 속에도 자발적인 봉사로 터닦기 작업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 곳 인근에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이 있는데다가 경복궁을내려다보는 곳이라 하여 제동을 걸었습니다. 몇 년간이어진 정부와의 교섭에 청일전쟁, 최초 설계자인코스트 신부의 사망이 겹쳐 명동성당은 1898년이되어서야 완공되었습니다.
1898년 축성직후(위)와 힌재의 명동성당(이래).
주변은 바뀌었지만 성당만은 그대로입니다.


명동성당 사도회관.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로,명동성당에 앞서 1890년 완공되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박종철 추모대회(1987)

종현 언덕 위에 세워진 명동성당은 당시 서울에서 보기드문 서양식 건물이자 가장 높은 건물로 눈길을끌었습니다.'이수일과 심순애'로 유명한 《장한몽》(1913)이나 이광수의 《무정》(1917) 등 당대의 문학작품속에서도 명동성당의 이국적인 풍경이 잘 묘사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87년,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되었습니다. 군사정권도 성당까지는 들어오지 못했기때문입니다. 그해 2월, 명동성당에서는 경찰의 고문으로사망한 박종철의 국민추도회가 개최되었고, 이를계기로 민주화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이후에도명동성당은 학생운동, 노동운동,빈민운동 등 각종사회운동의 거점 구실을 담당했고, 1980~90년대서울 도심에서 이루어진 시위는 대부분 명동성당주변에서 벌어졌습니다.

1970년대 명동은 대중문화, 유행과 오락, 금융 등 모든면에서 서울의 중심지였습니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등통기타 가수들의 무대였던 오비스 캐빈(OB's Cabin), 첨단패션을 선도하고 있었던 최경자, 노라 노, 앙드레 김 등의의상실에다 증권거래소와 60여개의 증권사까지 밀집해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1974년부터는 관광진흥법으로 인해 오늘날과 같은국제 관광명소의 기틀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신세계, 미도파두 백화점이 외국인 전용 관광백화점으로 지정되면서명동은 관광객을 위한 쇼핑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들어서 한국관광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더욱커졌습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통해 한국을 찾는 관광객들이 늘기 시작했습니다.이후《겨울연가》와 함께 한류 붐이 일면서 많은 일본인관광객들이 지금까지 꾸준히 명동을 찾고 있습니다.

오별날 명동을 가장 많이 찾는 유커, 즉 중국 관광객들의시작은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F. 1992년의 한중수교,1998년에는 중국의 해외여행 자유화 국가로 한국이 지정되어 방한 중국인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우리나라 드라마와 가요들이 아시아전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명동을 찾고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명동은 화장품 가게들이 줄지어 들어서며패션과 뷰티의 거리로 바뀌었습니다. 명동 방문객 가운데절반 정도가 외국인인 만큼 화장품 가게들은 한류 마케팅으로손님을 끌고 있습니다. 가게 앞에는 한류 스타들의 포스터가간판보다 크게 붙어 있어 포스터와 촬영하는 외국인들을쉽게 볼 수 있습니다.
50여 년의 시간을 거쳐, 대한민국 대표 번화가 명동은쇼핑관광중심지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명소 1번지로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관광의 중심,명동 관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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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은 가로다 순니다.
1970년대 오비스 캐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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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미도파 백화점(왼쪽)과현재의 롯데 영플라자(오른쪽)
1966년의 신세계백화점(왼쪽)과 현재의 모습(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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