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인격완성과 자아실현을 삶의 의미라고 여긴다. <논어> 헌문편에서의 '成人'은 단순히 어른(adult)이 아니라, 人格을 形成한 상태를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한다. 인격완성과 자아실현은 교육의 목적이기도 하다.
'見利思義, 見危授命' 이 글을 볼때마다, 안중근 의사를 떠올린다. 이토오를 척결하고 수감된 안중근 의사. 손가락을 끊고 맹세했던 구국의 의지를 보이고자 당당하게 그의 왼손을 가슴앞에 내 보였다. 그는 이 말씀대로 사셨다. 그리고 돌아 가시기 전 옥중에서 붓을 들어 이 글을 쓰셨다. 그는 선비 중의 선비이시며, 장군 중의 대장군이시며, 대인 중의 眞大人이며 成人이셨다.

14‧12 子路問成人. 子曰 ..“今之成人者何必然?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爲成人矣.”
(자로문 성인. 자왈, "금지성인자하필연? 견리사의 견위수명, 구요불망평생지언, 역가이위성인의)
자로가 인격완성한 사람 됨을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금의 成人됨이 知ㆍ不慾ㆍ勇ㆍ藝ㆍ禮樂할 필요가 꼭 있어야 하겠는가?)
利를 보고 義를 생각하며,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치며, 오랜 약속에 평소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또한 성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The man, who in the view of gain, thinks of righteousness; who in the view of danger is prepared to give up his life; and who does not forget an old agreement however far back it extends:– such a man may be reckoned a complete man.’

안중근 의사는 순국 직전까지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며, 틈틈이 <논어>의 명구를 휘호하셨다.
서울 남산공원 백범광장 위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석림 중에서, '견리사의 견위수명'이 머릿돌같이 우뚝하다.

더읽기ㆍ안중근 의사, 그의 정의로운 전쟁과 논어
https://munchon.tistory.com/m/1146

논어03. (길에서 읽는 논어) 안중근 의사의 삶과 논어 유묵.

3. 길에서 읽는 논어ㅡ안중근 의사의 삶과 유묵 ▣ 그의 정의로운 전쟁 1909년(31세) 3월 2일 안중근은 김기용, 강기순, 백남규 등 11인과 동의단지(同義斷指)동맹을 결성하였다. 3월 5일에는 총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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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 仁者有勇, 어진 이는 용감하다.

논어와 놀기 2021. 7. 3. 21:26 Posted by 문촌수기

선비의 이야기를 더하려 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에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어났다. 곽재우, 고경명, 조헌 등 지방의 유생들이 의병장이 되고, 사명당 서산대사 등 승려들이 의승장이 되어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다. 조선의 명이 기울어지고 대한제국 마저 기틀을 잡지 못하며,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곳곳에서 의병(義兵)이 크게 일어났다. 갑오개혁, 을미사변, 단발령 그리고 을사조약, 군대해산, 경술국치 등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며 전국적으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안중근은 대한의군(義軍) 참모중장이라는 이름으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1909.10.26, 하얼빈역)하였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자 초대 총독인 테라우치 마사다케는 심복인 다카하시 도오루에게 조선에서 의병들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언인지 조사하라고 명하였다. 다카하시는 의병장의 집을 수색하고 놀랬다. 그들에게는 한결같이 책상머리에 <퇴계집>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의병장들은 바로 선비[士]들이었다. 글만 읽는 백면 서생들이 아니라, 백성과 나라를 구하고자 붓(筆) 대신에 칼을 든 의롭고 용감한 선비(士)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는 테라우치 총독에게 '조선에서 선비를 없애지 못하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병 때문에 식민통치가 불가능할 것' 이라고 보고했다. 이때부터 선비정신에 대한 말살정책이 교묘하게 진행되었다.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의병은 우리 민족의 국수(國粹)요 국성(國性)이다.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 한국인의 정신, 우리의 선비 정신의 정수는 무엇일까? 나는 의(義)ㆍ용(勇)ㆍ청(淸)ㆍ절(節)의 덕과 지행일치의 삶이라고 감히 정리해본다.

14ㆍ05 子曰: “有德者必有言, 有言者不必有德. 仁者必有勇, 勇者不必有仁.
(자왈: “유덕자필유언, 유언자불필유덕. 인자필유용, 용자불필유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이 있는 저는 반드시 훌륭한 말이 있거니와, 훌륭한 말이 있는 자는(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지는 못하다. 인자는 반드시 용명이 있거니와, 용맹이 있는 자는(라고 해서) 반드시 인이 있지는 못하다."
The Master said, "The virtuous will be sure to speak correctly, but those whose speech is good may not always be virtuous. Men of principle are sure to be bold, but those who are bold may not always be men of principle."

유덕자필유언, 유언자불필유덕. 인자필유용, 용자불필유인

<논어> 놀기를 끝내면, 퇴계와 선비정신을 다시 만나리라. <성학십도> 를 숙독하며. 따라 그려보리라.

https://www.itkc.or.kr/bbs/boardView.do?id=101&bIdx=33027&page=1&menuId=0&bc=0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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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7 歲寒孤節의 아름다운 이야기

논어와 놀기 2021. 3. 20. 15:08 Posted by 문촌수기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사연이다.
"우선이, 이것 보시게. 완당이.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소나무 측백나무는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송백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날이 추워지기 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날이 추워진 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이 특히 세한을 당한 이후를 칭찬하였는데, 지금 자네는 이전이라고 더한 것이 없고, 이후라고 덜한 것이  없구나. 세한 이전의 자네를 칭찬할 것 없거니와, 세한 이후의 자네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 받을 만한 것 아닌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한갓 시들지 않음의 정조와 근절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세한의 시절에 느끼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 완당(阮堂) 노인(老人)이 쓰다.

09 28 子曰: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자왈: “세한, 연후지송백지후조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

The Master said, ‘When the year becomes cold, then we know how the pine and the cypress are the last to lose their leaves.’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추사의 <세한도>


이야기+
일년 중 가장 춥다는 세한(歲寒)의 절기도 지나고 봄이 왔다. 남녘의 꽃향기를 실려오지만 그래도 봄바람은 아직 차다.

참으로 오랜만에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고 싶어서였다. 많이 봐 온 그림이지만 직접 내 눈으로 오리지널을 친견한다는 것은 정말 설래는 일이다.

추사의 오리지널 세한도와 앞뒤로 붙인 두루마리


<세한도>는 제주도에 유배 온 지 5년이 지난 추사(秋史) 김정희가 나이 59세(1844년) 때 그린 것이다. 
역관(譯官)이었던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고마움을 전하고자 그려 준 그림이다. 추사는 자신의 처한 상황과 제자의 한결같은 마음을 歲寒 松柏을 그렸으며, 그 사연을 기록하였다. 

강하면서도 수려한 예서체로 '세한도(歲寒圖 )' 쓰고, 그 오른쪽에 '우선시상(藕船是賞)’과 ‘완당(阮堂)’이라고 썼다. ‘우선이, 이것 보시게. 완당이’이라는 뜻이다.

‘우선(藕船)’은 제자이면서 통역관인 이상적의 호이다. 그림과 글씨를 감상하다가 눈길을 왼쪽으로 가면서 자칫 놓치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꼭 눈여겨 보고 가야할 곳이 있다. 바로 가장 오른쪽 하단의 붉은 색 ‘장무상망(長毋相忘)’ 유인(遊印) 낙관(落款)이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으로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정을 새겼다. 나에게도 이렇게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며 약속한 제자가 있었던가? 스승이 있었던가? 그런 친구 있었던가?

아호인, 완당
성명인, 정희
유인, 長毋相忘
아호인, 추사

뤼순 옥중에서 안중근 의사, 유묵 세한연후
~ '後' 자를 빠트리고 써서, 나중에 아니 '不'자가 작게 삽입되었다. 뜻은 다르지 않는다.


세한연후의 뜻을 새기고자 휘호하여 가까이 두었다.


세한연후를 노래하며, '상록수'를 부르며 그려보았다.
"저 들에 푸르른 솔 잎을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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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그림으로 철학하기 - ‘나는 누구인가?’


◦철학 첫째 시간 : 나를 돌아보기, 나를 소개하기 - A4복사용지에 손가락 그림 그리기
◦주제 :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

"나를 찾아 디자인하고, 브랜딩하라. ㅡ 나의 가치가 달라진다. 싸구려를 명품으로!“

◦방법 : 여러 선생님들께 배운 손가락 그림을 응용하였답니다. 여기에 저는 ‘의미[Meaning]더하기’를 했습니다. 특히, 손가락 이름과 사용례, 그리고 중요한 상징성을 전했습니다. - 스토리텔링을 더한 것이죠.
◦손가락 이름, 나의 이름, 그 의미와 브랜딩의 가치를 더한 까닭은?
김춘수 님의 시 [꽃]으로 그 까닭을 전합니다. 시는 낭송해야 맛이 나죠.


이하는 첨부된 PDF 파일을 열어서 보셔요.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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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업그레이드 함.
참고> 안중근의사의 비장한 손바닥 그림과 평화실천을 위한 나의 일
2021년 집필한 초등학생용 통일도서,
<통통이의 평화통일 이야기 > 마지막 쪽.

참고> 손바닥 그림의 비통한 역사
이제는 나를 찾는 손바닥 그림이 되었지만,
조선 시대에 손바닥 그림은 생활고로 자기와 가족을 노비로 팔겠다는 계약문서에 서명으로 그려졌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포함해 가족을 팔아 노비(奴婢·奴는 사내, 婢는 계집종을 뜻한다)가 된 사람들을 자매노비(自賣奴婢)라고 하고 그 계약문서를 자매문기(自賣文記)라고 한다. 그 기가 막힌 이야기.

최씨 성을 가진 여자가 열 살짜리 자기 딸 간난이를 노비로 팔겠다고 내놓았다. ‘긴급히 사용하기 위해(緊用次·긴용차)’라 적어놓았으니 급전이 필요했던 듯하다. 그녀가 딸에게 매긴 몸값은 362냥 53전이었으니, 이게 빚 규모가 아니었을까. 문서에는 최씨 손바닥만 그려져 있을 뿐 간난이를 사간 사람도 증인도 없다. 거래 불발. 최씨가 간난이를 내놓은 때는 망국 1년 전인 대한제국 융희 3년, 1909년 음력 11월 한겨울이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86981)

경술국치, 1년 전인 1909년 겨울 열 살짜리 딸 간난이를 팔겠다는 자매문기. 거래는 불발됐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4년째인 광무 4년(1900년) 재금(再金)이라는 여자가 열 살 난 딸 간난이(干蘭伊)를 윤 참판 댁에 팔았다. ‘이 작은 계집은 지아비를 잃고 빚이 수백 금이라 부득이 열 살 난 여식 간난이를 오백 냥에 윤 참판 댁에 영원히 팔려 하오니 훗날 족친 가운데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오리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30579)

1900년 재금이라는 여자가 남편 없이 살며 생활고에 시달리다 열 살짜리 딸 간난이를 윤참판 댁에 500냥에 판다는 문서. 영원히 노비가 되더라도 먹고 살기를 바란다는 역설이 숨어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아~~얼마나 비통한가? 살 길이 없기에 영원히 처와 아들 딸들을 노비로 팔고 나를 팔았단 말인가?
매국노들은 무슨 연유로 나라를 팔았던가? 온 백성을 일제의 노비로 팔고, 호위호식 하지않았던가?

참고. https://www.chosun.com/opinion/2021/07/28/KJBGXXNLUJA5TLFR5IAN44KNA4/?outputType=amp#aoh=16274517486651&csi=1&referrer=https%3A%2F%2Fwww.google.com&amp_tf=%EC%B6%9C%EC%B2%98%3A%20%251%24s

“다섯 냥에 이 몸을 노비로 팔겠나이다” - 1756년 양민 안낭이 [박종인의 땅의 歷史]

“다섯 냥에 이 몸을 노비로 팔겠나이다” - 1756년 양민 안낭이 [박종인의 땅의 歷史] -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7. 스스로 노비를 택한 노비 계약 자매문기(自賣文記)

www.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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