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선정릉)-조선 제11대 중종

인문학과스토리텔링 2020. 12. 5. 18:08 Posted by 문촌수기

정릉(靖陵)ㆍ조선 제11대 중종의 능
정릉은 중종의 단릉單陵이다. 서울 강남구의 선정릉 능원에 같이 있다.
중종中宗(1488~1544, 재위 1506~1544)은 제9대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이후 1506년 박원종元宗 등이 연산군山君을 폐위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연산군대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을 등용하여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고, 향약鄕約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새로운 향촌질서를 확립하였다.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였고,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여 국방체제를 정비하였다. 재위 39년에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의 능침은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石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원래 정릉은 중종이 세상을 떠난 후 1545년(인종 1)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고양 서삼릉) 서쪽 언덕에 등을 조성하고 정릉이라 하였다가, 1562년(명종 17)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능을 옮겼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침이 풍수상 좋지 않아 등을 옮겨야 한다고 했으나, 사실상 문정왕후 본인이 중종과 묻히기를 원하여 등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옮긴 정릉이 홍수 피해가 잦자, 문정왕후의 능은 현재의 태릉泰陵에 조성하였다.

추존왕릉과 왕후릉을 제외하고 왕릉으로 단릉인 것은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과 단종의 장릉 그리고 여기의 정릉 뿐이다.
불행히도 중종은 세 명의 왕비들과 죽어서도 멀리 떨어져있다.
첫번째 왕비는 열 아홉살에 왕비가 되었다가, 고모가 연산군의 부인이었던 까닭에 7일 만에 폐위된 단경왕후이다.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과 드라마 '7일의 왕비'의 주인공이다. 단경왕후는 영조 때에 복위되고, 양주 온릉에 묻혀있다.

 한해가 지났건만 겨울에 들면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서울과 수도부리는 다시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서도 시만들은 마스크를 쓰고 강남 도심 속의 숨터(쉼터 그 이상의)와 같은 왕릉의 숲을 찾았다. 출입구에서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한방향 걷기 안내에 따라 정릉부터 탐방한다.

선정릉은 서울 강남의 중심에 있다보니 산보다 빌딩 숲이 더 높다.

선정릉 가까이 강남의 테헤란로
정릉
시각장애인을 배려한 정릉 입체 조감도, 입체적이라 더욱 실감난다.

참도(향로와 어로) , "향로香路~제향을 지낼 때 혼령을 위한 향이 지나가는 길입니다. 밟지 마시고 오른쪽의 낮은 어로(임금의 길)을 이용바랍니다."
친절한 안내판은 역사산책길에서 예의도 지키고, 문화재도 지키도, 좋은 공부도 된다.

향로와 어로는 잘 다듬어진 난간석으로 두른 듯해서 뚜렷하게 구분되고, 어로로 걷기를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정자각에 오르는 신계(우)와 어계(좌). 신계를 밟지말고, 어계를 이용하라는 안내판이 놓여 있다.
정자각과 사초지를 잇는 신교와 신로
조선국 중종대왕 정릉 비
정릉비 전ㆍ후면 음각 안내서

 

정자각 안에서 올려다 본 능침영역
좌우로 망주석ㆍ문인석ㆍ무인석의 윗부분 볼 수 있다.
문석인ㆍ무석인의 머리가 유별나게도 크다.
예감은 근래에 새로 조성한 것 같다.
신교와 신로
정자각 뒷문에서 사초지를 잇는 신로가 헌릉보다 짧지만 그래도 융건릉 등에서 보는 여느 왕릉보다 긴 편이다.

 정릉 기신제 ;12월 9일
절차; 행렬-전향축례-취위-국궁사배-진선-초ㆍ아ㆍ종헌례-망료-예필

제례 상세 절차

준비의식- 궁궐
예조에서 제관 선정
제례를 행하기 전 임금과 신하가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재계(산재2 일, 치제1일)를 함
전교서에서 축문을 작성하고 왕의 서명을 받아 향축을 전달.

준비의식- 왕릉
임금의 행렬이 궁궐을 나서서 왕릉에 도착하는 행차 의식(거가출궁)
제관들이 재실에서 홍살문까지 이동
홍살문 앞 전향석(향로 香路)에서 전향축례를 행함
제관이 사배하고 손을 씻고 정해진 위치에 나아가는 의식
임금이 제향을 행하기 위해 소여(小輿)를 타고 홍살문 앞에 도착하여 소차(小次)로 들어가는 의식

제례의식
제례 의식 전 전사관(典祀官)과 능사(陵司)가 제수를 진설하는 의식
왕이 정자각의 판위(版位)에 북쪽을 향하여 서는 의식
제관이 손을 씻고 정해진 위치에 나아가는 의식
신에게 초헌관(왕), 아헌관(왕세자), 종헌관(영의정)이 네 번 절하는 의식
왕이 제주를 따르는 것을 살펴보는 의식
신을 모시기 위하여 향을 세 번 피우는 의식
초헌관이 첫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는 의식
축문을 읽는 의식
아헌관이 둘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는 의식
종헌관이 셋째 잔을 신위전에 올리는 의식
신을 보내기 위하여 네 번 절하는 의식
제례에 쓰인 축문을 태우는 의식
임금의 행렬이 다시 궁궐로 돌아가는 행차 의식
전사관과 제관들이 제찬을 거두는 의식

기신제 진설도


선정릉 재실과 오백년 은행나무

재실 옆에 있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이야기 더하기 :
[문정왕후의 질투와 정릉의 천장]
~<신의 정원 조선왕릉>, 이창환. 가져옴

인종은 중종이 위독할 때 늘 먼저 약을 맛보고, 잠자리를 살피는 등 효성이 지극했지만 병약하였다. 상주인 인종의 옥체가 좋지 않으나 수차에 걸쳐 산릉행차를 주장한다. 결국 능역 조영 한 달 후 배알하였다. 인종의 지나친 효심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인종은 재임 8개월 만에 31세로 승하했다. 인종은 조선의 왕 가운데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기록하고, 아버지 중종의 능 옆에 안장됐다.
중종의 능은 오늘날 경기도 고양 서삼릉(西三陵) 능역에 있는 제1계비 장경왕후 (인종의 생모) 윤씨의 능인 희릉 오른쪽 언덕에 동원이강릉으로 모시고, 정자각은 가운데 이설한다. 능호를 정릉 (靖陵)이라 고쳤다. 처음에는 시호를 국가 중흥의 공이 크다 하여 중조(中祖)로 하고자 했으나, 폐왕 연산이 아니라 성종의 대를 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중종으로 결정하였다.
인종의 뒤를 이어 동생 명종(明宗: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명종은 중종이 묻힌 정릉 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일찍이 세조가 며느리 장순왕후의 공릉 터를 잡으면서 직접 이곳에 와 보고 좋은 땅이 아니다 했으며, 당대 최고의 풍수가인 임원준도 불길하다고 했음을 이유로 사림과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62년 8월 22일 정릉을 천장한다. 오늘날 서울 강남구 삼성동이다.
이때 문정왕후와 봉은사 주지 보우가 은밀히 계획하여 봉은사 곁으로 문정왕후에 의해 명종 때 옮긴 것이다. 구릉 터가 득수득파(得水得破)가 좋지 않아 옮긴다는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문정왕후 후손의 번영을 위한
신후지계(身後之計 : 죽은 뒤 자손을 위한 계획)였다.
산릉 일에 승군이 동원된다. 이때는 세종의 외손 임꺽정이 반란을 일으켜 정국이 혼란하여 임꺽정 수배령이 내려졌다. 천릉 후 능호를 정릉이라 하고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으로 다시 고치고 정자각은 원래의 위치에 이설하였다. 이때 신하들은 정자각을 옮기는 것도 성령을 편안치 않게 하는 것인데 18년이 된 중종의 능침을 천장하는 것을 한탄하며 말없이 순종하는 좌의정 총호사 이준경을 들어 '저따위 정승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한탄한다. 신하들이 문정왕후의 압력에 못 이겨 명종이 억지로 천장하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까닭없이 능을 옮기니 백성들도 한탄했다고 한다. 제2계비였던 문정왕후가 사후 남편과 묻히고자, 억지로 제1계비 장경왕후의 희릉과 아들 인종의 효릉으로부터 한강을 건너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옮겼다.
천릉 후, 애달픔이 사림의 울음으로 변했고, 밤이면 경기도 고양에 있는 희릉 숲 속의 울음소리가 한강 건너 정릉까지 이르렀으며, 안개가 세능을 감싸고 구름 속을 떠다녔다고 한다. 모두 정릉의 천장을 슬퍼하는 이야기들이다. 사림들은 "고금을 막론하고 유명을 달리한 남편의 무덤을 옮겨 전처의 무덤과 멀리 떨어지게 하는 투기는 듣지 못했다”며 한탄한다. 천릉 때 한강을 건너는데 비협조적이었던 수원목사가 하옥되고, 경기감사는 파직됐으며, 선창(船槍)들도 협조하지 않아 벌을 받는 이가 속출했다. 천장 후 문정왕후가 선릉과 정릉에 친제를 행하려 하나 조정에서 후비 혼자서는 제례를 할 수 없다 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종의 능을 어렵게 옮겼으나 이곳은 지세가 낮아 장마 때마다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피해를 자주 입었다. 구정릉을 옮긴지 3년이 되었으나 특별히 나아진 것이 없고, 3년 내 변고가 두 번이나 있었다며 명종은 또 다시 천릉하려하나 이루지 못했다.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다. 그토록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으나 정릉이 물이 차고 변고가 끊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문정왕후는 태릉(泰陵)에 단릉(陵)으로 안장되었다.

정릉의 상설은 아버지 성종의 선릉과 장경왕후의 희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무석인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며, 문·무석인 얼굴의 퉁방울 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임진왜란 당시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석호의 익살스러운 입 모양은 보는 사람의 호감을 갖게 한다.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의 가치]
많은 개발 압력 속에도 도심을 지켜 온 조선왕릉은 역사경관림으로서 세계유산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정릉의 정자각에서 바라본 강남의 빌딩숲

선릉과 정릉 주변 지역은 1970년대에 집중 개발되면서 고층 빌딩이 들어서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세계문화유산 실사자도 빌딩 숲과 야경을 보고 감탄했다. 선 · 정릉은 특별히 저녁 9시까지 개장(3월~10월)해 많은 관람객이 찾고 있다.
조선 왕릉은 오랜 세월을 이어온 한국인의 자연관과 장례문화, 40기의 왕릉을 온전하게 보존한 점을 높이 평가받아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다른 나라 왕릉 관리인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왕릉 관리의 어려움으로 도굴을 꼽는다. 세계 학자들도 우리나라 왕릉에 대해 이 문제를 많이 염려했다.
그러나 조선 왕릉은 능역 조영 간소화와 회격실 구조 덕분에 지금까지도 온전히 보존됐음을 확인하고 우리의 보존관리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곳 선 · 정릉만은 예외다.

[임란 중에 왜군에게 도굴 훼손되는 수모]
|1593년 4월 13일 선조 일행이 평안도 가산을 출발하여 박천(川), 안주(安州)에 도착했다. 왜군이 쳐들어와 임란중이었다. 경기좌도관찰사 성영(成泳)이 선릉과 정릉이 파헤쳐져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다고 보고하면서 속히 경성을 수복하자고 한다. 1592년 8월 태릉과 강릉도 왜적 50명과 동원병 50여명이 도굴하려 했으나 회격이 단단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선·정릉은 왜군의 손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선조의 증조부모(선릉)와 조부모 (정릉과 태룡), 친부모의 묘 등 조상의 유택이 파헤쳐진 것이다. 전쟁 통에 일어난 변고라 조정에서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선릉 왕의 능침과 왕비 능침은 광중에 불이 나서 전소됐고, 정릉 현궁은 소실돼 훼손되고, 소실되지 않은 옥체가 있어 중종의 옥체인지 가리고자 송산(松山)에 옮겨져 진의 여부를 가리기 위해 수차에 걸쳐 현직 신
하와 중종 때 신하들과 궁인들을 불러 확인하나 유체가 훼손되고 오래되어 확인이 어렵게 된다. 이때 송산의 유택을 확인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정철, 이항복, 이덕형 등이 심혈을 기울여 확인하나 신빙성이 없어 결국
미확인 옥체는 관에 넣어 깨끗한 곳에 묻었다. 그리고 정릉 광중에 있던 옥체인 성종과 정현왕후, 중종의 유골은 소실된 유회와 재흙을 수습해 각각의 현궁에 봉안하였다.
1593년 7월 27일 임란 중 선조에 의해 선릉이 개장되었다. 이후 9월 29일 선조가 한성에 입성하여 선·정릉을 봉심하였다. 소실된 지석과 옥책은 전주 사고의 실록을 보고 재작성했다. 이렇게 문정왕후의 투기와 법석으로 천장을 하고 병풍석으로 둘러친 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梓宮)이 불타는 변고를 겪었다. 만약 세조의 유시대로 회격실로 조영하고 난간석을 설치했다면 어땠을까?? 때늦은 유감일 뿐이다. 정릉은 조선시대 왕릉 중 바로 옆의 선릉과 더불어 유일하게 도굴되는 수모를 당한 능이다. 특히
중종의 정릉은 천장해 온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문정왕후가 정성들여
만든 능원이라 그 견고함이 대단했음에도 변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광주목사는 하옥되고 경기관찰사는 파직된다. 변고 후 정릉을 옛 터(고양)로 다시 옮기자는 주장도 나왔으나 현장에 재봉안했다.

*광중(壙中): 시체나 관을 묻는 구덩이 속. 광내(壙內). 둔석(窀穸). 지실(地室). 지중이라고 함.
*현궁: 임금의 재궁(梓宮)을 모신 광중(壙中). 현실(玄室)이라고도 함.
*재궁(梓宮): 황제 또는 왕, 황후나 왕후의 관

[정릉의 원찰, 봉은사]
정릉의 원찰인 봉은사는 보우가 주지로 있던 사찰로, 794년 연회국사가 견성사(見性寺)란 이름으로 창건한 이후 1498년(연산군 4년)에 중창하면서 봉은사로 개칭하였다. 조선의 왕실에서는 국가 통치철학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택했으나, 정작 왕실에서는 왕실의 종교로 불교를 믿어왔
고, 능원을 조영할 때 선왕의 안식과 왕권의 영원성을 위해 사찰을 지었다. 이것이 능침사찰이다. 능침사찰은 조선 초기에는 능원마다 한 곳 이상 씩 두었다. 태조 건원릉의 개경사, 신덕왕후 정릉의 흥천사,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의 신륵사, 세조와 정희왕후 광릉의 봉선사, (융릉의 화성 용주사)가 대표적이다.
억불숭유정책의 논리 속에 불교는 성행하지 않았으나 특히 중종 때 문정왕후는 정릉을 삼성동으로 천장하고 두부를 만든다는 이유를 대서 봉은사를 중건하고 번성케 하였다. 이때 봉은사 주지 스님을 병조판서에 앉히고, 조선시대 내내 시행하지 않던 승과시험을 부활하였다. 그리고 승과시험을 봉은사 앞에서 행하기도 했다. 능침사찰은 두부를 만드는 조포사(造泡寺)라고도 한다. 기록에 따르면 능원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두부는 스님 두 분이 만든다. 제례 중 두부가 쉽게 변질 부패해 능원 근처의 스님들이 만들었던 것이다.
ㅡㅡㅡㅡ
*조포사(造泡寺) : 조선시대에는 산릉을 모시면 반드시 근처에 제사 음식을 공급하기 위한 절을 지었는데 이를 조포사라 함.

https://weekly.donga.com/List/3/all/11/90315/1

3명 왕후 7명 후궁 거느렸지만 홀로 안장에 도굴 수모

정릉(靖陵)은 조선 제11대 왕인 중종(中宗, 1488~1544)의 능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번지에 있다. 조선 왕릉으로는 드물게 왕의 무덤만 단출하게 있는 단릉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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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선정릉)-조선 제9대 성종

인문학과스토리텔링 2020. 12. 5. 18:04 Posted by 문촌수기

선릉(宣陵)은 조선제9대 성종(成宗)과 정현왕후의 능이다.
중종의 능인 정릉과 같은 능원을 쓰기에 통상 선정릉으로 불린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예방차원에서 출입구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중종대왕릉부터 시작해서 선릉인 정현왕후 릉, 성종대왕릉, 재실을 찾아간다.

선정릉 능원 산책 안내도

(글은 왕이 선왕을 찾아가는 방향으로 서술 한다.)
선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 보았을 때 왼쪽(서쪽)언덕이 성종, 오른쪽(동쪽)언덕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선릉의 능역 조감도를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설치했다. 참 감사한 일이다. 눈과 더불어 손가락으로도 높낮이를 볼 수있으니 더욱 실감난다.

선릉(동원이강릉) 형태 조감도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은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인수대비)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469년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 정희왕후의 명으로 13세에 경복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경국대전」과「국조오례의표」를 반포해 조선의 법과 예를 완성하고,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관수관급제를 실시해 백성의 부담을 줄였다. 홍문관을 설치하고 「동국여지승람 」 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구와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재위 25년에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현왕후 윤씨(1462~1530)는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 1473년에 성종의 후궁(숙의)으로 간택되었고, 1480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아들 진성대군(중종)의 즉위를 허락하였다.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문· 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병풍석만 생략하였을 뿐 성종의 능침과 같은 형태이다.

선릉의 홍살문 앞의 연인. 코로나19, 이 힘든 시대에서도 사랑의 모습에서 희망을 갖는다.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조성된 성종의 릉
정자각에서 홍살문으로 나가는 참도
제향공간인 정자각에 오르는 향계(좌)와 어계(우)
정자각 뒤로 정현왕후릉로 가는 신로가 길게 이어져있다.

<선릉ㆍ성종대왕릉>

성종과 정현왕후 능의 석물들이 불이 그을렸던지 여러 군데가 시꺼멓게 멍들어있다. 아마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도굴되고 훼손되었을 때의 흔적일 것이다.

무석인과 석마
혼유석과 고석 귀면
문석인과 장명등
병풍석과 난간석, 망주석에도 훼손의 흔적이 뚜렷하다.
고석의 귀면이 도드라져 보인다.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조성된 성종대왕릉
문석인과 석마

<선릉ㆍ정현왕후 릉>

동원이강릉인 정현왕후릉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신로가 길게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 노출된 난간석주는 정현왕후릉 조성당시 또는 이후 보수과정에서 파손된 것을 묻어 둔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관람도가 조성되면서 빗물에 토양이 유실되어 노출 된 것으로 보인다.
병풍석없이 12개 난간석으로 조성된 정현왕후릉
망주석
능을 지키는 석양, 석호의 등도 시커멓게 그슬린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장명등, 성종대왕릉 앞의 것보다 무늬가 더 뚜렷하고 아름답다.
문석인과 무석인
문석인의 석마
우람한 무석인과 대단히 과장된 머리
본붕과 혼유석, 문석인, 무석인 등 상ㆍ중ㆍ하 3개의 단으로 조성된 능침영역

 <실록으로 보는 왕과 비>


경연經筵과 시詩를 사랑했던 임금 (성종)
할아버지 세조世祖(1417~1468)의 뒤를 이어 작은아버지 예종睿宗(1450~1469) 이 제8대 조선의 임금으로 오를 때만해도 잘산군ㆍ者乙山君(성종)은 왕위계승에는 상관없었던 왕손이었다. 그러나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잘산군은 장인 한명회와 할머니 정희왕후의 노력과 합의로 제안대군(예종의 아들)과 월산대군(성종의 친형)을 제치고 제9대 조선의 국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세자 교육을 받지 못했던 성종은 왕이 된 후 비로소 제왕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늦었던 만큼 성종은 열심히 공부했다. 13세에 왕위에 올라 20세 친정을 하기까지 성종은 거의 매일 두 세 차례의 경연ㆍ經筵(임금에게 유교 경전을 강의하고 정책을 논의하던 자리)에 빠지지 않았다. 7년 여 동안 성종의 월평균 경연일수는 25일이 넘었고, 아침과 낮에 열렸던 조강과 주강은 물론 석강과 야대를 합하여 하루에 세 차례, 네 차례에 걸쳐 경연을 실시하였다. 성종의 이 같은 경연 강행군은 신하들과 할머니 정희
왕후도 걱정하였다.

"날씨가 무더우니 하루에 세 번 경연에 나아가는 것은 성체ㆍ聖體를 피로하게 할까
두려우니, 주강을 정지하고 석강에도 편복(평상복)으로 행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라고 건의하자
"내가 촌음을 아끼는데 어찌 주강을 정지할 수 있겠는가? 또 편복을 입고 신하
들을 접견할 수 없다” 하였다.

『성종실록』 권6, 1년(1470) 6월 5일

대왕대비(정희왕후)가 임금(성종)이 책 읽기를 그만두지 않는 모습을 보고서 임금에게 이르기를 “피로하지 않으오?" 하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마음이 저절로 독실하게 좋아하므로 피로한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권9, 2년(1471) 2월 29일

『경국대전』의 완성과 반포,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의 설치, 사림파의 등용 등은 성종의 학문적 성과와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렇다고 성종이 방에 앉아 글만 봤던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성종은 시를 좋아하고 사냥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로맨티스트, 낭만 군주이기도 했다.
성종은 특별히 시를 좋아해 수시로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 올리게 하여 감상했고, 스스로 어제시ㆍ御製詩를 지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성종실록 곳곳에서 시에 대한 성종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찾을 수 있다.

지난번에 주상께서 「풍월정시風月亭詩를 지어 월산대군에게 주시고 『압구정시亭詩」를 지어 한명회에게 주시었는데, 모두 판자板子에 새기어 달았습니다.
『성종실록 권84, 8년(1477) 9월 28일

풍월정ㆍ風月亭은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정자이며, 성종은 평생 월산대군에게 각별한 우애를 보였다. 압구정은 세조 대의 훈구대신이자 성종을 왕위에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던 장인 한명회의 정자로 한강변(지금의 압구정동 한강변)에 있었다.

월산대군 이정이 내전ㆍ內殿에서 선온ㆍ宣醞(하사받은 술)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은호ㆍ銀壺가 세 개였다. 양면兩面에는 금으로 글자를 썼는데, 혹은 오언시五言詩이거나, 혹은 칠언시七言詩이었다. 그 제목題目에 이르기를, '형과 함께 기뻐한다. (與兄歡 여형환] 하였고, 또 이르기를, '형을 위하여 짓는다. [爲兄作 위형작] 하였는데, 모두 어제시御製詩이었다. 왕이 전교하기를

“(월산)대군에게 은호銀壺에 시를 새겨서 주려고 했는데, 뜻하지 않게 대군이 나가서 경 등에게 보여주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그러나 경 등은 그 운韻에 의하여 화답하도록 하라.” 하니, 이조 판서 서거정, 병조판서 유지, 이조참판 김유, 병조참판 어세겸, 도승지 김계창 등이 모두 화답하여 바쳤다.
『성종실록』권123, 11년(1480) 11월 5일

영돈녕 윤호의 생일이므로 주악酒樂과 진수珍羞를 풍족하게 내려 주고 임금이 어제시御製詩 한 편을 손수 써서 비밀히 중관을 보내어 내려 주며 이르기를,
“감히 시라고 지은 것이 아니라, 경이 한 번 즐기고 웃는 데 이바지할 뿐이니, 외인
에게 보이지 말 것이다.” 하였다.

『성종실록』 권235, 20년(1489) 12월 13일

효성이 지극했던 성종은 대왕대비 정희왕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시를 지어 올렸다.

오늘 왕모의 잔치를 와서 여니
마음은 노래자老萊子의 장난보다 더 합니다.
축수하는 술잔에 취했으나 은혜 어찌 갚으리이까
아침저녁 장구히 어김없이 받들리이다.

『성종실록 권 148, 13년(1482) 11월 11일

*선온ㆍ宣醞 : 국왕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술. 국가의 주요 임무나 행사를 마친 후 국왕이 수고한 신하를 위로하기 위해 내리는 술을 선온이라 하였다. 선온의 구체적인 의식은 <국조오례의> 「사신급외관수선로의」에 실려 있다.

*노래자ㆍ老萊子 : 중국 초나라의 현인으로 70세에 색동옷을 입고 부모님 앞에서 재롱을 부렸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여담이지만, 외국인을 위한 선릉 안내판에 선릉을 'Seolleung(설릉)'으로 표기하였다. 헌릉(헐릉), 인릉(일렁)도 그렇고, 도로 이정표에도 마찬가지이다.'꼭 이래야만 하나' 싶다.
'Seonleung'이라 표기하고 발음은 그들에게 맡길 일이다. '선릉, 헌릉, 인릉'으로 발음을 할려면 왜 못할까? 그래도 굳이 발음규칙을 바꾸어 한다면, 앞의 받침을 따라 뒤의 초성을 발음했으면 한다. '선능, 헌능, 인능' 이렇게.

 <강남개발과 선릉>

[강남 개발의 초석은 연산군?]
정조 때 편찬된 춘관통고에 의하면 선능의 능역은 동으로 5里, 남으로 4里, 서로 3里, 북으로 3里로 둘레가 20里에 이른다. 조선말기까지 동으로 고덕, 남으로 수서의 광평대군 묘까지, 서로 사당의 효령대군 묘 사이, 북으로 한강북쪽 까지는 사가의 무덤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면적이 상당하다. 그러나 이곳은 1970년대 중반부터 강남 개발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녹지로 사가의 무덤과 마을이 없어 개발이 용이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강남 개발의 초석은 연산이 만들었다고 하겠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뒷 이야기]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면서 국내 학자들 간에는이곳 선릉지역 등 일부 훼손된 능역은 제외하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러나 2차에 걸쳐 국제학자들과 학술대회를 하고 이곳 선릉에 들렀을 때 강남 개발의 내용과 주변의 지가 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학자들은 이와 같이 개발 압력이 많고 지가가 높은 지역에 문화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국민적 정신이 세계유산감”이라고 평하면서 조선시대의 모든 능을 등재 신청하여 연속유산으로 하는 게 좋겠다.
고 조언했다. 이러한 격려에 힘을 얻어 국내학자들과 주무부서인 문화재청은 약 1885만m²(570여만 평) 15개 지구의 조선왕릉 모두를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성종의 대여(大奧 : 국상에 사용되는 큰 상여)가 한강을 건널 때 저자도(格子島) 아래 배 4척을 연결하여 건너갔다. 대여가 한강을 건널 때는 물이 줄었으나 건너자마자 강물이 창일(議)18하여 사람들이 탄복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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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임 때 같은 학교, 총각 선생님들.
30여년지기 친구가 되었죠. 그 때의 친구가 가평으로 초대했어요. 대전의 친구가 내게 들러 같이 갔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좋다는 거죠.
오랜만에 하는 윷놀이가 어찌나 즐겁던지 늦게까지 놀았어요.  이튿날 아침엔 늦잠자고 천천히 천천히 새소리에 일어났네요. 자연 가까이 전원 생활이 이래서 좋은가봅니다.
빵과 커피로 정신을 깨우고 봄 햇살 아래,  가평천을 산책했습니다. 마침 이곳은 벚꽃 스타팅.
백로와 가마우지가 이야기 거리를 지어내고, 물소리는 재미있게 그 이야기 들려주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니 아쉽네요. 그래도 참 좋아서 그 이야기를 붙잡아 그림으로 남겨봅니다. 산아래 자작나무와 선린마을의 친구 집도 간직해봅니다. .

새삼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논어>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 하거늘,
'그림 그리기는 흰바탕을 마련한 뒤의 일이다'가 맞나요? '그림 그리기의 맨 나중 일은 흰색 칠하기이다'가 맞나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했지만 벚꽃 그림을 그리다 보니 후자가 맞는 말 같네요. 전후가 다 맞다면 시종일여(始終一如)하라는 거겠죠.
내가 그린 저 흰 새들은 백로일까요? 왜가리일까요? 백로는 가마우지와 벗이 되어 평화롭습니다. 가평천의 백로와 가마우지 우화를 상상해봅니다. 장자의 '학다리 오리다리' 같이 끔직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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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을 다하여라.

영화 <역린>은 <중용> 23장에서 시작해서 <중용> 23장으로 끝난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其次는 致曲 曲能有誠이니, (기차 치곡 곡능유성)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성즉형, 형즉저, 저즉명)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명즉동, 동즉변, 변즉화)

 唯天下至誠이 爲能化니라. (유천하지성 위능화)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 한국전통문화연구소 성백효 역주
그 다음은 한쪽을 지극히 함이니,
한쪽을 지극히 하면 능히 성실할 수 있다.

성실하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더욱 드러나고
더욱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化)할 수 있으니,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능히 화할 수 있다.


[영화의 개요] : 조선 22대왕 정조 암살을 둘러싼 '정유역변' 실화를 모티브로 만든 영화

[영화의 줄거리]

인시(寅時) 정각(오전 3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 1년,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정조(현빈). 정조가 가장 신임하는 신하 상책(정재영)은 그의 곁을 밤낮으로 그림자처럼 지킨다.
 
 인시(寅時) 반각(오전 4시)
 날이 밝아오자 할마마마 정순왕후에게 아침 문안인사를 위해 대왕대비전으로 향하는 정조. 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금위영 대장 홍국영(박성웅)과 상책이 그의 뒤를 따른다.
 
 묘시(卯時) 정각(오전 5시)
 ‘주상이 다치면 내가 강녕하지 않아요.’ 노론 최고의 수장인 정순왕후(한지민)는 넌지시 자신의 야심을 밝히며 정조에게 경고한다.
 
 묘시(卯時) 반각(오전 6시)
 정조의 처소 존현각에는 세답방 나인 월혜(정은채)가 의복을 수거하기 위해 다녀가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김성령)이 찾아와 ‘지난 밤 꿈자리가 흉했다’며 아들의 안위를 걱정한다.
 
 진시(辰時) 육각(오전 8시 30분)
 한편 궐 밖, 조선 최고의 실력을 지닌 살수(조정석)는 오늘 밤 왕의 목을 따오라는 광백(조재현)의 암살 의뢰를 받게 되는데…
 
 왕의 암살을 둘러싸고 살아야 하는 자, 죽여야 하는 자, 살려야 하는 자들의
 엇갈린 운명의 24시가 시작된다!
                                                 - 네이버 영화에서

 

중용 23장 집주 > 其次通大賢以下凡誠有未至者而言也 致推致也 曲一偏也 形者積中而發外 著則又加顯矣 明則又有光輝發越之誠也 動者誠能動物 變者物從而變 化則有不知其所以然者 蓋人之性 無不同 而氣則有異 故惟聖人能擧其性之全體而盡之 其次則必自其善端發見之篇而悉推致之 以各造其極也 曲無不致 則德無不實 而形著動變之功 自不能已 積而至於能化 則其至誠之妙 亦不異於聖人矣 右第二十三章 言人道也

그 다음이란 대현(大賢) 이하로 무릇 성실함에 지극하지 못함이 있는 자를 통틀어 말한 것이다. 치(致)는 미루어 지극히 함이요, 곡(曲)은 한쪽이다. 형(形)은 속에 쌓여 밖에 나타남이요, 저(著)는 또 더 드러남이요, 명(明)은 또 광휘의 발월(발산)함이 성(盛)함이 있는 것이다. 동(動)은 실함이 남을 감동시킴이요. 변(變)은 남이 따라 변하는 것이요. 화(化)는 그 소이연을 모름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성(性)은 같지 않음이 없으나 기(氣)는 다름이 있다. 그러므로 오직 성인만이 그 성의 전체를 들어 다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반드시 선한 단서가 발현되는 한쪽으로부터 모두 미루어 지극히 하여 각각 그 지극함에 나아가는 것이다. 한쪽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으면 덕이 성실하지 않음이 없어 형저동변(形著動變)의 공효가 저절로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쌓여 능히 화(化)함에 이르면 지성(至誠)의 묘(妙)함이 또한 성인(聖人)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3장 전후를 더불어 읽어본다.
21장 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자성명 위지성 자명성 위지교 성즉명의 명즉성의)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짐을 성(性)이라 이르고 명(明)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짐을 교(敎)라 이르니, 성실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실해진다.

 

22장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 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유천하지성 위능진기성 능진기성즉능진인지성 능진인지성즉능진물지성 능진물지성즉가이 찬천지지화육 가이찬천지지화육 즉가이여천지참의)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능히 그 성(性)을 다할 수 있으니, 그 성(性)을 다하면 능히 사람의 性을 다할 것이요, 사람의 性을 다하면 능히 물건의 성을 다할 것이요, 물건의 성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것이요,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천지와 더불어 참여하게 될 것이다.

24장 至誠之道 可以前知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孼 見乎蓍龜 動乎四體 禍 福將至 善 必先知之 不善 必先知之 故至誠 如神(지성지도 가이전지 국가장흥 필유정상 국가장망 필유요얼 견호시구 동호사체 화복장지 선 필선지지 불선 필선지지 고지성여신)

   
지성(至誠)의 도는 일이 닥쳐오기 전에 미리 알 수 있으니, 국가가 장차 일어나려 할 적에는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요괴스런 일이 있어, 이것이 시초점과 거북점에 나타나며 사체(四體)에 動한다. 그리하여 화와 복이 장차 이를 적에 좋을 것을 반드시 먼저 알며 좋지 못할 것을 반드시 먼저 안다. 그러므로 지성(至誠)은 신(神)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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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 TV에서 영화 <관상>을 보았다.
마지막 송강호의 대사,
"내가 사람의 얼굴을 보았으되 정작 시대를 보지 못했단 말이요.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볼 뿐 파도를 만드는 바람을 못 본 거지"라는 말을 듣자마자,
내 눈귀에 고향 바다의 풍랑(風浪)이 그려지고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지눌의 《수심결(修心訣) 명구가 떠오른다. 물론 <관상>과는 연관성이 없지만. 

"바람은 그쳤건만 파도는 여전히 솟구치듯,
진리는 훤히 드러났으나 망상이 여전히 침노하누나."
풍정파상용(風停波尙湧) 이현념유침(理現念猶侵)"

바람을 본다는 것은 세상을 본다는 것이며, 미래를 본다는 것이다.

지눌(知訥 1158~1210)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하였다. 본래적 자기가 곧 본불성(本佛性)임을 홀연히 깨치고(돈오) 난 이후에도, 계속하여 무명(無明)의 습기(習氣)를 제거키 위해 꾸준히 닦아야(점수)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비유하여 '바람은 그쳤으나 파도는 아직도 일렁인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아직도 일렁이는 파도가 모두 잔잔하여 바다가 삼라만상을 모두 비칠 수 있을 때까지 수행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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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캠프에서 담소 중에
이중섭 화백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의 생을 너무나 '신산하다'했습니다.
'辛酸, 맵고 시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는 긍정과 희망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 중, '벚꽃 위의 새'를 이야기하면서, 달빛 아래에 앉아 커피필터지에  수채물감으로 끄적였습니다.
아?, 이 집 안주인이 매화꽃을 무척 좋아한다기에, '야매(野梅)'라 농하면서 벚꽃 대신 '야매꽃에 앉은 새'라 제목하며 그렸습니다.
세상사 알고보면 다  '그래서 그랬구나'
고개 끄덕이게 됩니다. 꽃 잎 지는 까닭은 모두 제 향기로 나비를 부른 탓입니다.
슬캠지기 조 선생님이 반기며 이 낙서를 받아주셨네요. 별거도 아닌 것을 받아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그냥'이라며 장난삼아 낙관을 대신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그래서 그랬구나"를 끼적였습니다.

슬로우 캠프에 매화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떨어져 있습니다.
도회지에서 사람과 일에 지친 안주인이 이곳으로 들어와서 매화 그림을 '미친듯이' 그렸답니다. 설매, 홍매, 황매에 청매, 야매(夜梅ᆞ野梅)까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잎 그림자까지 슬캠에 내려 앉아 있습니다. 그랬더니 슬캠이 온통 매화도가 되었네요.
어디 대가가 따로 있나요? 
여기 매화천지 슬로우 캠프에서는 절로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슬로우 캠프 010-2237-2116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운학리 614-3
아? 수주면이 '무릉도원'으로 개명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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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개비 2018.10.04 0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수석님 답습니다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나며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보는 기분입니다. 슬캠이.. 슬캠의 매화꽃이 봄이 아닌데도. 봄처럼 꿈처럼 무릉도원처럼
    무릉매원으로 되살아나네요
    수석님 글로 인하여
    온통 매화꽃으로 휘날리는 슬캠의 뜨락으로 다시 달려가고싶습니다

  2. 안개비 2018.10.04 0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중섭(1916-1956), 한국  최고의 화가
그의 그림에서 분단과 이산의 상흔을 읽는다.
한민족 정체성 3대 키워드
'소ᆞ가족ᆞ어머니'
이 셋에 더해 진 '긍정'이다.

하나. 백의민족, 한민족을 닮은 흰소.
1955년, <흰 소>ㅡ 저 오른쪽 앞 발에 진취가 있다. 이중섭은 자화상을 그린 것이며 민족을 그린 것이다.

둘.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1954년, <길 떠나는 가족>
ㅡ다시 만나 행복한 가정을 가꿀 것을 희망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야마모토 마사꼬, 일본 사람이다.
일제시대에 만나 사랑하고 해방되기 직전 결혼하여 북한 원산에서 살다 한국전쟁 중에 두 아이를 데리고 서귀포 부산 피난 생활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살면서 이중섭과 헤어졌다. 전쟁은 가정의 행복을 앗아갔다. 그래도 이중섭은 꿈을 꾼다. 언젠가 다시 만나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1954, 가로 64.5㎝·세로 29.5㎝). 이중섭이 일본인 아내 이남덕 여사와 아들 둘이 탄 소달구지를 이끌고 있다. 생이별한 가족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싶은 바람을 경쾌한 움직임과 색채로 표현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셋. 한국전쟁 중 북녘 원산에 홀로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의 생사도 모른다. 어머니는 두 손주와 며느리를 중섭과 함께 피난가라며 부랴부랴 등을 떠 밀었다. 다시 만날 것이라며 그림도구만 챙겨 떠나온 것이 영원한 생이별이 되었다. 전쟁과 분단은 가족을 해체 시켰던 것이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생각하면 평생에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이었다.
1956년, <돌아오지 않는 강>
마릴린 먼로의 주연의 영화 제목과 같다.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 올 것을 기다릴텐데, 가지 못하는 자신에게 가학하듯이 아들이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흰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어머니는 저 만치서 돌아오는데 창을 열고 기다리던 아들은 그리움에 지쳐 있다.
이 그림을 그린 같은 해에 이중섭은 생을 마감하였다. 어쩌면 저 세상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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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다가 '성학십도' 병풍을 비치해 놓고 있다. 율곡학파는 '고산구곡도(高山九曲圖)' 병풍이었지만, 퇴계학파는 '성학십도' 병풍을 지니는 것이 전통이었다. 내가 지니고 있는 성학십도 병풍은 서예가의 손으로 쓴 붓글씨가 아니고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었던 성학십도 목판본에다가 먹물을 발라서 찍어낸 것이다.

퇴계학파는 아니지만 이 병풍을 거실에 쭉 펼쳐 놓고 있으면 문자의 향기가 서서히 집 안에 퍼지는 것 같다. 그 병풍 앞에 방석을 놓고 앉아 있으면 퇴계 선생의 '철학 그림'인 십도(十圖)가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혼자서 차를 한잔 끓여 마시면서 눈을 감고 있으면 머릿속으로 들어온 그림들이 다시 아랫배로 내려가는 듯한 착각을 한다. 그러면 만족감이 온다. '아! 나는 조선 유학의 전통을 아직 잊지 않고 있다'는 보수적 자존심이다.

이번에 한형조(60) 교수가 '성학십도' 해설서를 내놓았다. 퇴계가 평생 공부한 내용을 참기름 짜듯이 압축한 결과물이 성학십도라서, 일반인들은 그 내용과 맥락(context)을 깊이 있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수재라고 소문난 한 교수가 성학십도를 떡갈비 만들 듯이 잘게 씹어서 책을 낸 것이다. '해묵은 사상이 현대의 우리에게 아무런 자양도 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이다.

'외래의 관점들이 본격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그저 밀려왔다가 유행처럼 다시 썰물로 빠져나간다. 우리는 무엇에 기초하여 문화적 이상을 세우고 문법을 만들어 갈 것인가!'는 탄식에 나도 아주 공감한다. 성학십도의 핵심은 9장 '경재잠(敬齋箴)'이다. 선비 정신의 핵심은 존중과 배려에 있다는 내용이다. 나와 타인, 자연에 대한 존중과 배려 말이다.

그게 경(敬)이다. 지금도 88세 된 퇴계 종손은 종택을 찾아오는 10대 후반의 학생들과 이야기를 할 때에도 항상 무릎을 꿇은 자세이다. 상대방에게는 편히 앉으라고 권한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무릎 꿇는 자세가 평생 습관이 되어 익숙하다고 한다. 경재잠의 정신이 400년 넘게 그 후손에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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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神 계보는 줄줄 외면서… 삼국유사는 왜 안 읽나요"
문화 유석재 기자
입력 2018.08.07 03:01
삼국유사ㅡ스크랩
문체부 장관 지낸 최광식 교수 '삼국유사의 신화 이야기' 펴내

최광식(64)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맡고 있던 2010년, '그리스의 신(神)과 인간' 특별전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그리스 신 계보를 줄줄 외우는 거예요. 아~ 이것 참, 답답하더라고요. 우리나라에도 신화가 있는데 그건 통 모르고 말이죠…."

그가 말하는 '한국 신화의 보고(寶庫)'는 바로 '삼국유사(三國遺事)'다. "서양문화의 뿌리가 그리스·로마 신화라면, 우리 민족문화는 그것을 '삼국유사'에 실린 건국 신화와 시조 신화에서 찾아야 합니다." 최 교수는 최근 단행본 '삼국유사의 신화 이야기'(세창출판사)를 냈다. 고려대출판부에서 박대재 교수와 '점교 삼국유사'(2009), 역주본 '삼국유사'(전 3권·2014)를 내고 '읽기 쉬운 삼국유사'(2015)를 쓴 데 이어 네 번째 '삼국유사' 작업이다.

최광식 교수가 도깨비 문양 고구려 와당의 복제품을 들고 활짝 웃었다. '삼국유사'는 우리 토착 신앙이 불교와 어떻게 융합됐는지 잘 보여주는 사료다.
/장련성 객원기자

왜 '삼국유사'인가? "흔히 '삼국사기'가 정사(正史)이고 '삼국유사'는 야사(野史)로 봅니다. 하지만 이 구도는 잘못됐습니다." 일연 스님은 고대의 역사와 불교, 신화와 설화·향가를 비롯한 민족의 문화유산을 남기고자 '삼국유사'를 썼다는 것이다. "무미건조한 '사기'에 비해 '유사'는 생동감이 넘치는 인간의 모습과 감칠맛 나는 정서가 담겨 있지요."

이를 깨달은 것은 고려대 사학과 학생 시절 '두 책을 비교하라'는 과제를 수행하면서였다. 그는 '삼국유사'를 평생 공부하겠노라 마음먹고 석사 논문을 썼는데, 당시 그의 논문을 둘러싸고 '이걸 과연 역사학 영역으로 봐야 하느냐'를 논의하는 학과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이번 책 '삼국유사의 신화 이야기'에서 최 교수는 "신화란 단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문화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했다. 신화에 나타난 '코드(code)'를 잘 들여다보면 실제 역사가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는 사실상 그 아버지 환웅이 중심이 된 '환웅 신화'인데, 신단수에서 세상을 연 일종의 천지창조 신화 속에서 곡식과 쑥·마늘을 가진 '농경 세력'의 등장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토착 세력인 호랑이는 수렵 종족, 곰은 수렵에서 농경으로 전환하는 단계의 종족을 상징하고 있다.

"신라의 석탈해와 가야의 허황옥 신화는 해양 세력의 유입을 보여주는 단서이지요. 김알지 신화는 발달한 철기와 제련 기술을 지닌 북방 세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주인공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천강(天降) 신화를 북방계, 알에서 태어났다는 난생(卵生) 신화를 남방계로 나눠 '한국 신화는 대부분 남방계'로 본 과거 일본인 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했다. 부여·고구려·신라·가야 모두 '천강'과 '난생'의 요소가 혼합돼 있다는 것이다. 중세에 이르러 신화는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갈리는데, 왕건 신화에는 '용'이 등장하는 반면 견훤 신화의 주인공은 '지렁이'로 격하된다.

문화재청장과 문체부 장관을 지낸 최 교수는 장관 시절 만난 작가들이 '우리나라엔 스토리텔링의 원천이 없다'고 푸념하면 정색을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좀 읽어 보고 말씀하시죠!"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던 시절엔 "'삼국유사'가 없었더라면 무엇을 가지고 고조선·부여·발해가 우리 역사라고 할 수 있었을지 아찔했다"고 했다. 최 교수는 '삼국유사'의 다섯 번째 작업으로 오는 가을 제자들이 쓴 다양한 분야의 논문집을 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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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경지 ㅡ스크랩

인문학과스토리텔링 2018. 8. 13. 09:00 Posted by 문촌수기
ㅡ이내옥 미술사학자·'안목의 성장' 저자.

조선시대 서화의 역사를 보면 궁극에는 추사 김정희로 수렴한다. 추사는 당시 동아시아 최고 지성으로서 모든 것을 갖춘 인물이었다. 55세에 뜻하지 않은 제주 유배를 겪는데, 쓰라림으로 점철된 그때부터가 진정한 추사 예술과 정신의 시기였다.
추사는 자부심이 대단해 오만에 가까웠다. 거기에 원한과 분노의 불길이 끼얹어졌다. 그러나 유배가 길어지면서 그것도 서서히 녹아내렸다. 여기에서 문인의 지조와 절개를 표현한 '세한도'가 나왔다. 그림 속 나무는 나무가 아니고, 집은 집이 아니다. 그것은 오만과 분노의 껍데기를 뚫고 들어가 마주친 자아의 처절한 고독이고, 그 강력한 주장이다. 동양 회화는 문인화의 두 거장 황공망과 예찬이 출현해 그 극점을 찍었다.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뒤 추사가 그들에게 필적하는 작품을 낸 것이다.
추사는 제주 유배에서 9년 만에 풀려났다. 다시 북청으로 유배돼 2년여를 보내고 돌아와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북청 유배 어간에 그린 '불이선란도'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판전' 글씨는 '세한도' 단계에서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갔다. '불이선란도'는 '세한도'에서 보이던 강력한 자기주장이 사라지고, 평생 추구했던 서예 정신 '괴(怪)'의 완성이었다. 일부 자부심의 찌꺼기가 남아 있긴 하지만, 자비의 눈으로 자신을 관조하고 있다. '판전' 글씨에 이르러서는 죽음을 예감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해탈의 경지를 보여준다. 지금껏 추구해온 예술을 부정하고 초월하여 진정한 자유를 실현했다.
추사는 숨을 거두기 사흘 전까지도 일상생활을 이어갔다. 불교 수행의 높은 경지였다. 당시 추사는 간화선(看話禪·화두를 사용해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선)을 격렬히 비판했다. 간화선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추사의 주장에 대해, 한국 현대불교는 답을 해야 할 처지이다.
http://m.chosun.com/news/article.amp.html?sname=news&contid=201808070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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