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지긋지긋한 경자년이 지나가고 드디어 신축년 새해가 왔다. 그간 우리는 코로나19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버려지고 부서지고 잊혀지고 무너졌다. 많은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고, 놀이터에서 아이들 소리가 사라졌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잊혀지고,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부르는 노래 소리는 그쳤다. 가족과도 헤어지고 급기야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게 입을 닫아야했다. 가슴 조이며 그래도 낙관하며 잘 견뎌 왔다. 달리 방법이 없다. 그래도 나 혼자 희망의 노래를 불러본다. 이 모든 게, 내 탓은 아니라고 위로하며, '이 또한 지나가겠지'라며 긍정해본다, 너무 애쓰지도 말고 그냥 흘러가는대로 순리에 맡기자며 내버려 둔다. 조급하지도 말며 다시 찾겠다며 억지 부리지도 말자며 달래본다. 버려지는 커피여과지에 말라버린 낙엽으로 <렛잇비> 노래그림 그린다. "Let it be, 무위(無爲)하소서"라며, 신축년 연하장으로 대신한다. 광명과 평화의 2021년 소띠 해를 기원하며.
<Let it be > 노랫말 해석 ㅡ (VOA, 팝스 잉글리쉬 부지영) (1절)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으면 Mother Mary comes to me 어머니 메리가 내게 와서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지혜의 말씀을 해주시죠, 그냥 내버려두라고 And in my hour of darkness 그리고 내가 암흑의 시간 속에 있을 때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어머니 메리는 바로 내 앞에 서서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지혜의 말씀을 해주시죠, 그냥 내버려두라고 (후렴) Let it be, let it be 그냥 둬, 그냥 내버려두라고 Let it be, let it be 그냥 둬, 그냥 내버려두라고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지혜의 말씀을 속삭여 주죠, 그냥 내버려두라고
(2절) And when the brokenhearted people 세상의 모든 상처입은 사람들이 Living in the world agree 함께 아파할 때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해답이 있을 거에요, 그냥 내버려두라고….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비록 그들이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깨달을 기회는 아직 있어요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해답이 있다는 걸…. 그냥 내버려두라고 (후렴×2)
(3절)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구름이 잔뜩 낀 밤에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날 비추는 한 줄기 빛이 있어요 Shine on until tomorrow, let it be 내일까지 비칠 거에요, 그냥 내버려두세요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 음악 소리에 잠을 깨죠 Mother Mary comes to me 어머니 메리가 내게 와요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면서, 그냥 내버려두라고 (후렴×2)
내 부족한 하모니카 연주를 음원으로, 내 친구 바리톤 김영후 선생님이 노래로 날개를 달아주셨다.
나의 십팔번, 이문세의 '옛사랑' 노래를 부르며 눈 오는 날 광화문 거리를 찾아가고 싶지만 말문이 막혀서. 이 시대는 촛불을 켜고 반대의 함성이 가득했던 광장을 비워야 하며 반대는 커녕, 입 다물기를 강요 받으며 살아야 하나보다. 코로나19바이러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시대 임금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의 심기를 상하게 해서는 안되는 또 다른 이유가 또 있구나. 국민과 소통하겠다며 광화문 앞으로 내려오겠다는 공약은 空約이 되고. 방역과 경호의 철옹성을 쌓아 스스로 여는 말문조차도 뜸하다.
이문세 노래그림, 광화문 연가(좌)ㆍ옛사랑(우)
그래도 노래 부른다. 내 마음대로 노래라도 부르며 추억속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그린다. 광화문 연가와 옛사랑을 좌우로 나란히 그려 두니 보기도 좋지않나? 하늘에 복을 빌며 기도하는 좌우의 합장이다. 내리는 흰눈으로 반칙과 거짓과 위선과 독선을 씻어내고 깨끗한 새해를 소망해본다. * 이문세 노래에 맞춰, 하모니카 연주> HOHNER 다아이토닉, 크로스오버 Akey
눈 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길, 덕수궁 돌담길, 정동골목 언덕길. 동생이 고향을 떠나 총각때부터 18년 동안 생활했던 경향신문사를 찾아 올라갔던 그 골목길. 함께 걸었던 추억을 떠올려본다. 떠나온 고향보다 오래 살았던 서울 생활. 동생은 가끔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디가 내 고향일까?", 하기사 우린 어디에 살던 나그네이다. 일산에 살다가 동탄으로 이사를 올 적에도 가장 그리울 것 같아 떠나야 할 발길이 머뭇 거렸던 곳이 이곳, 광화문 네거리(세종대로, 종로) 였다. 새해에는 마스크 벗고 같이 노래하며 다시 이 길을 걸어보리라 희망한다.
<광화문 연가> 이제 모두 세월따라 /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다정히 걸어가던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 세월을 따라 따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 곳에 /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 세월을 따라 따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내린 광화문 네거리 이 곳에 /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언젠가는 우리 모두 / 세월을 따라 따나가지만 언덕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 ㅡㅡㅡㅡㅡ 노래따라 그림따라 걷는 추억과 역사의 현장 덕수궁 - 서울시립미술관 - 정동극장 - 정동제일교회 - 구 러시아 공사관 터 - 이화학당 - 경향신문사 - 돈의문터 - 경교장(강북삼성병원) - 홍난파가옥과 월암공원 - 인왕산 한양도성 곡장과 성곽길 정상
개화기 당시 한성부, 덕수궁 주변 - 오른쪽 하단의 황단(皇壇)이 대한제국 선포 뒤 하늘에 제사드리는 환구단이다.
스크랩1> 망국의 현장 덕수궁과 석조전. 서울 중구 정동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이 있습니다. 덕수궁 안에는 최초의 서양식 석조 건물이 있는데요. 최근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는 가상현실(VR) 영상으로 제작한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을 내년 1월까지 홈페이지에 공개한다고 밝혔어요. 석조전은 서울 덕수궁 안에 대한제국 황제와 황후의 생활 공간을 만들어 놓은 서양식 궁전입니다. 비운의 한국 근현대사가 농축된 장소이기도 하죠. ◇한양 한복판에 지은 서양식 건물 1896년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은 1년 만에 돌아옵니다. 일본군이 점령한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을 정궁(정식 궁궐)으로 삼고, 대한제국을 선포해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지요. 이해인 1897년에 설계를 시작한 덕수궁 안의 전각이 석조전이었습니다. 영국인 재정고문 존 맥리비 브라운이 발의해 13년 동안 건물을 짓게 됩니다. 자신이 살 서양식 궁전을 건설했다는 데서 고종의 근대화 의지를 읽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어요. 설계를 맡은 사람은 영국인 건축기사 존 레지널드 하딩이었어요. 하딩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그리스 풍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석조전을 설계했죠. 여기에 유럽의 식민지였던 동남아 지역의 기후에 맞춰 베란다를 설치했죠. 지층을 포함해 3층 석조 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의 장대한 규모였죠. 석조전은 조선의 궁궐이 왕의 침소와 업무 공간으로 분리됐던 것과 달리 두 기능을 통합했습니다. 1층엔 접견실과 홀, 2층엔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거실이 있었어요. ◇궁궐 완성 석 달 전 나라는 망하고 1910년 12월 1일 석조전이 완공됐습니다. 그러나 ‘황제와 황후’는 이곳으로 들어와 생활할 수 없었습니다. 석조전이 완공되기 석 달 전인 8월 29일 일본과 강제병합되면서 나라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황제도 황후도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대한제국이 건립된 해에 설계를 시작한 궁궐이 그 대한제국이 멸망한 해에 완공된 것입니다. 1907년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뒤로 덕수궁을 거처로 삼고 있던 고종은 “서양식으로 생활하려니 영 불편하다”며 입주하지 않았어요. 고종 입장에선 자신의 근대화 노력이 좌절된 상징으로 보였을지도 몰라요. 석조전에는 정식 이름이 붙지 않았어요. 조선 시대 궁궐의 전각 이름에는 깊은 속뜻이 있습니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에 ‘부지런히 정치함’, 덕수궁의 중화전(中和殿)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란 의미가 있죠. 하지만 석조전은 그냥 ‘돌로 지은 건물’이란 뜻입니다.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던 우리 전통 건축물과 다르다는 의미가 그대로 건물 이름으로 굳어진 셈이죠. ◇좌절된 근대화, 망국, 그리고 분단 이후 석조전은 귀빈 접대나 만찬을 여는 건물로 가끔 사용됐고, 일본에 볼모로 가 있던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잠시 고국에 올 때마다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1922년 5월 11일 이곳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어요. 영친왕과 일본인 왕비 사이에서 난 장남이자 왕실의 후계자였던 이진이 생후 9개월도 되지 않아 이곳에서 갑작스럽게 구토를 하고 열이 오른 끝에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1930년대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석조전 옆에 새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서관(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지어 이왕가미술관을 만들었고, 원래 석조전에는 일본 미술품들을 전시했습니다. 광복 후인 1946년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가 석조전에서 열렸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반도 문제 해결을 논의하는 자리였지만, 신탁통치 문제로 의견 대립을 보인 끝에 1947년 결렬됐습니다. 좌절된 근대화와 망국(亡國)의 한을 품은 장소에 이번엔 분단의 아픔이 더해진 셈이죠. 이후 국립박물관과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되던 석조전은 2014년 복원 공사를 마치고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스크랩2> 한국최초의 감리교회 정동제일교회
서울정동 감리교회
1884년 여름, 조선을 방문한 맥클레이(Mcclay,R.S.)는 고종으로부터 선교 윤허를 받았다. 당시 맥클레이는 일본에 체류 당시 친분을 맺었던 김옥균(金玉均), 미국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Foote,L.H.)와 동반하여 고종에게 선교의 뜻을 전하였다. 고종은 병원과 학교를 먼저 개설하고 점차 선교할 것을 권하였다. 한편, 1884년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甲申政變)에서 왕실의 외척 민영익(閔泳翊)이 개화당의 습격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이때 선교사 알렌(Allen,H.N)이 그를 치료하였는데, 이 일로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한 왕실의 신임이 커졌다. 조선 선교를 위하여 선교사 파송을 염두에 두고 있던 감리교와 장로교에서는 각각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보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를 통하여 조선에 첫 발을 디뎠다. 당시 언더우드는 서울에 입성하여 제중원 교사로 활동을 시작한 반면, 아펜젤러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인천에 머물다 1885년 4월 13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같은 해 6월 20일, 아펜젤러는 다시 한국을 찾았고 인천에 머무르다가 6월 28일 외국인을 위한 한국 최초의 감리교 예배를 인도하였다. 최초로 풍금을 들여와 찬송과 예배를 봉헌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889년 서울에 선교의 터를 구축한 감리교 선교사들은 곧 인천 선교에 착수하여 청국 조계 내에 초가집 2채를 구입하여 감리교 서점을 열었다. 하지만 청국 조계가 조선인 거류지와 거리가 떨어져 있는 관계로 전도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1년 6월 아펜젤러가 인천 지역 선교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했는데, 주말마다 말을 타고 인천에 와서 전도를 하면서 예배당의 필요성을 느꼈다. 따라서 35.6㎡(10.8평)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바닥에 마루를 깔고 외벽에 석회를 발랐으며 두 개의 방을 둔 이 예배당은 비록 작은 규모였지만 기존 건물을 활용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위해 새롭게 건축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교인이 점차 증가하면서 1901년 내동에 웨슬리 예배당을 새롭게 건립하였다. 1955년 웨슬리 예배당이 멸실되자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예배당 건립이 진행하었고 화재와 철거 등을 반복하다가 1985년 창립 100주년 기념 예배당을 완공하였다. 2012년에 옛 웨슬리 예배당을 복원하였다.
사적 제253호. 지정면적 1,102㎡. 1885년 10월에 정동에 개설한 러시아공사관(당시 영사관)의 정식 건물을 짓기 위하여 1890년 8월 그 자리에 초석을 놓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장소, 즉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피신하여 있던 곳인데, 파천중 친일 김홍집(金弘集)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徐載弼) 주재의 독립협회가 결성되는 등 역사적으로 다난한 시대의 증인이 된 건물이다. 건물은 6·25사변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탑옥부분만 남아 있다. 구조는 벽돌조 2층으로 한쪽에 탑옥이 있으며, 양식은 사면에 무지개모양의 2연창(連窓)과 요소에 박공머리를 두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원형이 대부분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의를 감안하여 1977년 9월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서
구, 러시아 공사관
* 아관파천(俄館播遷): 친러 세력에 의하여 고종 임금이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으로,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을 말함
서울 구 러시아공사관은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1895년의 이듬해인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고종 임금이 피신하여 국정을 수행하며 대한제국 건설을 구상하였던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곳이다. 1890년(고종 27)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립되었지만,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탑 부분만 남은 상태다. 이곳에서 고종 임금은 친위 기병대를 설치하는 안건(1896.6.8.)과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1896.8.5.)을 반포하였으며, 민영환을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에 임명(1897.1.11.)하여 영국ㆍ독일ㆍ러시아 등 각국에 외교 사절로 머물게 하는 등 일본을 비롯한 열강으로부터 주권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환구와 사직 등에 지내는 향사(享祀, 제사)를 모두 옛 역서(曆書)의 예대로 거행하도록 조령(1896.7.24.)을 내리는 등 천자의 독립된 나라임을 알리기 위한 준비를 한 곳이기도 하다. 그 결과 고종 임금은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환궁(1897.2.20.)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환구단을 건축하고 환구 의례를 거행한 후 황제로 즉위하여 대한제국을 선포(1897.10.12.)하기에 이르렀다. * 환구단은 문화재 지정 시 문화재위원회에서 한글 표기는 고종 황제가 제사를 지낸 1897년 10월 12일 자 ‘독립신문’ 기록에 따라 ‘환구단’으로, 한자 표기는 <고종실록>에 전하는 바와 같이 圜丘壇으로 하기로 함
고요한 밤 거룩한 밤(silent night)은 해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불리는 캐럴 송 중 하나다.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를 경축하며, 새해 인사도 드릴 겸 노래 그림을 그린다. 2021년은 새해는 소띠해. 음양 오행설에 의하면 白(흰색)의 운이 따른다고 하니, 반칙과 거짓과 질병이 없고 평화롭고 깨끗한 세상이 올거라 믿으며 흰송아지를 그렸다. 딸 아이네 반려묘, 나나 순이도 함께 아가의 탄생을 축하한다. 온 세상에 평화와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도드린다.
1818년 프란츠 그루버(Franz Xaver Gruber)가 작곡하고, 오스트리아의 오베른도르프(Oberndorf bei Salzburg)에서 요제프 모어(Joseph Mohr)가 가사를 붙였다.
1절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만상이 잠든 때/홀로 양친은 깨어있고 평화 주시러 오신 아기/평안히 자고 있네 평안히 자고 있네 2절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하늘의 천사가/기쁜 소식을 알려주니 착한 목동은 기뻐하네/구세주 나셨도다 구세주 나셨도다 3절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천주의 성자가/인간 모습을 취하시니 우리 구원을 알림인가/우리 주 강생했네 우리 주 강생했네 4절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하느님 사랑을/오늘 우리게 베푸시니 천하만민은 화해하네/지극한 사랑이여 지극한 사랑이여
Portrait by Sebastian Stief (Hallein,1846), Silent Night Museum, Hallein
Franz Xaver Gruber(1787-1863)Joseph Mohr (1792-1848)
이 노래의 발상지는 오스트리아의 음악도시 잘츠부르크에서 약 20km 떨어진 오베른도르프(Oberndorf)라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국경에서 자동차로 약 20분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노래의 발상지가 된 성 니콜라우스 교회
1800년대 초 이 마을에 요제프 모어(Joseph Mohr)라는 가톨릭 교회 사제와 프란츠 그루버(Frantz Gruber)라는 학교선생이 있었다. 음악의 도시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어는 이 마을의 성 니콜라우스 교회에서 1817년부터 1819년까지 사제로 재직했다. 그루버는 이웃 마을인 아른스도르프에서 1807년부터 1829년까지 학교선생으로 있으면서 성 니콜라우스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얼굴을 자주 맞대며 일하는 동안 자연히 가까워졌다. 1818년의 크리스마스 축제를 며칠 앞두고 성당에 있는 오르간이 고장이나 고칠 수가 없었다. 당시 26세인 모어 신부는 그루버 선생에게 축복이 가득한 성탄 전야에 모여들 마을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무엇인가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는데 탈이 났다. 이에 대해 그루버는 모어 신부가 잘 치는 기타 반주로 곡을 만들어 보자고 해서 이 제안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 모어 사제는 모든 사람들이 조용하게,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그 동안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느꼈던 감정을 토대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Stille Nacht Heilige Nacht)"으로 시작되는 노랫말을 만들었다.
[1818 년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어는 2 년 전에 쓴 시를 가지고 이웃 마을 인 아렌스도르프(Arnsdorf)에있는 친구 그루버를 방문하기 위해 오베른도르프(Oberndorf)에 있는 그의 집에서 3km를 걸어갔다 . 그는 불과 몇 시간 거리에 있는 크리스마스 이브 자정 미사를 위한 캐롤이 필요했고, 교회의 합창단 마스터이자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한 그의 친구 그루버가 그의 시에 가락을 맞출 수 있기를 바랐다. 그루버는 모어의 "고요한 밤"에 단 몇 시간 만에 멜로디를 붙였다. 이 노래는 자정 미사에서 기타와 합창단을 위해 간단한 편곡으로 불려졌다. "고요한 밤"의 기원과 관련하여 수 년에 걸쳐 다양한 전설이 생겨 났지만, 가장 간단하고 가능성 있는 설명은 모어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악기인 기타로 연주 할 수있는 오리지널 노래를 원했던 것 같다. 몇 년 안에 캐롤의 편곡이 잘츠부르크 대교구의 교회에 나타 났고 Ziller Valley의 포크 가수들이 유럽을 여행하면서 작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노랫말은 6절로 되어 있는데 1절은 다음과 같다.
Stille Nacht, heilige Nacht! Alles schläft, einsam wacht Nur das traute hochheilige Paar. Holder Knabe im lockigen Haar, Schlaf in himmlischer Ruh',. Schlaf in himmlischer Ruh'.
모어 사제는 이 노랫말을 성탄전일인 12월 24일 그루버선생에게 전하면서 두 명의 솔로, 그리고 기타반주를 곁들인 합창에 맞도록 곡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노랫말을 받고 난 그루버는 그의 탁월한 음악 소질을 발휘하여 그날 밤으로 곡을 만들었다. 성탄전일의 조용하고 거룩한 뜻을 담고 있는 가사에 어울리는 곡이었다. 모어 사제는 이 곡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 노래는 두 사람의 공동노력으로 오베른도르프의 성 니콜라우스 교회에서 곡을 만든 당일인 12월 24일 저녁예배 도중에 처음으로 불렸다. 물론 참석한 신도들로부터 많은 갈채를 받았다. 모어 사제는 기타를 치면서 테너를 맡고, 그루버 선생은 베이스를 맡았으며, 교회합창단이 후렴을 불렀다. 그 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이 교회에서 불리면서 점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 중인 19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벨기에의 이프르에서 영국과 독일 간의 전쟁중 독일군의 한 병사가 크리스마스 캐롤인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는데, 이를 들은 영국 군사들이 환호하자 독일군이 노래를 다 끝마친 후 독일군 장교가 나와 영국군 하사와 악수를 하여 정전을 맺었다. 이를 크리스마스 정전이라 한다. 1937년 8월 15일 성 니콜라오교회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노래를 만든 모어 신부와 그루버 두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고요한 밤 성당(Stille Nacht Kapelle)"으로 명명되었다.
Silent Night Chapel in Oberndorf, Austria
한편, 성 니콜라우스는 산타클로스의 원형이기도 하다. 라틴어로 성 니콜라우스를 뜻하는 상투스 니콜라우스(Sanctus Nicolaus)를 네덜란드어 로는 산테 클라스라 불렀는데, 이 발음이 영어식으로 변형되어 오늘날의 산타클로스가 된 것이다.
Instrumental version played on piano by Kevin MacLeod in 2000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Round yon virgin mother and child! Holy infant, so tender and mild, 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Silent night! Holy night! Shepherds quake at the sight! Glories stream from heaven afar, Heavenly hosts sing Alleluia! Christ the Saviour is born! Christ the Saviour is born!
Silent night! Holy night! Son of God, love's pure light Radiant beams from thy holy face With the dawn of redeeming grace, Jesus, Lord, at thy birth! Jesus, Lord, at thy birth!
Oberndorf bei Salzburg 는 잘츠부르크 시에서 북쪽으로 약 17km (11 마일) 떨어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에 있는 마을이다.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나 했는데 지워지지 않는구나. 그래도 생각하지 않고 살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밀려 오는 생각은 어쩔 수가 없구나. 그래도 차마, 입에는 담지 못할 것 같았는데....차마 그릴 수 없는데...
조동진 <제비꽃>, 커피여과지 노래그림
다행히 아무도 울지 않았다. 모두가 잠 듯한 조용한 소아암병동을 남자는 혼자 걷고 있다. 복도벽에 붙은 아기 천사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한참을 바라보더니 그림에서 조심스럽게 아기 천사의 날개를 뜯어내고 있다. 그제서야 안심한 듯 남자는 복도를 지나 돌아간다. 병실의 아이는 평온히 잠들어 있고, 묵주를 들고 기도하던 마리아는 아이 옆에 엎드려 있다.
조동진의 <제비꽃> 사연이야 어쨌든, 나는 이 노래를 세상 먼저 떠난 모든 소녀들을 위해 부른다. 점점 야위어 가고 아주 한밤 중에도 깨어있기를 바라며 하늘 높이 날으는 작은 새가 되어버린 나의 어린 소녀에게 이 그림과 노래를 바친다. 이 노래 덕분에 나의 아이는 작은 새가 되었고, 제비꽃이 되었다. 잊어야 하는데 잊혀지지 않아 나의 작은 소녀를 그린다. 너는 말 한마디 없이 새털보다 가벼운 미소를 건내주었다. 그게 마지막이었지. 널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와 노래 뿐이구나. '음~ 음~ 음~ 음~ ' 다하지 못 한 말, 다 할 수 없는 말은 이렇게 신음한다.
(스크랩), 조동진의 <제비꽃> 사연 조동진은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청맥, 1991)에서 '제비꽃' 시를 쓰게 된 내력을 밝힌다. 그는,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봄바람 속에서 짧게 흔들리고 있는 그 꽃을 발견하게 되면 반가움과 함께 왠지 애처로운 생각도 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꿈 많은 젊음이 갖는 절망감을 보는 듯해서 더욱 그러하다"고 한다. 이 시의 제목을 '제비꽃'이라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제비꽃'(1985)을 불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제비꽃의 실제 모델에 대해"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내 노래 속의 등장인물은 내가 살아오면서 실제로 만났던 사람들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중략) 특히 〈제비꽃〉을 지으면서 내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여성 이미지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던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 가운데》의 니나 붓슈만과 프랑스 작가 앙드레 슈발츠-바르트(Andre Schwarz-Bart)의 《내 이름은 고독(A Woman of Named Solitude)》에 나오는 혼혈 노예 '솔리튜드'였다. 아마도 세상과 맞서며 끊임없이 자신과의 투쟁을 벌이는 두 여주인공에게서 상당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우리와 닮은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꿈과 사랑, 슬픔과 좌절, 그러고는 조금씩 달관해 가는 그 성숙 과정을 노래해 보고 싶었고, 그래서 조금 욕심을 내어본 노래가 〈제비꽃〉이다. - <우리 같이 있을 동안에>(청맥, 1991)
그는 '제비꽃' 시를 쓰면서 니나 붓슈만과 솔리튜드를 생각했다. 이 시는 동화처럼 서사를 갖추고 있고, 한 소녀의 성장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의 말처럼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꿈과 사랑, 슬픔과 좌절, 그러고는 조금씩 달관해 가는 그 성숙 과정을" 노래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조동진 또한 앞글에서 살핀 안동 대곡분교 홍성희(3학년), 김춘옥(2학년)과 마찬가지로 활짝 핀 제비꽃에서 '웃음'("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을 읽는다. 그런데 홍성희와 김춘옥이 제비꽃의 웃음을 직관으로 단순하게 '방글방글' '생글생글'로 붙잡았다면, 조동진은 그 웃음에서 '한 인간의 인생'을 본다. 1연에서는 '꿈과 사랑'(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 2연에서는 '슬픔과 좌절'(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3연에서는 '달관'(창 너머 먼 눈길)의 웃음으로 말이다. 그는 제비꽃의 웃음에서, 꿈과 희망을 보고, 힘들지만 그래도 버텨내겠다는 의지를 읽고, 지난날이 한없이 그립지만, 그래서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 있고" 싶지만, 이제는 지금을 긍정하는 달관의 웃음으로 노래한다. 연마다 있는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에서 그 웃음은 저마다 결이 다른 웃음이고,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세상을 알고, 살아가고, 이제 곧 세상을 떠날 때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시대를 견디고 있습니다. 커피와 하모니카와 노래와 그림이 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커피여과지에 그린 노래그림. 안주인이 부엌 냉장고 문을 전시장으로 허락해주었습니다. 새로 얻은 이름, '그냥헤세' 갤러리가 차려졌습니다.
냉장고에 붙은 그림이 훼손된다며 걱정해주는 안주인 덕분에 드디어 넓은 갤러리로 옮겨 전시합니다. 그냥헤세 그림이야기, 뻥이 좀 담긴 이야기를 들어보실래요.
<그냥 헤세> 갤러리 이야기 여기 가난한 화가는 캔버스 살 돈 없어 버려지는 일회용 커피여과지를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립니다. 화려한 유화 물감 대신에 12색 수채물감을 갖고, 딸 아이가 중학교 시절에 쓰다 서랍 속에 내버려둔 파스텔ㆍ색연필을 찾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답니다. 그저 어릴 적부터 좋아서 듣고 불렀던 노래를 그렸죠. 추억을 더듬다가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은 그림이 되었습니다. '쓰레기 그림인데, 무슨 액자는?' 겸손하지만 기발한 생각에 좋아라하면서 재활용장에 내 놓은 종이박스를 액자 삼아 집 안에 전시하고 혼자서 감상합니다. 그림 하나에 하모니카 한곡 연주, 그러다보니 하루 종일 놀아도 시간 가는 줄 모르죠. 가을처럼 물들고 늙어가는 골판지 액자는 커피여과지의 색깔과 잘 어울립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해도 그저 혼자 좋아라하는 그 화가의 이름은, '그냥헤세' 그냥은 화가의 이름과 비슷하여 얻은 이름이고, 헤세는 헤르만 헤세의 화풍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둘 다 마음에 듭니다. '그냥'은 그저 편한데, 그런데 어찌 감히 헤세를 닮을 수 있으리오? 오마주(hommage)~~그냥, 헤세를 흠모할 뿐이죠. 삼십 여 년 결혼 세월 속에서 집안에 남아있던 장식용ㆍ사진 액자들도 이제 화가의 커피 노래그림 액자가 되어 주었답니다.
그런 사이에 초겨울로 변하였네요. 샐리가든의 버드나무도 물들고 저 너머 푸른 산도 색이 바래가네요. 물들어 가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라 해도 순해지는 듯해서 좋습니다. 그림도 그렇게 물들었습니다.
Salley Garden
무섭고 슬프다며 전시를 못하게 해서 내 서재 책꽂이에 얹혀 있습니다.
《조커》그림은 그동안 마음이 무겁고 무섭다며 전시장에서 퇴출되어 화가의 서재에 갇혔다가 이번 갤러리 전시 이동하는 차에 슬그머니 나와 자리 차지했습니다. "조커랑 같이 쫓겨나야 정신차릴려나..?" 안주인의 협박에도 그 때까지 같이 견뎌봐야죠. https://munchon.tistory.com/m/1464
냥이들이 위험하니 높은 곳에 오르지 말라며, 에어컨 위와 서실 책꽂이에도 전시장이 되었죠. 이 <그루터기> 그림의 액자도 바로 재활용장에 줏어온 고양이 스크래치 랍니다. <그루터기> 노래를 그리다가 깨달았답니다. 숲 속의 모든 뿌리가 연결되어 있듯이, 지구촌의 모든 생명체는 별 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이어져 있다는 것을. https://munchon.tistory.com/m/1456
파란 하늘과 붉은 단풍이 어울려 바람에 춤을 춘다. 그렇게 가을 저녁은 보라색으로 물든다. 보라색은 성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럽기도 하다. 김민기의 <강변에서> 노래를 따라가면 세마치 장단에 덩실 덩실 춤추게 되고, 노랫말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미어진다. 열 여섯 살 우리 순이가 돌아온다는 기쁨보다는 늦도록 공장 일하는 고달픈 순이의 삶이 스밀기 때문이다. 김민기는 '열 여섯 살 순이'를 노래하고, 송창식은 '열 아홉살 순이'를 노래한다. 지금 같았으면 고등학교를 다닐 나인데 공장에 다니는 어린 순이의 삶이 서럽다. 순이가 다녔던 공장은 방직 공장일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 처음으로 세워진 공장도 방직공장이었고, 196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심이 되는 산업 또한 방직산업이었다. 시골 마을마다 산비탈에 뽕나무 밭을 일구고, 초가삼간 집집마다 방 한칸이라도 누에치기를 하였다. 어릴 적 내 고향의 모습이었다. 누에치기 방안에서는 들판에 내리는 소나기 소리가 들렸다. 그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직물을 짜는 방직공장에는 대부분 여공들이 다녔다. 그 어린 처녀들은 집안 살림과 오라버니 학비에 보탬이 되라고 학교 대신에 공장으로 보내졌다. 이 시기에 살았던 내 누이같은 모든 '순이'는 조국 산업화의 일꾼이었다.
강화도의 조양방직공장을 모델로 그렸다. 지금은 미술관 카페로 변모하여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조양방직 카페 실내조양방직 카페 안뜰조양방직 카페 전경충주 남한제사 공장 내 작업모습/1960년대, '충북인뉴스'에서강변시골마을, 높다란 철교 위로 지나가는 호사한 기차는 새마을호 열차일 것이다. 이 마을에는 서지 않았지만 시골 젊은이들에게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서 출세하라고 충동질하는 유혹의 세이렌이었다.새마을호 열차
아일랜드의 민요는 이상하리만큼 우리 민족 정서에 맞다. 금새 귀에 익숙해지고 따라 흥얼거리게 된다. 임형주가 부른 'Down by the Salley Garden'은 이별의 회한을 이야기한다는 면에서 우리의 아리랑 정서와 같다. 다만 노래하는 화자가 다르다. 아리랑은 떠나보내는 이가 이별을 원망하고, '샐리가든'은 떠난 이가 이별을 후회하고 있다.
salley 또는 sally는 표준 영어 단어인, sallow(갯버들)의 형태이다. 버드 나무를 의미하는 아일랜드어 saileach 의 소리와 비슷하다. sal은 '가깝다'는 뜻이고, lis는 '물'이란 뜻으로 水楊버들(foster willow)에 가깝다. 나는 가사 속에서 'take love easy'와 'take life easy'에 마음이 꽂혔다. "그래, 삶이든 사랑이든 너무 애쓰지 말자. 쉬이 살아도 될 것을....."
Salley gardens(버드나무 정원) 이 노래는 특히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시 `An Old Song Re-sung (다시 불러본 옛 노래)`에 가락을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Down by the Salley Gardens`가 원래 노래의 제목이다. 본래 예이츠의 시에서 부터인지, 아니면 노랫말로 옮기면서인가 모르겠지만 운(韻)에 맞춘 것이 절묘하다. 운에 밑줄을 쳐 본다.
<노랫말 해석> Down by the the salley gardens my love and I did meet; She passed the salley gardens with little snow-white feet. She bid me take love easy, as the leaves grow on the tree; But I, being young and foolish, with her would not agree.
In a field by the river my love and I did stand; And on my leaning shoulder she laid her snow-white hand. She bid me take life easy, as the grass grows on the weirs; But I was young and foolish, and now am full of tears.
버드나무 정원에서 그녀와 나는 만났네. 눈처럼 흰 작은 발로 버드나무 정원을 거닐며 그녀는 내게 말했지. 나뭇가지에 잎 자라듯 사랑을 쉽게 생각하라고. 그러나 나는 젊고 어리석어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네.
강가 들판에서 그녀와 나는 서 있었네. 내 어깨에 기대어 눈처럼 흰 손을 얹고서는 그녀는 내게 말했지. 둑 위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편하게 살라고 했지. 그러나 나는 젊고 어리석었기에, 지금 눈물로 가득하네 ~~~~~~~~~~
버드나무 정원, 커피여과지에 수채물감
동탄호수공원에는 호수로 이어지는 개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인공 폭포가 있다. 길게 늘어진 공원 중심에는 개천이 흐르고 주변에는 버드나무가 많다. 물가에 억새와 부들과 수크령이 피어 바람에 흔들린다. 버드나무 아래 피어있는 쑥부쟁이 위에 범나비가 찾아와 쑥스럽게 날개를 젓는다.
범나비와 쑥부쟁이
샐리가든을 동탄호수공원 안에서 그려보았다. 물가에 풀이 자라듯 바람에 버들 잎이 흔들리듯 쉬이 사랑하지않고 임은 굳이 다리를 건너고 만다. 물따라 흘러가는 삶의 편한 길을 비켜서 좁고 어두운 길을 힘들게 올라간다.
'애쓰지 않아도 되겠건만, 만다꼬 그래 살았노?'
가을이 깊어 가며 버드나무도 단풍들고, 임이 떠난 저 건너 산에도 푸른 빛을 잃고 가을물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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