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옹주 태실

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2021. 2. 9. 21:13 Posted by 문촌수기

동탄호수공원 내에 조선시대 대 임금, 선조의 왕녀인 정숙옹주 태실지가 있다.

태실비 전면
태실비 후면
전면> "皇明萬歷 十六年 七月 十一日 乙時立"
후면>"王女阿只氏胎室"

정숙옹주 태실비ㆍ貞淑翁主 胎室碑

ㅡ 화성시 유형문화재 제17호
태실은 왕실에서 왕자ㆍ공주ㆍ옹주가 태어나면 길지를 선정해 태를 봉안하던 곳이다. 정수옹주 태 실비는 전면에 왕녀(王女) 아가씨(阿只氏) 태실(胎室)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후면에는 "황명 만력 십육년 칠월 십일일 월시립(皇明 萬歷 十六年 七月 十一日 乙時立)이라 새겨져 있어 조선 선조 21년(1588)에 비를 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선조의 왕녀로 1587년에 태어난 정숙옹주의 태실비로 판단된다.
태실비는 크게 비석의 받침돌, 몸체, 머리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비석의 머리 부분은 둥근 반원형으로 연잎과 연줄기가 장식되어 있고, 위에는 연꽃 봉오리가 있다. 받침대의 윗면은 복련(覆蓮)으로 덮고 측면은 눈처럼 생긴 모양(亞자형)이 조각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왕실의 독특한 장태(藏胎) 문화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계승되어 왔다. 경기도의 태실은 경상북도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동탄 호수공원 서쪽에 태봉산 정상에 있는 정숙옹주 태실비는 화성 지역에 태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정숙옹주 태실비 구성도

 

선조임금 가계도

태실 석함(石函)

태실 석함-네 개의 돌기[石耳]가 있는 뚜껑돌을 들어 올리고, 태를 담아두는 태항아리를 몸돌[身石] 중앙부에 보관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신라시대부터 면면히 내려 온 장태문화(藏胎文化)

예로부터 태(胎)는 태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태는 민간이나 왕실이나 모두 귀중하게 여겼다. 민간에서는 산모가 출산하고 나면 태를 묻거나 태우는 등 간단한 의식을 거행하여 처리하였는데, 이를 통해 혹시나 모를 부정을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왕실의 태는 더욱 귀중하고 조심히 처리되었는데,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즉시 백자항아리에 담아 미리 봐놓은 길방에 안치하여두고 잘 밀봉한 다음 길일을 택해 태봉(胎封)에 묻었다. 아기와 태는 비록 떨어져있어도 이어진 것으로 이 경로를 통해 자연의 좋은 기운이 들어온다고 믿은 것이다.

영월 정종대왕태실 및 태실비 전경 측면

이렇게 태를 모시는 장태문화의 기원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역대 왕들의 태를 모신 태실을 모두 만들었다. 태실의 조성은 국가적인 큰 사안이었으며, 관련 논의가 중요하게 다뤄졌다. 왕이 된 자와 왕이 될 자의 태실을 조성하는 것은 앞으로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일종의 의례이자 믿음이었다.

기록과 유물의 보존, 정조대왕 태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제읍에 위치한 정조대왕 태실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실의 앞에는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하는 태실비가 서있다. 정조의 태실이 조성될 당시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순조 1년(1800), 정조의 아들 순조(1790-1834, 재위1800-1834)가 아버지를 위해 석조물을 조성하였다. 태실비에는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이라 쓰여져있는데, 이는 정조의 묘호가 원래 정종(正宗)이었다가 고종 36년(1899)에 정조(正祖)로 높인데서 기인한 것이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원손의 태봉(胎峯)을 영월부 계죽산(鷄竹山)으로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지금의 위치가 아닌 현 영월화력발전소의 뒷산 송전탑 부근에 태실을 조성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기록은 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이었던 ‘의소세손(懿昭世孫)’을 대상으로 한 것이나, 그가 요절하고 같은 해 정조가 태어나자 정조의 태실을 그 위치에 조성하였다. 이외에도 태실을 정하는 세부적인 논의, 담당관리의 임명, 석물의 마련과 폐단에 대한 문제 등 태실을 갖추는 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어 당시 왕실에서 이를 얼마나 중요한 문제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영월 정종대왕 태실 석함
영월 정종대왕 태실비


현재 남아있는 태실과 태실비는 비교적 좋은 상태로 남아있어 문헌기록과 유물이 상존하는 좋은 사례이다. 중앙에는 아기태실의 석함이 매몰되어있고 그 위로 중앙석(中央石)이 조성되어 있는데, 중앙석과 가봉비는 조선초 석조부도의 형태를 따르는 듯하다. 중앙석 아래에는 전석과 상석이 받치고 있고 주변에는 난간석을 둘렀다. 태실의 동쪽에는 가봉비가 위치하는데, 조선시대의 탑비(塔碑)나 신도비(神道碑)와 유사한 형태이다.
   
일제강점기 태실의 훼손 
현재 정조대왕태실과 같이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는 왕의 태실은 일부에 불과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전국의 태실을 경기 고양시의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겼는데, 이를 계기로 역대 왕들의 태실이 대부분 훼손되었다. 정조의 태항아리도 이때 이전하였다. 태항아리 없이 남겨진 태실과 태실비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는데, 이후 1967년 영월군 종합개발위원회에서 수습하여 KBS 영월방송국 안으로 옮겼다가 1999년에 당초의 태실 위치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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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우리그림 속 나무 읽기] [1] 귀신 쫓으려 왕실 무덤에 심는 측백나무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 /입력 2021.01.08 03:00
~조선일보, 2021.01.08 스크랩

정선 '사문탈사'(1741), 비단에 채색, 21.2x33.1㎝,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 이름이 좀 어렵다. ‘사문탈사(寺門脫蓑)’의 ‘사'는 도롱이를 나타내는 말이며 ‘절 문 앞에서 도롱이를 벗는다’는 뜻이다. 볏과의 여러해살이풀인 띠로 만든 옛날 비옷이 도롱이이다. 그림처럼 눈 오는 날 입으면 방수는 물론 방한복의 기능도 해준다. 소한과 대한의 중간인 지금이 바로 그림 속의 그 계절이다.
절 앞에 길게 늘어선 여섯 그루 고목나무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맨 왼쪽의 연하게 줄기만 그러져 있는 나무는 또 다른 ‘사문탈사도’에 나무 전체가 다 그려져 있어서 전나무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다섯 그루는 모두 측백나무이다. 사람 크기와 비교해 볼 때 두 아름이 넘는 고목나무이다. 땅에 맞닿은 줄기 아랫부분에는 모두 고깔 모양으로 나무 속이 썩어 있다. 나무 크기나 속 썩음으로 봐서 나이는 적어도 300~400년으로 추정된다. 측백나무의 줄기 껍질은 원래 세로로 깊이 갈라지므로 그림에서도 약간 굵은 빗금으로 처리했다. 측백나무는 침엽수로 분류하지만 날카로운 바늘 모양 잎이 아니다. 작디 작은 비늘잎이 여러 겹으로 포개지면서 한쪽으로 눌린 것처럼 전체적으로 납작하다. 그림에서 눈이 살짝 덮인 것처럼 보이는 납작한 잎은 측백나무 잎의 실제 모습 그대로이다.
예부터 왕릉의 둘레 나무는 주로 소나무를 심었지만 측백나무도 흔히 심었다. 무덤 주위에는 시신을 뜯어먹고 사는 ‘망상(魍像)’이란 괴물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망상은 호랑이와 측백나무를 가장 겁낸다고 알려져 있다. 호랑이는 무덤 앞에 석상으로 만들어두고 주위에는 망상을 물리칠 측백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중국 베이징 근교, 명나라 역대 17황제 중 13명이 잠들어 있는 대규모 능묘군인 명13릉 주변은 온통 측백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측백나무는 중국의 사원이나 귀족의 묘지에는 반드시 심는 나무였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절 앞에 하필이면 고목이 된 측백나무가 자리 잡게 되었을까? 절의 성격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문 옆으로 긴 행랑채가 달려 있는데 이런 절 건물 모습은 조선 왕실의 무덤을 관리하는 원찰에서나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절을 조포사(造泡寺)라고 했으며 나라 제사에 쓰는 두부를 주로 만들었다. 오늘날 수원 융건릉 가까이 있는 용주사가 대표적인 조포사라고 한다. 그림에서 소를 타고 절을 찾은 손님은 율곡 이이 선생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선비가 흔히 찾는 왕실과 관련된 사찰에 의미가 있는 나무라면 바로 측백나무를 들 수 있다.

#측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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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파주삼릉)

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2021. 1. 7. 10:29 Posted by 문촌수기

영릉,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조씨의 능(쌍릉)
영조의 첫째 아들, 사도세자의 이복형, 정조의 호적상 아버지

 

영릉 정자각
영릉비각

 


영릉永陵(추존 진종과 효순황후)

위치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능의 형식 :쌍릉능의 조성 :1726년(영조 5), 1752년(영조 28), 1776년(정조 즉위)

능의 구성

영릉은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조씨의 능이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진종소황제, 오른쪽이 효순소황후의 능이다.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검소하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영릉의 비각은 총 2개로 비각 안에는 세 기의 능표석이 있다. 1비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비, 2비는 진종대왕(眞宗大王)의 비, 3비는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의 비로 진종이 추존될 때마다 능표석을 새로 세웠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1쌍씩 배치하였다. 문석인은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능의 역사

1728년(영조 4)에 진종이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29년(영조 5)에 파주 순릉 왼쪽언덕인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751년(영조 27)에 효순소황후가 왕세자빈(현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52년(영조 28)에 효장세자묘 왼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그 후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조의 계승상 아버지가 되는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영릉이라 하였다.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이야기

진종소황제(재세 : 1719년 음력 2월 15일 ~ 1728년 음력 11월 16일)는 영조와 정빈 이씨의 아들로 1719년(숙종 45)에 창의궁에서 태어났다.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가 이듬해인 1725년(영조 1)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에 창경궁 진수당에서 10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세자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1776년(영조 52)에 영조의 명으로 이복동생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양자로 입적이 되자 효장승통세자(孝章承統世子)라 하였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그 후 1908년(융희 2)에 진종소황제로 추존되었다.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 이야기

효순소황후 조씨(재세 : 1715년 음력 12월 14일 ~ 1751년 음력 11월 14일)는 본관이 풍양인 풍릉부원군 조문명과 완흥부부인 이씨의 딸로 1715년(숙종 41)에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27년(영조 3)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1729년(영조 5)에 진종이 세상을 떠나자 1735년(영조 11)에 현빈(賢嬪)에 봉해졌다. 이후 1751년(영조 27)에 창경궁 건극당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세자빈에게 효순(孝純)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세손 정조가 진종의 양자로 입적되자 효순승통세자빈(孝純承統世子嬪)이라 하였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1908년(융희 2)에 효순소황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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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릉(파주삼릉)

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2021. 1. 6. 10:27 Posted by 문촌수기

공릉 제9대 성종의 첫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의 능

 

 

 

 

 

 순릉順陵(성종비 공혜왕후)

위치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능의 형식 :단릉능의 조성 :1474년(성종 5)

능의 구성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의 단릉이다. 파주 삼릉 내에 있는 3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한 능인데, 공혜왕후는 중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수라간,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에는 한 기의 능표석이 있는데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2쌍씩 배치하였다. 장명등은 공릉의 장명등과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 전기 장명등의 전반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다.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을 하고 있다.

능의 역사

1475년(성종 5)에 공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장순왕후의 공릉이 있는 파주에 능을 조성하였다.

공혜왕후(恭惠王后) 이야기

공혜왕후 한씨(재세 : 1456년 음력 10월 11일 ~ 1474년 음력 4월 15일)는 본관이 청주인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씨의 넷째 딸로 1456년(세조 2)에 연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와는 자매지간이 된다. 1467년(세조 13)에 자을(잘)산군(者乙(乽)山君, (성종))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에 봉해졌으며, 1469년에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종 사이에서는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1474년(성종 5)에 창덕궁 구현전에서 1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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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파주삼릉)

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2021. 1. 5. 10:24 Posted by 문촌수기

공릉 제8대 예종의 첫번째 왕비, 정순왕후 한씨의 능

 

 


공릉恭陵(예종비 장순왕후)

위치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능의 형식 :단릉능의 조성 :1462년(세조 8), 1470년(성종 1)

능의 구성

공릉은 조선 8대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 한씨의 단릉이다.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있는 향로는 직선축이 아닌 절선축으로 조성되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 1쌍씩 배치하였다. 조선전기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기 때문에 망주석을 생략하였고, 봉분을 크게 조성하였다.

능의 역사

1461년(세조 7)에 장순왕후 한씨가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듬해인 1462년(세조 8)에 파주 보시동(普施洞)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470년(성종 1)에 장순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공릉이라 하였다.

장순왕후(章順王后) 이야기

장순왕후 한씨(재세 : 1445년 음력 1월 16일 ~ 1461년 음력 12월 5일)는 본관이 청주인 상당부원군 한명회와 황려부부인 민씨의 셋째 딸로 1445년(세종 27)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1460년(세조 6)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이듬해에 원손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1461년(세조 7)에 안기(安耆)의 사저에서 1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는 세상을 떠난 왕세자빈에서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성종 즉위 후 1470년(성종 1)에 장순왕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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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릉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쌍릉)ㅡ미공개 지역
~인종과 인성왕후 무덤인 효릉은 젖소개량사업소 안에 섬처럼 고립돼 있어 원칙적으로 문화재 수리·보존과 학술조사 시에만 출입이 가능하다

효릉孝陵(인종과 인성왕후)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능의 형식 :쌍릉능의 조성 :1545년(명종 즉위), 1578년(선조 11)

능의 구성

효릉은 조선 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효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인종, 오른쪽이 인성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인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형식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효릉 조성 당시에는 병풍석이 없었으나 1578년(선조 11)에 인성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병풍석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인성왕후의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능의 역사

1545년(인종 1)에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고양 정릉(靖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인종의 능을 조성할 때 인성왕후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어 놓았다. 이후 인성왕후 박씨가 1577년(선조 10)에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578년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인종(仁宗) 이야기

인종(재세 : 1515년 음력 2월 25일 ~ 1545년 음력 7월 1일, 재위 : 1544년 음력 11월 20일 ~ 1545년 음력 7월 1일)은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로 1515년(중종 10)에 경복궁 동궁별전에서 태어났다. 1520년(중종 15)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9개월의 기간을 재위한 인종은 기묘사화로 유명무실해진 현량과를 복구하고, 조광조를 복권시켜주었으나, 중종의 상을 치르면서 몸이 악화되어 1545년(인종 1)에 경복궁 청연루 소침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성왕후(仁聖王后) 이야기

인성왕후 박씨(재세 : 1514년 음력 10월 1일 ~ 1577년 음력 11월 29일)는 본관이 반남인 금성부원군 박용과 문소부부인 김씨의 딸로 1514년(중종 9)에 태어났다. 1524년(중종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종 사이에서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명종 즉위 후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되었다. 1577년(선조 10)에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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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릉禧陵(중종비 장경왕후)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능의 형식 :단릉능의 조성 :1537년(중종 32)

능의 구성

희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단릉이다.
고양시 일산에서 멀지 않은 서삼릉 목장으로 진입하는 포퓨러 가로수 길도 희릉의 일부였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며 갑옷의 조각 수법을 보면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노출시켜 맞잡고 있다. 소매의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를 보여 주고 있다.

능의 역사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에 희릉 조성 당시에서 문제점이 있다는 김안로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다. 이후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능을 희릉 서쪽 언덕(현 철종 예릉)에 조성하면서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취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으나, 1562년(명종 17)에 중종의 능을 현 서울 강남구로 천장하면서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조 유시에 따라 병풍석 없이 12지간의 난간 만을 두른 단릉이다.
몸통에 비해 머리가 유별히 큰 문석인. 홀笏 역시 크며, 양팔 소매 주름은 끝에서 돌아와 손목 위에서 두겹으로 감겨 흐르고 있다
희릉의 문ㆍ무석인은 조선왕릉 최대의 석물이다
정자각 신문에서 능침으로 이어진 신교는 사초지 강 (岡)속으로 스며 들어가듯이 조성되어 상상력을 더하고 경건한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예감에는 뚜껑돌이 덮혀 있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이야기

장경왕후 윤씨(재세 : 1491년 음력 7월 6일 ~ 1515년 음력 3월 2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원부원군 윤여필과 순천부부인 박씨의 딸로 호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중종 1년(1506)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내명부 종2품)로 책봉되었다가,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가 칠일 만에 폐위되면서 이듬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9년간 왕비로 있으면서 어느 누구도 천거하거나 해하지 않아 중종이 감탄하여 어진 장경왕후를 주나라 문왕의 비와 비교하면서 '태사(太姒)의 덕' 이상이라 극찬하였다. (참고, 문왕의 모후는 태임(太姙)이며, 신사임당의 당호는 태임의 덕을 본받는다는 뜻.)
중종 사이에서 효혜공주와 인종을 낳았으며, 1515년(중종 10)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경복궁 동궁별전에서 25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은 훗날 장경왕후와 같이 묻히길 바라며 헌릉(태종릉) 우측 능선 너머, 현 서초구 세곡동에 희릉을 조성하였다. 시호는 '단정하고 밤낮으로 조심스럽다' 하여 장경(章敬)이라 하고, 능호를 희릉(禧陵)이라 했다.
그러나 20여년 후 능역조성의 주도세력이었던 정광필 등에 반감을 산 김안로가 장경왕후 능침 아래에 큰 암반이 있어 세자(인종)에게 흉하다고 고해서 귀가 얊은 중종이 천장을 지시하였다. 정적 제거를 위한 옥사였다. 그래서 지금의 서삼릉 영역 내로 옮겨 졌고, 정광필 등은 김해로 유배되고 김안로 세력이 실권을 장악했다.
김안로는 장경왕후의 딸 효혜공주의 시아버지로 중종과는 사돈지간이 되며, 장경왕후 부친인 윤여필, 오빠 윤임과 손을 잡고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장경왕후 승하 후 왕비가 된 문정왕휘 윤씨의 동생 윤형원과 대립하게 된다. 이런 세력다툼을 세자편의 윤임을 대윤, 문정왕후 동생 윤형원 파를 소윤이라 했다.

희릉이 있는 서삼릉 지역은 없어진 수복방, 수라청이 복원되어야 하며, 주변의 승마장과 목장으로 훼손된 지형, 물길, 금천교 등의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장경왕후는 그의 아들 인종과 며느리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ㆍ孝陵이 희릉 옆 서측 능선 서삼릉 영역 안에 같이 있어, 인종을 낳고 칠일 만에 산후병으로 죽은 애통한 장경왕후는 영원토록 효자 인종과 며느리의 효도를 받고 있다. (이창환, 신의 정원 조선왕릉에서)


희릉 초장지ㅡ서울 서초구 구룡산
처음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 초장지 일 것이라고 여겨 발굴을 시작하였다가 쌍릉이 아니고, 단릉이라서 연구결과 장경왕후 초장지로 밝혀졌다. 태종의 헌릉이 있는 대모산에서 서쪽에 있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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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제6대 단종의 능

세자 묘(원)의 형식을 갖춘 장릉(단종릉)
홍살문과 정자각을 잇는 참도가 ㄴ자로 꺾여있다.

 

 장릉莊陵(단종)

위치 :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능의 형식 :단릉능의 조성 :1457년(세조 3), 1516년(중종 11), 1580년(선조 13), 1698년(숙종 24)

능의 구성

장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능이다. 단종이 1457년(세조 3년) 노산군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1698년(숙종 24) 단종대왕으로 복위되면서 묘소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영월 장릉의 진입공간에는 재실 외에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있다.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묘을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재실 옆에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한 번 꺾여있다. 능침에는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도 한 쌍만 조성하였다. 그 밖에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석마 등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으며, 무석인은 생략하였다.

장릉의 문석인, 눈과 입을 깊게 감은 모습은 계유정란의 참극과 단종 복위운동 실패의 화를 증언하는 듯하다.

 

<신의 정원 조선왕릉조선왕릉>ㅡ 이창환, 한숲 에서

 

배치도

 

<신의 정원 조선왕릉조선왕릉> 이창환, 한숲 에서
조감도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낙촌비각(駱村碑閣)

박충원의 낙촌비각

 장릉 정자각을 들어가는 입구

단종역사관을 지나 재실과 엄홍도 정려각이 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엄홍도 정려비

 

장판옥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가 있다.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
나의 조상, 영의정 황보 인(仁)자 할아버지 휘가 보인다.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

 

제향공간

 

홍살문,비각,수복방 - 홍살문과 정자각을 잇는 참도는 'L'자로 꺾여있다. 정자각 위로 능침의 곡장이 동쪽을 향해 열려있다.
정자각
수라간
비각. 비각 안에 장릉 표석이 있다.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
정자각과 능침(봉분) 영역

 영천(靈泉)
장릉 서쪽에 있는 우물로써, 정조15년에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하여 한식때 제정ㆍ祭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 때는 물이 조금씩 쏫았으나, 한식 때는 많이 용출ㆍ湧出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1.5미터이며 하단은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있고, 상부는 장방형이다.

영천
숙종 대에 추봉하면서 제작된 사각의 장명등은 조선 최초의 형식으로 추정된다.

 능의 역사
단종은 1457년(세조 3) 세상을 떠나 영월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1516년(중종 11) 묘를 찾아 봉분을 만들었고, 1580년(선조 13)에 상석, 표석 등의 석물을 세웠다. 그 후 1698년(숙종 24)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어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端宗) 이야기
단종(재세 : 1441년 음력 7월 23일 ~ 1457년 음력 10월 21일(또는 24일), 재위 : 1452년 음력 5월 18일 ~ 1455년 음력 윤6월 11일)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에 경복궁 자선당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년)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12세의 나이로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수렴청정을 할 대비(大妃)가 없어 고명대신 김종서 등이 단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숙부 수양대군(세조)이 불안정한 왕권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1453년(단종 1)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후 2년 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 신하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송현수(단종의 장인) 등도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1457년(세조 3)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이후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자 영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해 숙부 금성대군 등이 계획한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결국 1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자결하자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영월호장 엄흥도가 노산군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중종대에부터 노산군의 대해 거론하기 시작하여 1516년(중종 11) 노산군의 묘를 겨우 찾아 봉분을 만들었으며, 선조대에는 석물을 세웠다. 그 후 숙종대인 1681년(숙종 7년) 노산군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하였으며, 여러 논의 끝에 1698년(숙종 24) 왕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였다.

ㆍ청령포

ㆍ관풍헌

엄홍도의 이야기
1457년 경상도로 유배 간 막내삼촌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자, 단종은 폐서인으로 강등되어 그해 10월 영월 관풍헌에서 사사(세조실록에서는 자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버려진 시신을 아무도 거두지 않았지만, 영월의 아전인 엄홍도가 거두어 동을지산ㆍ冬乙旨山에 몰래 묻었다.
후환이 두렵다며 주위사람들이 말렸으나,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며 홀로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지게에 짊어지고 산지를 찾아가는데 소나무 밑에 사슴 한마리가 앉았다가 자리를 비켜주어 그 자리에 잠시 쉬었다 일어서려는데 지게가 들리지 않아서 그 자리에 급히 암장하였다 한다. 이곳이 현재의 장릉이다. 그래서인지 장릉의 능침은 첩첩산중의 중턱이지만, 눈이와도 쉽게 녹고 따뜻한 양지바른 곳이다.
단종의 넋은 두견새로 환생했다고 전해진다.

 

장릉은 첩첩산중이지만 양지바른 곳이다. 모든 산 능선들이 단종께 조배를 드리는 듯 장엄하다. -<신의 정원 조선왕릉조선왕릉> 이창환, 한숲 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 단종비, 정순왕후의 자주동천 
munchon.tistory.com/1009

낙산자락 비우당 자주동천

낙산 동쪽 자락 비우당(庇雨堂), 조선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의 저자, 실학자 지봉 이수광이 살았던 집터이다. 집터는 한양도성을 이루고 있는 동.서.남.북 봉우리 중 가장 낮은 서쪽 좌청룡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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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의 땅의 歷史] 여기가 조선왕조의 시작이며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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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시작, 전주 조경단.
박종인 선임기자 조선일보, 2020.12.09

[239] 전주 이씨 시조 묘 조경단

전북 전주 덕진동 전북대학교와 덕진체련공원 사이에 제사 때를 빼고는 늘 닫혀 있는 문이 있다. 문 너머 공간 이름은 조경단(肇慶壇)이다. ‘경사가 시작된 제단’이라는 뜻이다. 또 있다. 옛 전주부성 남문 이름은 풍남문(豐南門)이고 서문 이름은 패서문(沛西門)이다. 풍(豐)과 패(沛)는 한나라 유방이 군사를 일으킨 강소성 패군 풍현을 가리킨다. 즉 제왕의 땅이라는 말이다.
이쯤이면 조경단이 무엇이고 풍남문과 패서문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리라. 조선 왕실에 전주는 풍패지향(豊沛之鄕), 새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이라는 말이다.
조경단은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李翰)을 기리는 제단이다. 그리고 강원도 삼척에는 이성계의 4대조 이양무 무덤, 준경묘(濬慶墓)가 있다. 518년 이어진 조선 왕실은 건국 507년 뒤인 1899년에야 이들을 찾아내 단과 묘를 만들었다. 전주에서 시작해 두만강 건너 알동(斡東)까지 이어진 전주 이씨 왕실 흥망사 이야기다.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 위치를 찾지 못해 대신 만든 제단, '조경단'.

전주를 떠난 전주 이씨들

성품이 호방하여 천하를 경략할 뜻을 가진 전주 호족 이안사는 때마침 전주에 파견된 산성별감과 관기(官妓)를 두고 다투었다. 이에 이안사는 화를 피해 수하 식솔 170여 호와 함께 강릉도 삼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그 산성별감이 하필이면 강릉도 안렴사로 부임하자 다시 화를 피해 바다를 건너 북쪽 덕원, 곧 함흥 땅으로 옮겼다. 함흥은 그때 몽골 땅이었다.(‘태조실록’ 총서)
삼척을 떠나기 전 이안사 부친 이양무가 죽었다. 삼척 지역 설화에 따르면 묏자리를 찾는 이안사에게 한 승려가 “소 백 마리를 잡아서 개토제를 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면 5대 뒤 임금이 난다”고 했다. 가난한 이안사는 일백 백[百] 대신 흰 백[白]을 써서 흰 소를 제물로 삼고 황금 대신 누런 귀릿짚으로 관을 삼아 장사를 치렀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선원계보 17세 양무) ‘백우금관(百牛金棺)’ 신화다. 예언대로 이안사 5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

금의환향한 다루가치들

이성계(5대)와 이방원(6대)까지 이들을 세종은 ‘용비어천가’에서 해동육룡(海東六龍)이라 불렀다. 이안사(목조), 이행리(익조), 이춘(도조)과 이자춘(환조)과 이성계(태조)와 이방원(태종)이다. 1254년 이안사는 두만강 건너 지금 러시아 땅인 알동(斡東)으로 옮겨 원나라 지역 관리가 되었다. 그 손자 이춘은 몽골명이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였고 그 아들 이자춘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였다. 이들은 몽골 지역 수장인 다루가치로 넓은 영역을 통치했다.(‘태조실록’ 총서)
그러다 이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흑룡과 싸우던 백룡을 도와주니 백룡이 ‘큰 경사가 자손에게 있으리라’고 예언하는 것이다. 아들 이자춘이 고려에 귀순해 공민왕 휘하에서 몽골을 격퇴하고, 영흥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가 이성계다.
이성계 또한 왜구 격퇴에 무공을 세우고 드디어 새 나라를 세웠다. 백우금관 설화가 실현된 것이며 고조 이안사 때 쫓기듯 떠난 고향으로 찬란하게 복귀한 것이다. 그러니 삼척과 고향 전주가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대한제국 시대인 1899년 고종 명에 의해 세운 조경단 비석. '대한 조경단'이라고 적혀 있다. 대한의 경사가 시작된 제단이라는 뜻이다.

제왕의 땅, 풍패지향

전주는 전주 이씨 왕실의 고향이었다. 태종 때 조선왕조는 전주에 어용전(御容殿)을 건립했다. 세종 때 경기전(慶基殿)으로 개칭된 어용전은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전각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전까지 제왕의 땅, 풍패지향은 함흥과 함길도(함경도) 일대였다. 함길도 관찰사 정갑손은 “본도(本道)는 우리 조정의 풍패”라 했고(1443년 4월 7일 ‘세종실록’) 선조 때에도 “(함길도는) 풍패의 땅이므로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1605년 5월 29일 ‘선조실록’)
삼척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왕실에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제후 조상묘는 4대까지 제사를 지내는 유교 예법에 따라 이성계 5대조인 이양무는 예법 바깥에 있는 존재였다.(이욱, ‘조선시대 왕실 원조의 무덤 찾기’, 종교연구 60집, 한국종교학회, 2010) 1580년 강원도 감사 정철이 “천하 명당에서 이양무 묘를 찾았다”고 보고하며 정비를 요청했지만 묵살됐다.
왜란과 호란 두 전란이 끝나고 양반 사회가 안정되던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을 중심으로 족보 제작과 시조묘 찾기 열풍이 불었다. 고조까지만 제사를 지내는 ‘사대봉사(四代奉祀)’ 한계를 뛰어넘어 묘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묘제(墓祭)를 통해 가문을 결속하려 한 것이다.(이욱, 앞 논문)
왕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려면 묘가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시조 묘가 있는 전주가 풍패지향으로 부각됐고, 백우금관 건국설화를 품은 삼척이 성지(聖地)로 부각됐다.

 

강원도 삼척에 있는 준경묘.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무덤이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에 의해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졌다.

 

현상수배 준경묘

삼척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에서 이양무 묘를 찾았다는 제보가 잇따랐다. 1640년 인조 때는 풍기 사람 박지영이 “묘를 꿈에서 찾았다”며 몽서(夢書)를 올렸고, 이듬해 최명길은 “가끔 꿈이 들어맞기도 한다”며 조사를 요구했다.(1640년 7월 15일, 1641년 5월 3일 ‘인조실록’) 인조는 사람을 보내 지형을 조사하고 땅을 파봤으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인조는 관련자들에게 상을 줘 제보를 권장했다.(1649년 3월 24일 ‘인조실록’)
‘찾는 사람에게 백금(百金)과 판윤 벼슬을 준다’는 말에 제보가 봇물처럼 터졌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자 허망(虛妄)한 말을 한 혐의로 벌을 받곤 했다.(1704년 1월 12일 ‘숙종실록’) 대신 이양무와 그 아내 이씨 묘로 추정되는 분묘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하는 선에서 세월이 갔다.

진정한 제왕의 땅, 전주

1767년 영조 43년 전주성이 대화재로 불탔다. 그러자 전라관찰사 홍낙인은 남문과 서문을 재건하고 이름을 각각 풍남문과 패서문이라 이름 붙였다. 진정한 제왕의 성이 된 것이다.
1771년 영조 47년 전주 경기전 북쪽에 조경묘(肇慶廟)가 건립됐다. 그해 10월 7일 영조는 시조 이한 사당 건립을 전격 지시했다. “내가 여든이 되어 거의 13세 할아버지 얼굴을 뵙게 될 판인데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1771년 10월 7일 ‘영조실록’) 그달 21일 터 닦이 공사가 완료되고 11월 24일 사당이 완공됐다.
왕족인 전주 이씨들 상소가 이어진 데다 영조 본인 또한 흔들리는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시조 이한의 묘역을 전혀 찾을 수 없는 탓에 사당만 지었다. 완공 사흘 뒤 특별 과거를 실시했는데, 급제자 가운데 전주 이씨와 (시조모인) 경주 김씨가 없었다. 그러자 다음 날 두 성씨만 대상으로 또 시험을 치러 4명을 급제시켰다. 전주는 조선 창업자 태조의 본향에서 조선 창업의 땅으로 격상됐다.(이동희 ‘조선왕실의 시조사당 조경묘 창건과 그 역사적 의미’, 국가 문화재 승격을 위한 조경단·조경묘 학술대회 자료, 전주역사박물관, 2020)


고종이 해결한 준경묘와 조경단

한참 세월이 흐른 1898년 10월 24일 의정부 찬정 이종건이 시조묘를 모시지 못해 원통하다고 상소를 했다. 고종이 답했다. “일반 백성도 조상을 모시는데 하물며 황제 집안인데 못하겠는가.”(1898년 양력 10월 24일 ‘고종실록’) 1899년 1월 25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전주 건지산에 제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부르라”고 명했다. 동시에 삼척에 있는 이양무 부부묘를 준경묘와 영경묘로 이름하고 이를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물증이 없어서 500년을 미루던 대역사가 한번에 해결된 것이다.

 

 

 

조선 왕실은 건국 이래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의 묘와 전주 이씨 시조 이한의 묘를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영조 때 시조 이한을 기리는 사당 조경묘를 전주에 짓고 고종 때 시조 묘역에 제단을 지어 조경단이라 명명했다. '경사가 시작된 제단'이라는 뜻이다. 묘는 찾는 데 실패해 의묘를 세웠다. 가운데 네모난 공간이 조경단, 오른쪽은 비각, 언덕 위에 시조 이한의 의묘가 보인다. 그리고 삼척에서 이성계 5대조 이양무 묘를 찾아 '준경묘'라 명명했다. /박종인

어울리지 않았던 ‘경사의 시작’

‘매천야록’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고종이 시조 묘를 알리기 위해 거창한 역사를 시작했는데, 너무 거창하여 원성이 행인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함경도에서 온 지관 주씨가 몰래 참서를 묻어놓았다가 발굴하였다. 참서에는 “황제를 칭한 뒤 300년 동안 국조가 이어진다”고 돼 있었다. 고종은 크게 기뻐하였다. 서울에서 감독관이 내려왔고 전북에서는 관찰사 이완용이 주관했다.’(황현, ‘매천야록’ 3권 1899년① 3.’조경단 신축', 국사편찬위)
고종은 자기 금고인 내탕고에서 5000원을 공사비로 하사했다.(1899년 양력 1월 25일 ‘고종실록’) 턱없이 부족했다. 탁지부에서는 1만원을 예비비로 추가 요청했다.(각사등록 근대편 각부청의서존안11, ‘영건청 소관 조경단 건축비 지출 청의’ 1899년 6월 20일, 국사편찬위) 이래저래 조경단 공식 공사비는 3만8058원57전이었다.(각부청의서존안14, ‘조경단 건축비 증액 지출 건’ 1900년 4월 28일) 대한제국 정부는 모자라는 공사비 보충을 위해 ‘김창석, 정귀조 등을 감독으로 임명해 비용을 지불하게 하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전주의 거부(巨富)였다.’(황현, 위 책)
참 허망한 것이, 그러고 6년 뒤에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또 5년 뒤 나라가 사라졌다. 뿌리는 찾았는데 그 뿌리에서 움터 창대하였던 그 나라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주에 가면, 웅지(雄志)로 세운 나라가 어떤 경로로 어떤 흥망을 겪었는지 한번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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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릉ㆍ健陵
-조선 제22대 정조선황제와 효의선왕후의 능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1752~1800, 재위 1776~1800)는 장조의 둘째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英祖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 천명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규장각을 두어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城을 건축하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재위 24년(1800)에 세상을 떠나자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올렸으며, 광무 3년(1899) 정조선황제로 추존하였다.
효의황후 (1753~1821)는 청원부원군高原院君 김시묵金時의 딸로 영조 38년(1782) 왕세손빈에 책봉되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화하였으며, 왕대비시절 여러 차례 존호에와 잔치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고 한다. 순조 21년(1821)에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의왕후王后라 올렸으며, 광무 3년 1899) 효의선황후로 추존하였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호학군주가 고하는 기막힌 반전” (정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정조는 온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군주이다. 그런데 화성행궁 화령전에 봉안된 정조의 초상화는 곤룡포가 아닌 군복 차림이다. 틀에 박힌 정조의 이미지에서 살짝만 벗어나면, 우리가 익히 알던 호학군주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 족보 『선원보략』에서 볼 수 있는 간략한 그림과 '우뚝한 콧마루,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순조실록」의 기록을 따르면 정조의 실제 얼굴은 다부진 모습일 확률이 높다. 그 모습을 상상하건데, 의외로 정조에게서 늠름하고 호방한 무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무비를 닦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하지 않고 군병이 연습하지 않아서 번번이 조금만 달리면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한다. 이를 장수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은 예사로 여기니, 어찌 문제가 아니겠는가. 훈련대장 홍국영과 병조판서 정상순은 이에 힘쓰도록 하라."
「정조실록』 권8, 3년(1779) 8월 3일

정조는 문치 뿐만 아니라, 무예와 군사훈련 역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왕위에 오른 후 정조는 아주 의미심장한 정예부대를 육성하였는데,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그것이다. 왕궁이 있는 서울과 그 주변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장용영은 그 훈련부터 특별했다. 정조가 친히 활쏘기 시범을 보이며 훈련을 독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당시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다. 정조 16년 10월 26일에 정조가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50발(10) 중 49발을 명중시켰다는 기록이있다. 그 중 마지막 화살은 아예 쏘지 않고 두면서 "다 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니, 그의 여유 넘치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의 강단 있는 모습은 8일 간의 화성 행차에서 절정을 이룬다. 「정조실록』 권42,19년(1795) 윤2월 9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창덕궁을 나섰다. 115명 기마 악대의 웅장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6000여 명의 수행원이 그 뒤를 따랐다. 이거대한 행렬의 목적지는 수원 화성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행차였지만, 그 이면에는 그간 다져왔던 왕권을 과시하고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정조의 야심찬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이날 화려한 곤룡포를 벗고 군복으로 무장한 채 화성의로 향하는 정조의 모습에서 화성 행차의 감회가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2009년 2월에 공개된 '정조어찰첩은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있었던 신하 심환지와 주고 받은 비밀서신에서 치밀한 전략가였던 정조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껄껄대며 '배를 잡고 웃었
다[令人] 와 같은 가벼운 어투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편하게 표현한 정조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정조를 온화하고 부드러운 호학군주로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기막힌 반전이다.

 

반시계 방향으로 융릉 뒤로 크게 돌아 건릉 뒤로 화산을 산책하면 말그대로 산림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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