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희릉(서삼릉)-제11대 중종 제1계비

by 문촌수기 2020. 12. 16.

희릉禧陵(중종비 장경왕후)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능의 형식 :단릉능의 조성 :1537년(중종 32)

능의 구성

희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단릉이다.
고양시 일산에서 멀지 않은 서삼릉 목장으로 진입하는 포퓨러 가로수 길도 희릉의 일부였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며 갑옷의 조각 수법을 보면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노출시켜 맞잡고 있다. 소매의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를 보여 주고 있다.

능의 역사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1537년(중종 32)에 희릉 조성 당시에서 문제점이 있다는 김안로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다. 이후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능을 희릉 서쪽 언덕(현 철종 예릉)에 조성하면서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취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으나, 1562년(명종 17)에 중종의 능을 현 서울 강남구로 천장하면서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조 유시에 따라 병풍석 없이 12지간의 난간 만을 두른 단릉이다.
몸통에 비해 머리가 유별히 큰 문석인. 홀笏 역시 크며, 양팔 소매 주름은 끝에서 돌아와 손목 위에서 두겹으로 감겨 흐르고 있다
희릉의 문ㆍ무석인은 조선왕릉 최대의 석물이다
정자각 신문에서 능침으로 이어진 신교는 사초지 강 (岡)속으로 스며 들어가듯이 조성되어 상상력을 더하고 경건한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예감에는 뚜껑돌이 덮혀 있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이야기

장경왕후 윤씨(재세 : 1491년 음력 7월 6일 ~ 1515년 음력 3월 2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원부원군 윤여필과 순천부부인 박씨의 딸로 호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중종 1년(1506)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내명부 종2품)로 책봉되었다가,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가 칠일 만에 폐위되면서 이듬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9년간 왕비로 있으면서 어느 누구도 천거하거나 해하지 않아 중종이 감탄하여 어진 장경왕후를 주나라 문왕의 비와 비교하면서 '태사(太姒)의 덕' 이상이라 극찬하였다. (참고, 문왕의 모후는 태임(太姙)이며, 신사임당의 당호는 태임의 덕을 본받는다는 뜻.)
중종 사이에서 효혜공주와 인종을 낳았으며, 1515년(중종 10)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경복궁 동궁별전에서 25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은 훗날 장경왕후와 같이 묻히길 바라며 헌릉(태종릉) 우측 능선 너머, 현 서초구 세곡동에 희릉을 조성하였다. 시호는 '단정하고 밤낮으로 조심스럽다' 하여 장경(章敬)이라 하고, 능호를 희릉(禧陵)이라 했다.
그러나 20여년 후 능역조성의 주도세력이었던 정광필 등에 반감을 산 김안로가 장경왕후 능침 아래에 큰 암반이 있어 세자(인종)에게 흉하다고 고해서 귀가 얊은 중종이 천장을 지시하였다. 정적 제거를 위한 옥사였다. 그래서 지금의 서삼릉 영역 내로 옮겨 졌고, 정광필 등은 김해로 유배되고 김안로 세력이 실권을 장악했다.
김안로는 장경왕후의 딸 효혜공주의 시아버지로 중종과는 사돈지간이 되며, 장경왕후 부친인 윤여필, 오빠 윤임과 손을 잡고 세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장경왕후 승하 후 왕비가 된 문정왕휘 윤씨의 동생 윤형원과 대립하게 된다. 이런 세력다툼을 세자편의 윤임을 대윤, 문정왕후 동생 윤형원 파를 소윤이라 했다.

희릉이 있는 서삼릉 지역은 없어진 수복방, 수라청이 복원되어야 하며, 주변의 승마장과 목장으로 훼손된 지형, 물길, 금천교 등의 복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장경왕후는 그의 아들 인종과 며느리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ㆍ孝陵이 희릉 옆 서측 능선 서삼릉 영역 안에 같이 있어, 인종을 낳고 칠일 만에 산후병으로 죽은 애통한 장경왕후는 영원토록 효자 인종과 며느리의 효도를 받고 있다. (이창환, 신의 정원 조선왕릉에서)


희릉 초장지ㅡ서울 서초구 구룡산
처음에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 초장지 일 것이라고 여겨 발굴을 시작하였다가 쌍릉이 아니고, 단릉이라서 연구결과 장경왕후 초장지로 밝혀졌다. 태종의 헌릉이 있는 대모산에서 서쪽에 있는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