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릉, 제6대 단종의 능
장릉莊陵(단종)
위치 :강원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능의 형식 :단릉능의 조성 :1457년(세조 3), 1516년(중종 11), 1580년(선조 13), 1698년(숙종 24)
능의 구성
장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능이다. 단종이 1457년(세조 3년) 노산군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1698년(숙종 24) 단종대왕으로 복위되면서 묘소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영월 장릉의 진입공간에는 재실 외에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있다.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묘을 찾아 제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재실 옆에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朝鮮國 端宗大王 莊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한 번 꺾여있다. 능침에는 추존왕릉 제도에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도 한 쌍만 조성하였다. 그 밖에 장명등, 망주석, 문석인, 석마 등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으며, 무석인은 생략하였다.
장릉의 문석인, 눈과 입을 깊게 감은 모습은 계유정란의 참극과 단종 복위운동 실패의 화를 증언하는 듯하다.
배치도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낙촌비각(駱村碑閣)
장릉 정자각을 들어가는 입구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장판옥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가 있다.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
제향공간
영천(靈泉)
장릉 서쪽에 있는 우물로써, 정조15년에 영월부사 박기정이 수축하여 한식때 제정ㆍ祭井으로 사용하였다. 보통 때는 물이 조금씩 쏫았으나, 한식 때는 많이 용출ㆍ湧出하였다.
우물의 깊이는 1.5미터이며 하단은 화강석 돌담으로 둥글게 쌓여있고, 상부는 장방형이다.
능의 역사
단종은 1457년(세조 3) 세상을 떠나 영월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1516년(중종 11) 묘를 찾아 봉분을 만들었고, 1580년(선조 13)에 상석, 표석 등의 석물을 세웠다. 그 후 1698년(숙종 24)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어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端宗) 이야기
단종(재세 : 1441년 음력 7월 23일 ~ 1457년 음력 10월 21일(또는 24일), 재위 : 1452년 음력 5월 18일 ~ 1455년 음력 윤6월 11일)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에 경복궁 자선당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년)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아버지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12세의 나이로 경복궁 근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당시 수렴청정을 할 대비(大妃)가 없어 고명대신 김종서 등이 단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숙부 수양대군(세조)이 불안정한 왕권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1453년(단종 1)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였다. 이후 2년 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 박팽년 등 신하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송현수(단종의 장인) 등도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1457년(세조 3)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이후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자 영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해 숙부 금성대군 등이 계획한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결국 17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자결하자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로는 그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영월호장 엄흥도가 노산군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중종대에부터 노산군의 대해 거론하기 시작하여 1516년(중종 11) 노산군의 묘를 겨우 찾아 봉분을 만들었으며, 선조대에는 석물을 세웠다. 그 후 숙종대인 1681년(숙종 7년) 노산군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하였으며, 여러 논의 끝에 1698년(숙종 24) 왕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端宗), 능호를 장릉이라 하고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였다.
ㆍ청령포
ㆍ관풍헌
엄홍도의 이야기
1457년 경상도로 유배 간 막내삼촌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자, 단종은 폐서인으로 강등되어 그해 10월 영월 관풍헌에서 사사(세조실록에서는 자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버려진 시신을 아무도 거두지 않았지만, 영월의 아전인 엄홍도가 거두어 동을지산ㆍ冬乙旨山에 몰래 묻었다.
후환이 두렵다며 주위사람들이 말렸으나,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며 홀로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지게에 짊어지고 산지를 찾아가는데 소나무 밑에 사슴 한마리가 앉았다가 자리를 비켜주어 그 자리에 잠시 쉬었다 일어서려는데 지게가 들리지 않아서 그 자리에 급히 암장하였다 한다. 이곳이 현재의 장릉이다. 그래서인지 장릉의 능침은 첩첩산중의 중턱이지만, 눈이와도 쉽게 녹고 따뜻한 양지바른 곳이다.
단종의 넋은 두견새로 환생했다고 전해진다.
이어지는 이야기 > 단종비, 정순왕후의 자주동천
munchon.tistory.com/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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