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송산고 교정에 마그리트가 소담스레 피었네요. '마음속에 감춘 청춘의 사랑'이라는 꽃 말을 가졌답니다.

아~  그 마음이 이해되요.
그 때의 나에게, 짝사랑에 속앓이하는 청춘에게 말하고 싶어요.

"사랑한다고 말하셔요.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아니랍니다.
아니, 내일은 없답니다.
지금이 선물이랍니다.
오늘 찾아가 사랑하는 그 마음을 전하셔요."

주저하지말고, 미루지말고 마음을 전하세요. 감추고 있지말고, 아파하지말고,
차라리 퇴짜를 받아 더 아파하더라도 사랑한다고 말하셔요. 퇴짜받은 고통은 크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을거요.
희망하고 긍정하셔요.
상대도 당신 사랑의 고백을 기다리고 있었을거요.

성지순례ㅡ은이성지

마음을 찾아서 2019.04.06 15:22 Posted by 문촌수기
은이 공소터는 한국 교회사 안에서 솔뫼나 미리내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그 이상 가는 귀중한 사적지이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사적지인 은이 공소터가 교회의 무관심 속에 이쑤시개 공장과 잡초만이 무성한 텃밭으로 한동안 변해있었다. 그러던 중 1996년 은이 공소터 530여 평을 매입하고 야외제대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을 세우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은이 마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사제였던 성 김대건 신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간직한 곳이다.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은이 마을은 소년 김대건이 모방 나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이다.
또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로서, "용인 천주교회사"(오기선 신부 감수, 조성희 지음)는 이에 대해 "은이 공소는 조선 교회 사상 최초의 본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가항 성당을 복원하는 의미로 일부 자재는 2001년 철거된 상해 김가항 성당의 것을 사용했다.바로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는 조선 땅에서는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고, 바로 이곳이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마지막 미사를 드렸던 곳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의 가장 대표적인 성인으로 추앙받는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풍성하게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성지순례ㅡ미리내 성지

마음을 찾아서 2019.04.06 15:17 Posted by 문촌수기
경기도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미리내는 본래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을 이루었던 곳의 하나이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비로소 본당이 설정됐을 때 이곳에는 이미 1천 6백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더읽기>미리내 성지

손골성지, 카페 703

마음을 찾아서 2019.04.06 15:07 Posted by 문촌수기
지난 주엔 용인 수지에 있는 손골성지 미사 다녀왔어요. 아프고부터 주일 미사는 성가대에 서는 본당 미사보다는 아내와 같이 조용하고 가까운 성지를 찾아 다녀요.
손골 성지 찾아 가는 길에 작은 카페가 있고 기린, 고양이, 어린왕자 그림과 뜰에 가득한 햇살에 끌려 들어갔어요. 주인장이 정성들여 볶은 커피콩으로 커피를 내려주셨어요. 마당에서 햇살까지 담아 마셨어요.
눈 앞에 유난히도 노란색 들꽃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아내가 금새 '복수초(福壽草)' 라고 이름 부르네요. 주인마님도 그 이름을 알아주셨다며 반겼습니다.
"아하! 복수초가 너로구나. 내가 너를 닮았다더니, 너를 처음보네. 이쁘구나!"
무슨 말이냐구요? DAUM(다움)에서 꽃검색하여 나를 셀카하니 나를 '복수초'래요. 복과 장수의 상징! 처음으로 '나'를 보았어요. 그리고 꽃말을 더 읽으니, 말 그대로 수복강령,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고 '설연화(雪蓮花)', 쌓인 눈을 뚫고 나와 꽃이 피면 그 주위가 동그랗게 녹아 구멍이 난다고 '눈색이꽃', '얼음새꽃'이라도 하고요.
강원도 횡성에서는 '눈꽃송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런 기운 받아 건강하고 밝은 세상 살아야겠어요.
여러분은 무슨 꽃일까요?
<카페 703>

복수초

이 봄에 수복강령을 빌며,
복수초 그냥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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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ㅡ손골성지

마음을 찾아서 2019.04.06 14:59 Posted by 문촌수기
손골 성지는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光橋山, 582m) 기슭,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에 있다. 원래 손골 성지에는 교우촌이 있었다. 교우촌은 천주교 박해시기 박해를 피해 신자들만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을 말한다. 손골 교우촌은 현재 ‘손골 성지’라고 불리는데 이곳에서는 프랑스 선교사로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도리(Dorie, 金, 헨리코) 성인과 오메트르(Aumaitre, 吳, 베드로) 성인 두 분을 특별히 기념한다. 아울러 박해시대 손골 교우촌에서 살았던 순교자들과 신앙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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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 오실 때가 되었네

마음을 찾아서 2018.12.07 09:22 Posted by 문촌수기
아기 예수 오실 때가 되었네.
아파트마다 대문을 꽃불등을 장식하고 트리도 만들어 밝혔다. 서울 시내 곳곳에도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추운 세모를 따뜻하게 데우고 있다.
서울성모병원에서도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구유장식을 현관에 꾸몄다. 잠시 앞에서 아픈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시어 세상의 고통을 치유해 주십사 기도하였다.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

대림 4주간을 보라색ㅡ연보라색ㅡ연분홍색ㅡ하얀색 띠로 이어가다 그 끝자리에 아기 예수 누울 요람이 마련되었다.
아직 빈자리. 구세주 어서 오시길 비나이다.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올바른 길 걷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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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찾아서 2018.04.26 21:03 Posted by 문촌수기
들어오는 문일까?
나가는 문일까?
제대헌화 장식이
성스롭고 아름답다.
닫힌 문일까?
열린 문일까?

원효탄생지ㅡ제석사

마음을 찾아서 2016.10.03 10:39 Posted by 문촌수기

제석사, 원효스님의 탄생지

마음을 찾아서 2016.10.03 10:30 Posted by 문촌수기
15년만에 다시 찾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고 의미를 부여하는게 중요하죠.
원효스님의 삶과 가르침을 다시 새겨보는 소중한 시간이며 장소입니다.
그때는 칠성각 안에 원효 복사영정을 모셔두었는데 지금은 원효성사전을 따로 건축하여 원효불로 봉안하고 그 뒤로 팔상도 후불 탱화를 두었네요.

제석사 원효성사전. 3칸의 기둥에는 원효가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지은 오도송 4행이 주련으로 걸려있다. '마음밖에서 구하지 말라'고 한다.
원효좌상 뒤로는 원효의 삶이 8개의 탱화로 그려져있다.
탄생ㅡ출가ㅡ해골득도ㅡ무애춤ㅡ요석공주의 만남ㅡ

동북아문화연구 제25집 (2010) pp. 5~26 원효상(元曉像)의 현대적 재현-제석사(帝釋寺)의 탱화를 중심으로*
1)최재목**ㆍ손지혜***ㆍ김은령****  (* 이 논문은 영남대학교 2010학년도 인문학육성기금연구장려금 지원으로 작성되었음.)

1.【탄생】
1) 도상해석
이 탱화는 <원효의 탄생(617)> 관련 내용을 담고 있다. 탱화의 구성을 살펴보면 상반부에는 도솔천의 장면ㆍ중반부에는 큰 나무 아래로 오색의 구름이 덮히고 여인의 품으로 유성(流星)이 안겨 들어오는 원효 탄생설화의 장면으로 좌측에는 한 여자가, 우측에는 한 남자가 합창한 채 아기를 향해 앉아 있다.ㆍ하반부에는 원효의 대중교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즉 탄생장면의 상하로는 과거세 미래세의 원효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2) 문헌기록
이 탱화의 핵심 내용인 중반부에 있는 <원효 탄생설화 내용>을 중심으로 문헌의 기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되는 문헌으로는 삼국유사ㆍ송고승전이 있고, 비문(碑文)으로는 「서당화상비」가 있다. 이 기록들을 통해 원효 탄생의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삼국유사 처음에 어머니의 꿈에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다. 해산하려 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14)
⒝송고승전 스님 원효의 성은 설씨이고, 동해 상주의 사람이다.15)
⒞「서당화상비」 어머니가 처음에 별이 떨어져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문득 임신하였
다. 달이 차기를 기다려 해산하려 할 때 갑자기 오색구름이 특별히 어머니의 거처를 덮었다.16)
이처럼 삼국유사와 「서당화상비」에는 원효의 어머니 꿈에 유성(별)이 떨어져 품속으로
떨어졌다는 기록과, 해산 무렵에는 오색구름이 어머니의 거처를 덮었다는 유사한 내용이 공
통적으로 기록되었다.
위 탱화의 내용 또한 이 기록을 거의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다만 어머니가 아닌 갓 탄생
한 아기 원효에게 오색구름이 내려 덮고 있는 부분이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좌측으로 유
성이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2.【출가】
1) 도상해석
이 탱화는 원효의 <출가와 수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탱화를 살펴보면 상단부에 원효가 출가하여 많은 승려들에 둘
러싸인 채 한 승려의 도움에 의해 삭발의식을 갖는 장면으로 뒤
편에는 또 다른 한 승려가 탁자에 앉아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
며, 하단부에는 원효가 한 승려와(=스승)과 문답하며 수학하는 장
면이 묘사되어 있다.
2) 문헌기록
원효의 출가ㆍ수학과 관련하여서는 (1)출가시기 (2)사제관계라
14) 初母夢有星入懷因而有娠及將産有五色雲覆地.(三國遺事「元曉不羈條」)
15) 釋元曉姓薛氏東海湘州人也.(宋高僧傳「唐新羅國黃龍寺沙門元曉傳」)
16) 母初得夢星流星入懷便■有■待其月開大解之時忽有五色雲■特覆母居.(「誓幢和上碑」)(■표시는 결자
임.)
원효상(元曉像)의 현대적 재현-제석사(帝釋寺)의 탱화를 중심으로 13
는 쟁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이에 관한 내용은 아래 문헌의 기록을 바탕으로 살펴보고
자 한다.
먼저 원효의 <출가>와 관련한 기록은 아래 송고승전과 삼국유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
다.
⒜삼국유사 법사가 출가를 하고서 그 집을 내놓아 초개사라 이름 짓고, 나무 옆에 절을 세
우고 이름을 사라사라 하였다.17)
⒝송고승전 나이(원효) 관채지년(15-16세)에 흔쾌히 불법에 입문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받았는데, 다니는 곳이 일정함이 없으며, 의해의 세계를 용맹이 격파하고 문장의 진영을 씩씩하
게 횡행하여 굳세고 흔들림 없이 정진하여 물러남이 없었다.18)
원효의 출가에 대하여 송고승전에는 ‘관채지년에 불법에 입문’하였다고 기록되어, 즉 원
효의 출가 시기는 15전후에서 20세까지로 추정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19)
한편 원효의 수학과 관련하여 <사제관계>에 대한 기록은 「서당화상비」ㆍ삼국유사ㆍ송
고승전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들을 살펴보면삼국유사와 「서당화상비」에는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여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았다”고 하며, 송고승전에는 “스승을 따라 배우되
일정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서당화상비」 도(道)는 실로 나면서부터 알았다. 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깨달았으며 배움
에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20)
⒟삼국유사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특이하여 스승을 좇지 않고 (혼자)배웠는데, 그가 사
방을 떠돌던 시말(始末)과 성대하게 편 포교의 자취들은 모두 당전(唐傳O과 그의 행장에 실
려 있다.21)”
⒠송고승전 흔쾌히 불법에 입문하여 스승을 따라 배우되 일정하지 않았다.22)
그러나 삼국유사와 송고승전에 혜공ㆍ낭지ㆍ보덕ㆍ대안과 같은 고승과의 관계가 기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효에게도 학문과 법을 묻고 가르침을 얻은 스승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삼국유사 이때 원효는 여러 불경의소(疎)를 지으면서 항상 혜공을 찾아가 의심나는 것을
물었는데, 가금씩 서로 말장난을 하기도 하였다.23)
⒢삼국유사 원효가 반고사에24) 머물 때 언제나 낭지스님을 찾아뵈었다. 낭지는 원효에게
초장관문25)과안신사심론26)을 짓게 했다. 원효가 짓기를 마치자 숨은 선비 문선으로 하여금
낭지에게 글을 올리게 하였는데 그 글의 끝에 노래를 지었다. “서쪽 골짜기의 사미(원효)는 동
쪽 봉우리의의 상덕인 높은 바위 앞에 머리 숙여 예합니다. 미세한 먼지를 불어 영취산에 보태
고 작은 물방울을 날려 용연(태화강)에 던집니다.27)
⒣삼국유사 원효는 의상과 함께 보덕성사로부터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을 배웠
다.28)
⒤송고승전 「대안화상」 용왕이 말했다. “대안성자에게 차례를 가려서 엮게 한 뒤, 원효 법
사에게 청해서 소(풀이 글)를 지어 그것을 강의하면 부인의 병은 나아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중략)…대안이 말했다. “빨리 원효에게 부탁해서 강의하게 하시오. 다른 사람은 곧 안 됩니다
(못합니다).” 원효가 이 경을 받을 때는, 바로 본디 태어난 상주에 있었다. (원효가) 사자에게 일
러 말했다. “이경은 본각과 시각, 2가지 깨침을 주된 뜻으로 합니다. 나를 위해 소 수레(각승)를
마련해 주시오. 장차 소 두 뿔 사이에 책상을 놓으려 합니다.”그기에 붓과 벼루를 놓고서 처음
부처 끝까지 소 수레에서 풀이 글(소) 5권을 지었다.29)
이 탱화에는 위와 같은 문헌 기록상의 원효의 출가와 수학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그려지지
않았지만, 원효의 출가 후 삭발장면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3.【득도】
1) 도상 해석
이 탱화는 원효의 <입당과 득도>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탱화의 상단부에는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을 떠나던 과정 중에 요동에서 간첩으로 몰려 신라로 다시 귀국하는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중단부에는
일반적으로 원효의 오도설화로 윤색되어 ‘토감우숙’으로 유명한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득도하였다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하
단부에는 원효에게 설법을 청하는 승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
다30).
이 탱화의 내용과 관련된 기록을 ①입당과 ②득도의 두 쟁점으
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2) 문헌 기록
원효의 <입당 유학>의 경위와 <득도>와 관련하여 다음 문헌
기록을 참고하고자 한다.
(1) 입당 관련 기록
⒜삼국유사 「의상전교」 “법사 의상의 아버지는 한신이고 김씨이다. 나이 29세에 서울 황복
사에 몸을 맡겨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후 중국으로 가 부처의 교화를 보고자 하여
마침내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서 요동 변방으로 가던 길에 국경을 지키는 군사에게 첩자로 의심
받아 갇힌지 수십일 만에 겨우 풀려나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이일은 최치원이 지은 의상의
본전과 원효법사의 행장 등에 적혀 있다) 영휘 원년(650)에 마침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가
있어 그것을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31)”
三國遺事 「前後所將舍利」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전을 살펴보면 이러하다. 영휘 초년
(650)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지엄선사를 뵈었다. 그러나 부석사 본비에 의하면 이렇다. 의상은
무덕 8년(625)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출가하였다. 영휘 원년 경술년(650)에 원효와 함께 당나라
로 들어가고자 하여 고구려에 이르렀으나 어려움이 있자 되돌아 왔다.32)
⒝송고승전 “일찍이 의상법사와 함께, 현장삼장과 자은의 문하를 흠모하여 당나라에 들어
가려 했으나, 그 인연이 차질이 생겨서 갈 생각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33)”
(2) 오도 관련 기록
⒞송고승전 “나이 스물이 되어서 당나라에 교종(敎宗)이 솥 같이 번성함을 듣고 원효대사
와 뜻을 같이해 서쪽으로 나아갔다. 당나라로 가는 바닷가로 가서 큰 배를 구해 타고 바다를 건
널 생각이었다. 갑자기 중도에서 장마비를 만났다. 하는 수 없이 길가 토감에 몸을 숨겼다. 덕분에 비바람을 피 할 수 있었다. 아침에 날이 밝아 서로 둘러보니 옛 무덤의 해골 방이었다. 날은
더욱 굳고 땅은 더욱 질척했다.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워 토감에 계속 머물렀다. 밤중이 되지
않았는데도 문득 귀신들이 괴이한 짓을 했다. 그러자 원효는 탄식해 말했다. “지난 밤 묶었을
때는 토감이 곧 편안하다고 했더니 오늘밤에 묶으려니 귀신의 집이라 빌미가 많구나. 아하, 알
겠도다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닌것을 또,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요. 만가지 법은 오직 가리새뿐임을, 마음마깥에 법이 없는데
무엇을 별도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로 들어가지 않겠다.” 그러고는 본국으로 돌아갔다. 의상
혼자 외로이 죽음을 감수하고 물러나지 않았다. 총장 2년(669)에 상선을 타고 등주 해안에 이르
렀다.34)
⒟임간록(林間錄)(卷上) “당나라 중 원효는 신라(해동)사람이다. 처음 바다를 건너 중국에
와서 도가 있는 명산(도명산)을 찾으려했다. 홀로 황량한 언덕을 가다가 밤에 무덤가에 자게 되
었다. 아주 목이 말라 손을 뻗어 물을 찾았더니, 무덤 속에 달고 시원한 샘이 있었다. 날이 밝아
서 그것을 보니 해골이었다. 크게 구역질이 나 모두 토해버렸다. 문득 깊이 깨치며 탄식했다. 마
음이 생기면 곧 갖갖이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곧 해골이 다른 것이 아니구나. 여래대사
가 3세계는 오직 마음뿐이라고 했는데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드디어 다시 스승을 찾지 않고 그
날로 신라도 돌아갔다.35)”

 

4.【무애】
1) 도상 해석
이 탱화에는 원효의 무애사상의 예술적 구현이라 할 수 있는
<무애무>의 내용이 그려져 있다.
상단부에는 원효가 입당을 포기하고 돌아와 저술에 몰두하는
모습이, 그리고 하단부에는 대중들에게 설법과 교화를 하는 모습
이 묘사되어 있다.
중단부에는 원효의 무애행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내용으로
저자거리에서의 무애무의 연행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원효는 한
손에는 목탁을 쥐고 또 다른 한 손에는 염주를 들고 있으며 허
리에는 조롱박을 찬 채 춤을 추는 형상을 하고 있다. 둘러싼 대중들에게 춤과 노래 등의 예술적인 표현으로 설법을 하고 있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2) 문헌의 기록
원효의 무애무에 관련되는 내용은 파한집(破閑集)ㆍ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36).
⒜파한집 예전에 원효대성이 천한 사람들 속에 섞이어 놀았다. 일찍이 목 굽은 호로박을
어루만지며 저자에서 가무(歌舞)하고 이를 무애(無㝵)라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일 좋아
하는 자(好事家)가 금방울을 위에 매달고 채색비단을 밑에 드리워 장식하여 두드리며 진퇴하니
모두 음절(音節)에 맞았다. 이에 불경에 있는 게송을 따서 무애가(無㝵歌)라 하니 밭가는 늙은
이도 이를 모방하여 유희(遊戱)로 삼았다.
무애지국사(無㝵智國師)가 일찍이 제(題)하여 이르기를, “이 물건은 오래도록 무용(無用)을 가
지고 사용(使用)하였고 옛 사람은 도리어 불명(不名)으로써 이름이 났도다.”하였다. 근래 산인
(山人) 게휴(貫休)가 게(偈)를 지어 이르기를, “쌍(雙)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이장(二障)을 끊은
까닭이요, 세 번 다리를 드는 것은 삼계(三界)를 초월한 까닭이다.”하였으니 모두 진리(眞理)로
써 이를 비유하였다. 나도 또한 그 춤을 보고 찬(讚)을 지으니 그 찬에 이르되,“배는 가을 매미
마냥 비었고 목은 여름 자라처럼 꼬부라졌도다. 그 굽힌 것은 사람을 따르는 것이요 허(虛)한
것은 물건을 용납할 만하도다. 밀석(密石)에 막히는 것을 볼 수 없고 규호(葵壺)에 비웃음 받지
않도다. 한상(韓湘)은 이와 같이 세계에 숨었고 장자(莊子)는 이와 같이 강호(江湖)에 다녔도다.
누가 이 이름을 지었는고, 그는 소성거사(小性居士)요. 누가 찬을 지었는고, 농서(隴西)의 타이
(駝李)로다” 하였다.37)
⒝ 삼국유사「원효불기조」 “원효가 이미 실계(失戒)하여 설총(薛聰)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우연히 어떤 광대가 큰 바가지를
가지고 춤추고 희롱하는 것을 보니 그 형상이 너무도 빼어나고 기발하였다.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의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라는 (문구에서 따서) 이름을 ‘무애(無㝵)’라고 하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천촌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하고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
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모두 나무(南無)를 칭하게 되었으니 원효의 법화가 컸던 것이다.38)”
살펴 본 바와 같이 무애무의 명칭인 ‘무애(無㝵)’의 연원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로 파한
집과 삼국유사가 있으며, 이는 무애무의 기원과 형성배경을 기록한 중요한 사료이다. 비록
무애무의 구체적인 연행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이를 통하여 원효의 대중교화 의도와 무
애무의 창안 계기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 탱화의 무애무는 위 문헌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약간의 윤색을 겸하여(무구: 염주, 조롱
박, 목탁ㆍ관객과의 구도 등)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5.【설법】
1) 도상 해석
이 탱화는 원효의 <설법>에 대한 내용을 묘사한 것이다.
상단부에는 원효가 소의 두 뿔에 붓과 벼루를 놓고 금강삼매경
소를 지었다고 하는 설화를 표현한 것이며, 하단부에는 김유신(金
庾信)이 당(唐) 소정방이 보낸 암호 난독회(鸞犢繪)에 대해 원효에
게 자문하였다는 내용을 나타낸 것이다.
2) 문헌기록
원효의 설법에 관하여 기록한 문헌으로 삼국유사ㆍ송고승전
이 있으며, 먼저 상단부에 묘사된 금강삼매경소 저술경위와 관
련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삼국유사 바다용의 권유로 길가에서 조서를 받들고 삼매경소(三昧經疏)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놓았으므로 각승(角乘)이라고도 하였다.39)
⒝송고승전 원효가 사신에게 말하기를 ‘이 경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두 가지 깨달음
을 종지로 삼고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소가 끄는 수레를 준비하여 책상을 두 뿔 사이에 두고 붓
과 벼루를 주시시오’ 하고 시종 소가 끄는 수레에서 주서[疏]를 지어 다섯 권을 만들었다.40)
한편, 김유신이 원효에게 암호해독의 군사자문을 하였다는 것은 삼국유사권1에 기록되었다.
661년 12월 김유신이 고구려 출정시에 원효의 조언을 구하여 소정방이 보낸 암호를 풀어
신라 병사들을 구출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기에 이르기를 총장 원년(668년)에 신라에서 청병을 한 당군이 평양의 교외에 주둔
을 하면서 서신을 보내어 급히 군수물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묻기
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병이 주둔하여 있는 곳으로 가기에는 지세가 험하여 극히 위험하다. 그
러나 당나라 군사의 식량이 떨어졌는데도 군량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옳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하였다. 김유신이 아뢰었다. “신 등이 능히 군수물자를 수송하겠으니 청컨
대 대왕께서는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에 유신과 인문 등은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국
경 안으로 들어가 군량 2만곡을 수송하여 주고 돌아오니 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군사를 일
으켜 당군과 합세를 하고자 윳니이 먼저 연기, 병천 등 두 사람을 보내 합세할 기일을 묻자 당
나라 장수 소정방이 난새(鸞)와 송아지를 그려 보내 주었다. 사람들이 그 뜻을 몰라 사람을 시
켜 원효에게 청해 물으니, 해석하여 말하기를 “군사를 속히 돌이키라는 말이다. 난새와 송아지
를 그린 것은 두 반절(反切)을 이른 것이다.” 이에 유신은 군사를 돌이켜 패수를 건너려 할 적
에 군령으로 말하기를 “나중에 강을 건너는 자는 베리라.”하였다. 군사들의 반이 강을 건너갈
적에 고구려 군사가 와서 미처 건너지 못한 병사들을 죽였다. 다음날 유신은 고구려 병사들을
추격하여 수만 명을 죽였다.41)

6.【요석과의 인연】
1) 도상해석
이 탱화는 <원효와 요석(瑤石)의 만남>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
다.
탱화의 상단부에는 원효가 두 하녀들에 의해 문천교를 건너 요
석궁으로 안내를 받고 있는 내용이며, 중단부에는 요석궁에 들어
와 공주와 만나 만찬을 하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으며. 하단부에는
원효가 궁을 나와 요석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는 모습(이별)을 나
타내고 있다.
요석과 원효의 관계와 원효의 파계를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
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문헌기록
원효의 파계행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요석과의 만남에 대한 문헌기록은 삼국유사를 통해살펴볼 수 있다.
ⓐ삼국유사 대사가 어느날 일찍이 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보련다.”사람들은
모두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이때 태종 무열왕이 그 말을 듣고 말하였다.“이 대사가 아마 귀
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으면 그 이익
이 막대할 것이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를 시켜 원효를 불러 오게 하
였다. 궁리가 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아보니 이미 남산을 거쳐 문천교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
고 그곳에서 머물고 가게 하였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을 낳았다.…(중략)…원효가 계
율을 어겨 설총을 낳은 이후부터는 속인의 의복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42)

7.【교화】
1) 도상해석
이 탱화는 원효의 기이한 교화의 일화 가운데 하나인 척반구중
설화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상단부에는 선정에 든 원효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하단부에는
나무소반을 멀리 던지는 원효의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승려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43)
2) 문헌기록
척판암 설화라고도 전하는 이 내용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송고승전처음에 원효가 행적을 보인 것이 일정함이 없었으며, 사람들을 교화하는 것에
고정됨이 없었다. 혹은 소반을 던져 대중을 구하기도 하고, 혹은 물을 뿜어 화재를 진압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여러 곳에서 형체를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모든 곳에 입멸할 것을 고하기도 하
였으니 배도(盃度)나 지공(誌公)의 무리와 같았다.44)
⒝擲盤臺事蹟記위성 남쪽 묘향 북쪽에 절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이 척반대이다. 그 이름은
신라의 도인 원효로부터 지어졌다. 원효가 여기서 도를 깨치고 도를 즐긴 것이다. 하루는 지혜
의 눈으로 보니 중국에 큰 불교행사가 있는데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런데 그 행사를
주관하는 스님이 천벌을 받게 되어있어 땅이 무너지게 되었다. 원효가 소반을 던져 그 절의 공
중에 떠다니다가 멀리 날아갔다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소반을 따라 나왔다 그때 땅이 무너
지고 사람들은 목숨을 구했다. 판자가 멈추므로 그것을 살펴보니 소반 안에는 해동원효척반구
중(海東元曉擲盤救衆)이라는 8글자가 쓰여 있었다. 따라서 소반를 던진 그곳이라 하여 척반대라
한 것이다.45)
8.【열반】
1) 도상해석
이 마지막 탱화는 저술과 열반에 관한 내용이다. 상단 부는 원
효가 저술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중앙 부분
은 승려들을 모아 놓고 강의를 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
부분은 원효가 만년에 경론을 저술한 이후 설법하는 장면을 표현
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단 부분은 열반하여 부처의 형상으로 설
법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2) 문헌기록
원효가 화엄경소」ㆍ「십문화쟁론」 등을 저술 한 것에 대한 기
록은 아래와 같다.46)

⒜삼국유사 “원효는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는데, 제40<회
향품(廻向品)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꺾었다. 또 송사 때문에 몸을 일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니
모두 이를 위계(位階)의 초지(初地)47)라 하였다.”
⒝서당화상비 “비유하자면 청색과 쪽 풀은 본체가 같고 얼음과 물은 근원이 같은데, 거울
이 수많은 형상을 받아들이고 물이 갈라지는 것과 같다 (마멸) 융통하여 서술하고는 그 이름을
십문화쟁론(十門和爭論)이라 하였다.48)”
한편 원효의 열반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삼국유사 그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잘게 부수어 참 얼굴을 빚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슬픔의 뜻을 표하였다. 그때 설총이 옆에서 예를 올리자 소상이 갑자기 돌아
보았는데, 지금까지도 돌아본 채 그대로 있다.49)

원효좌상 좌우벽에는 요석공주와 아들 설총의 탱화가 있다.

원효성사전 벽화

마음 구하는 일에나 전념하소.

마음을 찾아서 2013.02.15 10:28 Posted by 문촌수기

마음 구하는 일에나 전념하소.

포항시 오천에 가면 오어사가 있다. 오어사! 절 이름이 재미있다. 
나 '오(吾)', 고기 '어(魚)', 절 '사(寺)', 곧 '내 물고기'라는 오어사는 일찍이 신라 4대 聖人이라 불리는 자장율사, 원효대사, 혜공대사, 의상대사가 함께 머물러 수도했던 곳으로 특히 원효대사와 혜공대사의 재미있는 설화가 서려 있는 곳이다. 오어사는 신라26대 진평왕 때 자장율사가 세운 절로 원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였는데 오어사로 개명된 데 대해서는 원효와 혜공의 일화가 전해진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편]에 나타난 오어사는 고승 혜공의 흥미진진한 행적으로 가득 차 있다. 어느 날 원효가 당나라에 유학 가기 위하여 운제산 계곡에서 원효암이라는 초가를 짓고, 불철주야 열심히 정진하던 차에 혜공선사는 중국에서 부처님의 전업을 이어받은 인가를 받아와서 70명의 대중을 공부를 시키고 오어사에 주석하였다. 

하루는 두 사람이 운제산 계곡 맥반석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정진하던 중 혜공이 마음이 동하여 원효에게 물었다. 

"자네가중국에 가서 인가를 받아 오려면 부처님의 대법을 이을 수 있는 신통한 여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법력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세" 

"그럼 무엇이든지 법력을 겨루어보세"

원효가 대답하니명경지수가 흐르는 계곡에 산고기가 노니는데 그 고기를 한 마리씩 산채로 삼키고바위 끝에 앉아 대변을 봐서 산채로 고기가 나오면 이기는 걸로 했다. 그리고는 팔을 걷어 부치고 계곡에 뛰어들어가 서로 한 마리씩 고기를 나누어 삼켰는데 두 마리 고기중 한 마리는 죽어서 나오고다른 한 마리는 살아서 활기차게 상류로 올라갔다. 그 산 고기를 보고 대사는서로 떠밀며"저 고기가 내 고기야" 라고 하였다.'나 오(吾)고기 어(魚)'라는 말에서 오어사가 유래하였다한다. 

부처님 오신 날 준비로 분주한 저녁의 절 마당에서 스님 한 분을 만나 합장 인사드리고 여쭈었다. 

"저는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사상을 가르치는 고등학교 윤리교사입니다. 마침 원효스님을 찾아오다가 이곳까지 들렀는데, 이 오어사에는 원효스님과 혜공선사께서 물고기를 삼켰다가 변을 보면서 살려냈다는 전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두 스님께서 그런 신통을 부렸을 적에 이 오어사가 있었습니까? 신통을 부린 후세에 오어사가 생겼습니까?"


내가 만난 스님들은 항시 친절하셨는데 오어사의 스님은 퉁명스럽게 대답하신다.


"고런 신통부리는 이야길랑 선상님만 아시고 아~들한테는 갈치지 마소. 어린 아~들이 스님들은 요술이나 부리는 사람으로 알 꺼 아닝교? 요술 같은 이야길랑 집어 치아뿌고 그저 자기 마음 구하는 일에나 전념토록 갈치소!"


무안을 당해 얼굴이 달아올랐다.'고얀 스님일세' 속내를 들어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듣자하니 그 말씀이 백 번 옳았다. (2001년 5월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