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價値) 이해

도덕윤리+철학 공부방 2019.04.15 18:05 Posted by 문촌수기
'가치'라는 개념을 이해시킬 때 좋을 것 같아요.  개구리와 달팽이 입니다.

왼쪽은 물리적 가치(무게 차이), 오른쪽은 윤리적 가치(생명 동등성)
왼쪽의 개구리 좀 보셔요. 눈동자와 왼손이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주네요. 잘난 척하지만, 뭔가 불안한 듯.
어떤 모습인지 아이들에게 한번 물어봐요.
ㅡ가평 나들이 갔다가, 북면 야생화 가게에서..
물에서 배웁니다.
동양(윤리)사상에서 '물[水]'은 최고의 덕성이며 중핵적 가치 개념입니다.
마침, 우리 학교 이름 '매홀'은 '물 고을'로 고구려 시대 지명입니다.
우리 아이들과 동양윤리사상 수업시간에 애교심과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거양득으로
<물에서 삶ᆞ사람의 가치 배움>의 '비주얼 싱킹맵' 수업과 수행평가를 하였습니다.

@ 유투브 동영상 보기

 @ 활동지 같이 읽기 매력홀릭과 윤사공부.hwp
  ~ 수행평가 활동지에 다 넣지 못했지만, <논어>에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도 있죠.

 @ 수행 활동 ᆞ모범답안~제가 먼저 작성해보았어요.  
~ 물의 덕성과 가치 싱킹맵> 3개는 노자의 말씀 속에서, 3개는 본인 생각을 적게 했습니다. 위의 <논어>의 '물[水]'에서 '지혜''청빈'과 '역동성'의 가치를 얻게 됩니다. 또한 가장 부드럽고 잘 어울리니 '유화(柔和)'의 덕을 가졌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 더읽기 > '라넌큘러스' 꽃말에 매력홀릭! (클릭!) 

@ 학생 수행활동 결과물

4월 독립운동가 안창호

도덕윤리+철학 공부방 2019.03.31 21:54 Posted by 문촌수기
4월의 독립운동가, 안창호

안창호와 흥사단, 낙산 인문학 산책길 >  4월의독립운동가 안창호와 흥사단.pdf

 


국가보훈처ᆞ4월의 독립운동가 안창호에서 (더읽기 클릭!!)
"묻노니 여러분이시어, 오늘 대한사회에 주인 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 어느 집이든지 주인이 없으면 그 집이 무너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 집을 점령하고, 어느 민족 사회든지 그 사회에 주인이 없으면 그 사회는 망하고 그 민족이 누릴 권리를 다른 사람이 취하게 됩니다 … 이와 같이 자기 민족사회가 어떠한 위난과 비운에 처하였든지 자기의 동족이 어떻게 못나고 잘못하든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하던 일을 몇 번 실패하든지, 그 민족사회의 일을 분초에라도 버리지 아니하고 또는 자기 자신의 능력이 족하든지 부족하든지, 다만 자기의 지성으로 자기 민족사회의 처지와 경우를 의지하여 그 민족을 건지어 낼 구체적 방법과 계획을 세우고 그 방침과 계획대로 자기의 몸이 죽는 데까지 노력하는 자가 그 민족사회의 책임을 중히 알고 일하는 주인이외다." -『동아일보』1925. 1.25일자 「주인(主人)인가 여인(旅人)인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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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安昌浩,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1])는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아래, 이승만과 김구ᆞ안창호>, 2019.3.26 조선일보, 4.11, 임시정부 100년 에서 (더읽기 클릭)

안창호 安昌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6대 국무령
1926년 5월 3일 ~ 1926년 5월 16일
부통령
전임: 이동녕(제5대)
후임: 이동녕(제7대)
출생일 1878년 11월 9일
출생지 조선 평안도 강서군 초리면 초리7리 봉상도(도롱섬)
사망일 1938년 3월 10일 (59세)
사망지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부산부
학력 1896년 구세학당 보통부 졸업
정당 무소속
부모
안흥국(부), 제안 황씨 부인(모)
배우자
이혜련(영어명:헬렌리 Helen Lee)
자녀 아들 필립 안, 안필선, 안필영(영어명: Ralph Ahn), 딸 안수산, 안수라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장로회)
별명
자는 치삼, 호는 도산 (島山),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별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
도산 안창호 기념관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그의 사후 1988년 3월 21일, 대한민국 서울 경신중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졸업장이 추서되었고 사흘 후 1988년 3월 24일, 대한민국 서울 경신고등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졸업장이 추서되었다.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며, 본관은 순흥, 호는 도산(島山), 종교는 개신교이다. 구한 말 만민공동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영향력이 강대해지자 미국으로 망명, 이후 미국 사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실력양성론과 함께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발판이라 생각하여 1899년(광무 2년) 점진학교, 1908년(융희 2년) 대성학교, 1926년 중국 난징에 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대한의군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사령관을 지낸 항일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 선생과는 동성동본 친족척이기도 하며 1938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간경화를 비롯한 폐렴과 만성기관지염 및 위하수증· 복막염 및 피부염과 소화불량 등의 합병증으로 타계한 그는 생전에 흥사단, 대한인국민회 등 재미한인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1919년 4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주도하였다. 1921년부터는 임시정부 창조론과 개조론이 나뉠 때 개조론을 주장하였으며,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된뒤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다. 미국의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였던 그는 박용만, 이승만, 서재필 등과 경쟁, 갈등관계에 있기도 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폭탄투척 사건 이후 일본 제국 영사관 경찰의 불심검문에 체포되어 송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형문을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경성제국대학 병원에 입원했으나 소화불량과 간경화, 폐질환을 비롯한 여러 질병의 합병증으로 출옥 직후 사망한다.

일제 강점기 당시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무력투쟁론, 민족개조론, 외교독립론으로 나뉠 때 민족개조론을 주창하였으며, 민족개조론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힘과 실력을 키우고 그 실력을 기반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실력 양성론을 주장하여 경제적, 사회적인 실력을 길러야만이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교육 입국론을 제창하여 각종 학교의 설립과 양성에 노력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그의 실력 양성론은 윤치호, 이광수, 최남선, 송진우, 안호상, 조병옥, 김성수 등에게 두루 영향을 주었다.

웅변술에 뛰어났으며, 연설과 웅변에 두루 능통하였다. 여러 청년들을 감화시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했다. 한편 그는 이상적인 정치인으로 유길준을 지목했다. 다른 이름은 창호(昌鎬)이고, 자는 치삼, 호인 도산(島山),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별명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이다.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도산대로(島山大路)와 도산공원은 그의 호를 따서 이름 지었다.
경기도교육청은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교육기본법 제2조)'  기르기 위해 시민교과서 3종을 출판하였다.
먼저 나온 <민주시민> 교과서는 개정판,
<통일시민> 교과서와 <세계시민> 교과서는 일부 내용 수정보완 3쇄 인쇄되어 각급학교로 무료 보급 되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1학년에 통일시민, 2학년에 민주시민, 3학년에 세계시민 교과서를 지급하고 여러 교과의 수업보조자료와 창체수업에 활용하고 있다.
<시민교과서 3종>

<집필ᆞ연구진>ㅡ여러 시도교육청의 교원과 교수진이 함께 하였다. 특히 통일시민 교과서에는 교과서 출판 이후에 현정부 각료로 발탁되거나 남북정상회담과 통일문제로 널리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사들이 연구위원으로 함께 했다.

3월의 독립운동가

도덕윤리+철학 공부방 2019.03.01 18:57 Posted by 문촌수기
3월의 독립운동가 손병희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ㅡ3월의 독립운동가 손병희
http://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

김마리아, 독립운동가

도덕윤리+철학 공부방 2019.02.02 11:55 Posted by 문촌수기
2월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국가보훈처는 김마리아(1892.6~1944.3)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ㅡ2월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은 일본 유학중이던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유학생들과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 계획은 ‘2·8 독립선언’으로 이어졌고, 선생도 도쿄 여자 유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닥나무 껍질로 만든 얇은 종이에 복사해 옷 속에 감춰 부산에 도착했다. 교육·기독교·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도쿄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하고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3·1운동 배후 지도자를 지목받아 체포되기도 했다.

원문보기: 한겨레 신문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80784.html#cb#csidx90f5ea286f4d20ebee66307895f1885
ᆞᆞᆞᆞ
김마리아 영상보기>
https://youtu.be/ySStGmqaJoI

이하는 '코리안스피릿' 에서 복사함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53930
김마리아, 안창호, 차경신. [사진제공= 독립기념관]

김마리아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하고 서울로 와서 정신(貞信)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 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다가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인데, 여기에 김마리아 선생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는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어 교육계·기독교계·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황해도 지역에 동지 규합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선생은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였고 선생은 그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정신여학교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해 8월 출감 후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고 정신여학교 동창과 교사들이 중심이 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알게 되었다. 선생과 임원들은 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뒤, 그를 위한 선행 조치로 선생을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적십자회 대한지부를 결성하고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로 보내고, 독립선언문을 배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1월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으며 6개월 여의 예심 중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중병에 걸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니 원판결을 파기하고 1921년 3월 경성복심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병으로 해변에서 휴양하도록 승인 받은 기회를 이용하여 그녀는 상해로 탈출할 수 있었다.

상해에서 수개월의 치료 끝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수학하였으며,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하여 성명서 발표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 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가 휴양하다가 미조리주의 팍대학을 졸업한 후 시카고대학 도서실에 근무하였다. 고학 생활 중에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2월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7월 귀국하였고,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1944년 3월 13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관순 열사와 3.1운동

도덕윤리+철학 공부방 2019.01.19 16:04 Posted by 문촌수기
1월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올해는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 1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이다.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로 선정하여 국민들에게 알렸다.

삼일절은 국경일로 휴일이 되고,  학교는 매년 삼월에 학년제가 시작되며 삼일절 다음날부터 입학식, 개학식이 되다보니 계기교육도 없이 지나쳐 버린다. 올해만큼이라도 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개학 첫주 중이라도 그 의미와 정신을 전해주는 시간을 갖자.
통일이 되지 않은 우리에게는 독립도 반쪼가리요, 평화도 반쪼가리다. 독립운동 교육은 평화교육과 통일교육과 함께 가야하는 동반자이다.

뉴욕주의회가 올 3월 1일을 특별히 기념하여 '3ᆞ1운동의 날'로 정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ㅡ조선일보 2019.01.18 금, A30면
[만물상] "뉴욕 3·1운동의 날" (스크랩)

"내 손톱이 빠지고 귀와 코가 잘리고, 팔다리가 부서진다 한들 내 나라를 잃은 고통과 비교할 순 없다." 작년 3월 뉴욕타임스는 유관순의 항일투쟁을 소개한 장문의 기사를 내보냈다. 100년 늦은 부고(訃告) 기사였다. 이미 사망했지만 주목할 만한 여성을 재조명한다는 취지로 만든 '우리가 간과한 사람들'(Overlooked) 기획의 하나였다. 이름조차 낯선 유관순 얼굴과 생애가 미국 시민들에게 알려졌다.
▶엊그제 미국 뉴욕주 의회가 오는 3월 1일을 '3·1운동의 날'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상·하원 만장일치였다. 당초 '유관순의 날'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뉴욕주 의회는 올해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을 기념한다는 뜻에서 3·1운동의 날로 지정했다. 하지만 결의문에선 유관순을 최연소 여성 인권운동지도자로 치켜세웠다. 결의안은 한국계 뉴욕주 하원의원인 론 김과 비(非)한국계 의원 3명이 공동 발의했다. 뉴욕한인회를 비롯한 한인(韓人) 파워를 보여준 쾌거였다.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이 3·1 만세시위에 뛰어들었을 때 만 열여섯을 갓 넘긴 나이였다. 요즘 고1 나이다. 동료들과 3월 1일 탑골공원 시위에 참여했다.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에 돌아와 4월 1일 아우내 시위를 조직했다. 옥중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여 고문을 받았다. 이 때문에 여학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출소를 며칠 앞두고 옥사했다. 만 열여덟 생일을 두어 달 앞둔 채였다.
▶요즘은 3·1운동 하면 유관순을 떠올릴 만큼 독립운동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광복 전까지 "유관순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는 욕을 먹었다. 부모가 아우내 시위 당일 학살됐고 오빠는 물론 삼촌과 사촌도 옥에 갇혔다. 두 동생도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으니 그럴 만했다. 그를 되살린 건 소설가 전영택이 해방 후 낸 '순국소녀 유관순전'이다. 전영택은 유관순을 '조선의 잔다르크'로 높였다. 유관순 영화도 나왔다.
▶이런 유관순을 놓고 얼마 전 친일시비가 벌어졌다. 2014년 교육부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한 교수가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친일(親日) 패러다임'에 갇혀 유관순까지 왜곡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유관순기념사업회에 사과문을 보내고 직접 찾아가 사죄까지 했다. 이 교수는 지금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학술 분과를 책임지고 있다. '3·1운동의 날'을 만든 뉴욕주 의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다. ㅡ 김기철 논설위원

ㅡKBS 뉴스
미, 뉴욕주의회 "3.1운동의 날"결의안 확정

ㅡ 한겨레신문 스크랩
원문보기 http://m.hani.co.kr/arti/politics/defense/876394.html#cb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를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한국 정부는 1962년 유 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바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16일 충남 목천(현재 천안)에서 5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4월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입학했고 3·1운동이 있기 하루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해 만세 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했다. 1919년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모인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유관순 열사는 시위 결사대 동지 5명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최대 시위인 ‘남대문역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학교가 결국 문을 닫자 유관순 열사는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며 고향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유 열사는 3월13일 사촌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했다. 4월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시위 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용기를 북돋웠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볐다. 그러자 병천 주재소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둘렀다.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했다.
유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은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했다.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달려든 어머니도 일본 헌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유 열사는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저녁 유 열사와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됐다.
유 열사는 천안 헌병대와 서대문 감옥 등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지하 감방에 감금돼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고,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기도했다. 하지만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28일 오전 8시,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8살이었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ㅡ외국인들도 이렇게 추모하며 기리는데...
원문보기>http://m.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838355.html#cb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한 해이다. 국가보훈처에서 올해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하여 발표하였다.
2019년 이달의 독립운동가
 1월 유관순, 2월 김마리아, 3월 손병희, 4월 안창호, 5월 김규식ᆞ김순애, 6월 한용운, 7월 이동휘, 8월 김구, 9월 지청천, 10월 안중근, 11월 박은식, 12월 윤봉길.
 충청도 내포, 홍성의 한용운 생가와 덕산의 윤봉길의사 기념관 들러다가 올해의 독립운동가 달력을 구하여 서재에 걸어두었다. 1월은 유관순 열사이다.

그중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2016년 크리스마스 실(seal)에 실렸던 위인들이다.

해 지난 교무수첩을 정리하며 펼치다 툭 떨어졌다. 작은 나눔이지만 아이들에게 의미있는 일에 같이 동참하자며 전하고  오래전부터 매해 수집하던 크리스마스 실이다.
이 소중한 것을 묻혀 둘 뻔 했다. 이 분들 덕분에 나라가 있고 내가 있다.  소중히 모시고 감사드리고 내일의 주인공들에게 전해야겠다. 이 분들이 걸었던 길이 내 나라의 길이 되었고, 나의 길이 되고, 내일의 길이 될 것이다.
"독립을 향한 열망ᆞ대한민국을 구한 독립운동가 10인"
김구 선생(8월), 박은식 선생(11월), 윤봉길 의사(12월), 안창호 선생(4월), 이봉창 열사
안중근 의사(10월), 유관순 열사(1월), 홍범도 장군, 신채호 선생, 김좌진 장군

충청북도교육청 연수원은 단재교육연수원이다. 신채호의 아호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독립을 향한 선생의 염원이 교육을 통해서 미래 세대에도 이어져야 한다는 뜻을 담고있다. 새로운 100년의 독립운동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완성해야 한다는 사명을 지니게 한다.
ㅡ청주시 가덕면에 있는 충북단재교육연수원의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동상

연극 코펜하겐 - 하이젠베르크 이야기

줄거리>
독일과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과 두 물리학자의 참여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
로 한 이야기이다. 덴마크의 유태인에 대한 이야기, 하이젠베르크가 전쟁 전과 전쟁 중에 겪었던 이야기와 뒤이은 감옥 생활, 그리고 말년을 괴롭혔던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도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부분적으로 극화시키기는 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말, 헬골란트 섬, 펠레트 공원의 저녁 산책, 베를린 공습, 수감 생활, 죽을 뻔한 경험을 했던 독일 여행 등에서 하이젠베르크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그가 생전에 남겨둔 이야기를 근거로 했다.
미연합국 측(보어 측)이 핵무기를 개발에 성공하여 승전으로 이끌었으나, 독일에 남아있던 하이젠베르그가 핵무기 개발에 실패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개발하지 않았는지는 아직 미제이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 승전 측 과학자들은 인류 최대 위기 무기를 만들어냈다는 과학자적 윤리 시험대에 오른다.
이 공연은, 세계적인 핵 물리학자 두 명의 숨가쁜 토론으로 이루어진다. 결국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까?

이 수업을 우리 학교에서는 문과의 윤리교과 / 이과의 물리교과 / 예능의 연극교과에서 융합수업으로 펼쳐보았습니다.  학교 안의 주문형 강좌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사례입니다.

독서기반 교과융합(연극-물리-윤리 융합수업)원고.pdf

희곡과 후기>

융합수업 과정>

교육과정 참고> <윤리와 사상> - 국가와 윤리 / 평화와 윤리 
   <생활과 윤리> - 과학기술과 윤리 / 민족 통합의 윤리

<생활과 윤리> - 과학기술과 윤리 / 변순용, 2015, 천재교육 에서

참고 영상자료>

https://www.youtube.com/watch?v=JI7QKfM7zvA|
살해 위협에 놓인 하이젠베르크의 운명은?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원자핵 분열의 전문가다.
원자핵 분열은 원자력 발전에 쓰일 수도, 핵무기로 쓰일 수도 있다.
정보원 리터에게 하이젠베르크에 접근하여 정보를 캐내고 필요할 경우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지는데...
[지니어스] 매주 토요일 밤 10시 본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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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 과학과 철학의 만남
https://www.youtube.com/watch?v=rHeI_ZnVOwk

 

오펜하이머

https://www.youtube.com/watch?v=S_I_100Fkc0
핵무기 개발 첩보전 3부_5-5 오펜하이머와 수소폭탄

 


 

 

아름다운 세상만들기 프로젝트 수업
ㅡ고양시 OO고등학교의 선생님들과 모둠학습형태로 프로젝트 계획서 작성 실습도 해보았습니다.
싱킹맵으로 생각모으기ㅡ계획서 작성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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