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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1.07 영릉(파주삼릉)
  2. 2020.11.24 건릉(융건릉)-조선 제22대 정조
  3. 2020.11.24 융릉(융건릉)-정조의 부, 사도세자

영릉(파주삼릉)

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2021. 1. 7. 10:29 Posted by 문촌수기

영릉,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조씨의 능(쌍릉)
영조의 첫째 아들, 사도세자의 이복형, 정조의 호적상 아버지

 

영릉 정자각
영릉비각

 


영릉永陵(추존 진종과 효순황후)

위치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능의 형식 :쌍릉능의 조성 :1726년(영조 5), 1752년(영조 28), 1776년(정조 즉위)

능의 구성

영릉은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조씨의 능이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진종소황제, 오른쪽이 효순소황후의 능이다.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검소하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영릉의 비각은 총 2개로 비각 안에는 세 기의 능표석이 있다. 1비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비, 2비는 진종대왕(眞宗大王)의 비, 3비는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의 비로 진종이 추존될 때마다 능표석을 새로 세웠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1쌍씩 배치하였다. 문석인은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능의 역사

1728년(영조 4)에 진종이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29년(영조 5)에 파주 순릉 왼쪽언덕인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751년(영조 27)에 효순소황후가 왕세자빈(현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52년(영조 28)에 효장세자묘 왼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그 후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조의 계승상 아버지가 되는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영릉이라 하였다.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이야기

진종소황제(재세 : 1719년 음력 2월 15일 ~ 1728년 음력 11월 16일)는 영조와 정빈 이씨의 아들로 1719년(숙종 45)에 창의궁에서 태어났다.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가 이듬해인 1725년(영조 1)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에 창경궁 진수당에서 10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세자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1776년(영조 52)에 영조의 명으로 이복동생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양자로 입적이 되자 효장승통세자(孝章承統世子)라 하였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그 후 1908년(융희 2)에 진종소황제로 추존되었다.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 이야기

효순소황후 조씨(재세 : 1715년 음력 12월 14일 ~ 1751년 음력 11월 14일)는 본관이 풍양인 풍릉부원군 조문명과 완흥부부인 이씨의 딸로 1715년(숙종 41)에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27년(영조 3)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1729년(영조 5)에 진종이 세상을 떠나자 1735년(영조 11)에 현빈(賢嬪)에 봉해졌다. 이후 1751년(영조 27)에 창경궁 건극당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세자빈에게 효순(孝純)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세손 정조가 진종의 양자로 입적되자 효순승통세자빈(孝純承統世子嬪)이라 하였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1908년(융희 2)에 효순소황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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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릉ㆍ健陵
-조선 제22대 정조선황제와 효의선왕후의 능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1752~1800, 재위 1776~1800)는 장조의 둘째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英祖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 천명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규장각을 두어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城을 건축하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재위 24년(1800)에 세상을 떠나자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올렸으며, 광무 3년(1899) 정조선황제로 추존하였다.
효의황후 (1753~1821)는 청원부원군高原院君 김시묵金時의 딸로 영조 38년(1782) 왕세손빈에 책봉되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화하였으며, 왕대비시절 여러 차례 존호에와 잔치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고 한다. 순조 21년(1821)에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의왕후王后라 올렸으며, 광무 3년 1899) 효의선황후로 추존하였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호학군주가 고하는 기막힌 반전” (정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정조는 온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군주이다. 그런데 화성행궁 화령전에 봉안된 정조의 초상화는 곤룡포가 아닌 군복 차림이다. 틀에 박힌 정조의 이미지에서 살짝만 벗어나면, 우리가 익히 알던 호학군주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 족보 『선원보략』에서 볼 수 있는 간략한 그림과 '우뚝한 콧마루,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순조실록」의 기록을 따르면 정조의 실제 얼굴은 다부진 모습일 확률이 높다. 그 모습을 상상하건데, 의외로 정조에게서 늠름하고 호방한 무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무비를 닦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하지 않고 군병이 연습하지 않아서 번번이 조금만 달리면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한다. 이를 장수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은 예사로 여기니, 어찌 문제가 아니겠는가. 훈련대장 홍국영과 병조판서 정상순은 이에 힘쓰도록 하라."
「정조실록』 권8, 3년(1779) 8월 3일

정조는 문치 뿐만 아니라, 무예와 군사훈련 역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왕위에 오른 후 정조는 아주 의미심장한 정예부대를 육성하였는데,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그것이다. 왕궁이 있는 서울과 그 주변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장용영은 그 훈련부터 특별했다. 정조가 친히 활쏘기 시범을 보이며 훈련을 독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당시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다. 정조 16년 10월 26일에 정조가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50발(10) 중 49발을 명중시켰다는 기록이있다. 그 중 마지막 화살은 아예 쏘지 않고 두면서 "다 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니, 그의 여유 넘치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의 강단 있는 모습은 8일 간의 화성 행차에서 절정을 이룬다. 「정조실록』 권42,19년(1795) 윤2월 9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창덕궁을 나섰다. 115명 기마 악대의 웅장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6000여 명의 수행원이 그 뒤를 따랐다. 이거대한 행렬의 목적지는 수원 화성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행차였지만, 그 이면에는 그간 다져왔던 왕권을 과시하고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정조의 야심찬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이날 화려한 곤룡포를 벗고 군복으로 무장한 채 화성의로 향하는 정조의 모습에서 화성 행차의 감회가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2009년 2월에 공개된 '정조어찰첩은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있었던 신하 심환지와 주고 받은 비밀서신에서 치밀한 전략가였던 정조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껄껄대며 '배를 잡고 웃었
다[令人] 와 같은 가벼운 어투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편하게 표현한 정조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정조를 온화하고 부드러운 호학군주로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기막힌 반전이다.

 

반시계 방향으로 융릉 뒤로 크게 돌아 건릉 뒤로 화산을 산책하면 말그대로 산림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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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융건릉)-정조의 부, 사도세자

카테고리 없음 2020. 11. 24. 12:34 Posted by 문촌수기

융릉(隆陵) : 추존 장조의황제(사도세자)와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의 능
추존 장조의황제 莊祖懿皇帝
(1735-1762, 사도세자)는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의 생부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글과 시를 잘 지었고, 무예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 (대리청정)를 보게 되며서 노론정권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급기야 영조 38년(1762) 나경언의 고변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된 후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곧 이를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조는 즉위 후 존호를 장헌세자라 올렸으며, 광무 3년(1899) 장종莊宗을 거쳐 장조의 황제로 추존하였다.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1735 1815, 혜경궁 홍씨)는 영풍부원군永興府院君 홍봉한의 딸로 영조 20년(1744) 왕세자빈에 책봉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혜빈에 봉해졌고, 정조 즉위 후 혜경궁으로 칭호를 올렸다. 이후 자전적 회고록인 《한중록》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광무 3년(1899) 헌경왕후王后를 거쳐 현경의황후로 추존하였다.

 

융릉, 연꽃봉오리와 연잎 모양의 인석
융릉 앞, 곤신지. 일반적으로 왕릉에서 보기 드문 원형 연못이다.
금천교
융릉, 홍살문과 정자각
융릉의 능침, 문ㆍ무석인이 한계단에 있다.
문석인
무석인
무석인의 뒷모습, 투구와 갑옷의 무늬가 섬세하다

 

혼유석과 귀면
고석의 귀면, 섬세ㆍ화려ㆍ선명하다

 

병풍석과 인석

 

장명등
망주석ㆍ세호
세호 細虎 - 이름대로 '작은 호랑이'를 닮은 듯하다.

* 인석: 병풍석의 구성요소 중에 인석은 병풍석 상단의 만석을 제자리에 있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기다란 사각기둥 형태로 열 두 귀퉁이에 튀어 나와 그 끝에는 국화, 규화(접시꽃), 모란 같은 꽃들로 장식되어있으며, 『세종오례의』에 언급 되어 있다.
*세호(細虎): 망주석의 가운데 기둥에는 세호(細虎)가 새겨져 있다. 세호는 중국의 망주석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세호의 한자의 뜻풀이대로 하면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나, 실제는 호랑이 모습과 닮지는 않았다. 세호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국조상례보편』(1752)에서 인데, “세호를 조각하여 왼쪽의 망주에는 오르게 하고 오른쪽의 망주에는 내려가게 하였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즉,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에 보이는 명칭인 ‘세호’는 그 정체나 새긴 목적이 밝혀지지 않아 상징성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장식화 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구멍이 막혀 있으며 꼬리가 긴 동물이 조각되었다. 또한 세호가 동물의 형태로 바뀌며 운동성이 생겼는데, 대체로 좌승우강(左陞右降)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망주석 명칭

 




융릉 곤신지에 연잎이 덮혀있다.

 

<조선왕조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뒤주의 비극 속에 가려진 아버지의 마음”(추존 장조 - 사도세자)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자결하라!"

영조의 노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격해졌다. 땅에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선 피가 흘렀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영조의 노여움은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려만 달라는 세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영조는 끝내 명을 내린다.

"세자를 폐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깊이 가두라!"

『영조실록』 권99, 38년(1762) 윤5월 13일의 기록이다. 역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사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비극을 실록은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 사로잡힌 나머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세상 단 하나뿐이었던 아들, 더욱이 대리청정을 시켰을 정도로 기대가 크고 귀하게 여긴 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맏아들 효장세자를 일찍이 떠나 보내고 7년 간 후사가 없어 애태우던 영조는 마흔 둘에 이르러 아들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러니 영조의 아들 생각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즐겁고 기쁜 마음을 어찌 말하랴! 내전에서 아들로 취하고 원자의 호를 정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겠는가? 즉시 이를 거행해 종묘와 사직에 고하도록 하라.”
-『영조실록』 권40, 11년 1월 21일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왕위를 물려줄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조금도 망설임 없이 사도세자가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하고 신하들에게 온 정성을 다해 교육에 힘써줄 것을 부탁했다.
세자가 3세이였던 영조 13년 '세자가 이미「효경』을 읽고 글을 쓸 줄 알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세자가 썼던 글이 '천지왕춘' 이다. 이에 놀란 여러 신하들이 앞 다투어 나와 세자의 글을 하사하여 줄 것을 청하니, 영조는 기쁜 나머지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하며 세자의 재간을 보았다고 하고 그 후에도 영조는 여러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 세자와 동행해 세자가 쓴 글씨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영조 역시 아들의 재능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여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세자의 대리청정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노론이 외면한 시도세자의 대리정정이 순탄할 리 없었고,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괴이한 행동을 하던 사도세자는 끝내 영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히게 한 죄목은 다음과 같다. 정신질환으로 궁녀를 죽인 것, 여승을 궁녀로 만든 것, 그리고 아무도 몰래 20여일 동안이나 관서지방을 유람했던 수상한 행동을 한것.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일 뿐, 그 이면에는 더욱 무서운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처단해야 했던 아버지의 비극 또한 잠들어 있다. 왕과 세자이기 전에 부자 사이였던 두 사람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더욱 가슴 시린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임금이 열 살이 된 세자에게 묻기를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 하니, 세자가 한참 동안 있다가 대답하기를 "싫을 때가 많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의 이 말은 진실한 말이니, 내 마음이 기쁘다." 하였다.
영조실록, 권60, 20년(1744) 11월 4일

공부 더하기ㆍ조선왕릉의 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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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의 석물

석물의 역사와 변화 왕릉에 석물을 세워놓는 제도는 통일신라시대에 형성되어 고려시대로 이어졌으며 14세기 말엽에 공민왕의 현릉(玄陵, 1374년)과 왕비 노국공주의 정릉(正陵, 1365년)에서 능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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