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5 술로 그 사람됨을 본다

논어와 놀기 2021. 3. 5. 20:50 Posted by 문촌수기

수원화성 팔달문에서 지동시장으로 가는 거리에 정조대왕이 앉아 계신다. 주안상을 펼치고 술을 따르며, "불취무귀(不醉無歸)-취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다"며 명을 내리신다. 양껏 마시라는 뜻이겠다. 임금께서 즐거워 먼저 취기가 오르듯 하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에 나오는 장면이다.

술이 약한 나는 술 잘마시는 이가 부럽다. 취하여도 내가 술을 즐겨야지, 술이 나를 이기니 뒤탈이 두렵기 때문이다.

醉(취)는 '술'을 의미하는 酉(유)와 '끝마치다'는 의미를 가진 卒(졸)이 결합된 것으로, 술을 끝까지 마셔 취한 상태를 뜻한다. <설문해자>에서는 醉를 "주량을 채워서 마셨으되, 추태를 보이지는 않는 상태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古文에서 卒은 술에 취해 옷을 풀어헤치고 비틀거리는 사람의 형상이다. 두 다리가 꼬일 정도로 만취한 모습이다. 卒에는 '죽다'는 뜻도 있으니, 만취하면 죽음에도 가까워지나 보다. 아예 술을 이겨보려고 다투지 말아야 겠다.

신윤복, '유곽쟁웅(遊廓爭雄).'- 술집(유곽)에서 붙은 시비로 밖에 나와서도 싸움판이 이어졌다. 이미 갓을 부서지고 분을 삭히지 못한 선비는 웃통을 풀어 제킨다. 많이 취한 듯하다.


09 16 子曰: “出則事公卿, 入則事父兄, 喪事不敢不勉, 不爲酒困, 何有於我哉?”
(자왈: “출즉사공경, 입즉사부형, 상사불감불면, 불위주곤, 하유어아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갔으면 공경을 섬기고, 들어와서는 부형을 섬기며, 상사에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으며, 술에 곤(困)함을 당하지 않는 것. 이 중에 어느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
(~술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 술에
지지 않으려면 술과 다투지 말아야 한다.)

The Master said, ‘Abroad, to serve the high ministers and nobles; at home, to serve one’s father and elder brothers;
in all duties to the dead, not to dare not to exert one’s self; and not to be overcome of wine:– which one of these things do I attain to?’

불위주곤

 더하기+> 정조대왕의 불취무귀(不醉無歸)

​[조선왕조실록, 正祖 34卷, 辛未년 16年(1792年 3月 2日)] ~ 가운데줄에서 부터

조선왕조실록-정종(정조)실록, 34권. 3월 2일

​성균관 제술(製述) 시험에서 합격한 유생을 희정당(熙政堂)에서 불러 보고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는 연구(聯句)로 기쁨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醉之以酒以觀其德)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不醉無歸)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하였다.

각신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오태증(吳泰曾)은 고 대제학 오도일(吳道一)의 후손입니다. 집안 대대로 술을 잘 마셨는데, 태증이 지금 이미 다섯 잔을 마셨는데도 아직까지 취하지 않았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희정당은 바로 오도일이 취해 넘어졌던 곳이다. 태증(泰曾)이 만약 그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찌 감히 술잔을 사양하겠는가. 다시 큰 잔으로 다섯 순배를 주어라.” 하였다.
식사가 끝난 뒤에 영보(榮輔)가 아뢰기를,
“태증(泰曾)이 술을 이기지 못하니 물러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취하여 누워 있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날 숙종조에 고 판서가 경연의 신하로서 총애를 받아 임금 앞에서 술을 하사받아 마시고서 취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던 일이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이 또 이 희정당에서 취해 누웠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하고, 별감(別監)에게 명하여 업고 나가게 하였다. 그때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니, ‘봄비에 선비들과 경림(瓊林)에서 잔치했다.’는 것으로 제목을 삼아 연구(聯句)를 짓도록 하였다. 상이 먼저 춘(春) 자로 압운하고 여러 신하와 여러 생도들에게 각자 시를 짓는 대로 써서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취하여 짓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내일 추후로 올리라고 하였다..

술로 취하게 하고, 그 모습을 살펴본다(醉之以酒以觀其態) ~ 태공망 강여상의 병법서 <육도> 에서 장수를 고르는 여덟가지 방법(八徵之法·팔징지법)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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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7 홍의, 넓고도 굳세도다.

논어와 놀기 2021. 2. 22. 11:26 Posted by 문촌수기

도산 서원의 중심이 되는 주강당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은 각종 회합과 공부가 이루어지는 주강당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짝수 칸으로 이루어진 전교당의 '도산서원' 편액은 선조의 사액(賜額)으로 한석봉의 글씨이다. 실내 중앙에는 전교당, 정조대왕이 지으신 제문과 전교(傳敎)를 달아두었고 서벽에는 한존재(閑存齋)의 현액이 있다. 전교당의 계단 아래 좌우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는 방으로 동재가 박약재(博約齋)이고, 서재가 홍의재(弘毅齋)이다.
박약재는 <논어>의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의 준말이며, ‘학문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자신을 절제하라’는 뜻이다. 홍의재의 ‘사불가이 불홍의(士不可以不弘毅)’에서 가져온 말로, '홍(弘)'은 크고 넓은 마음이며, '의(毅)'는 굳세고 결단 있는 의지를 말한다. 선비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무척 사랑하는 정조(正祖)대왕의 호는 홍재(弘齋)이다. ‘군자의 도량은 넓어야 한다’는 것으로  역시 <논어>에서 얻은 호이다.

08 07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증자왈: “사불가이불홍의, 임중이도원.
인이위기임, 불역중호? 사이후이, 불역원호?”)
증자가 말씀하였다."선비는 마음이 넓고 다시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으니 무겁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니 멀지 않은가!"
The philosopher Tsang said, ‘The officer may not be without breadth of mind and vigorous endurance. His burden is heavy and his course is long.
‘Perfect virtue is the burden which he considers it is his to sustain;– is it not heavy? Only with death does his course stop;– is it not long?

홍의
도산서원 홍의재(서재)
홍의재 현판

정조의 호 ㅡ 홍재.
정조는 조선의 임금 중에서 가장 호가 많다.
맨 먼저 사용한 호는 왕세손 시절 자신이 거처하던 동궁의 연침(燕寢)에 이름 붙인 ‘홍재(弘齋)’였다. 홍재는 위의 『논어(論語)』08 ‘태백(泰伯)’ 편 구절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다. 그외, 탕평의지를 밝히는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호 역시,『서경』
에도 있지만『논어』07 술이편 '군자탄탕탕'에서 취한 것이다.

정조, 황제 휘 산, 자 형운, 호 홍재

 

조선 22대 왕인 정조의 시문(詩文)과 교지(敎旨) 등을 엮은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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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파주삼릉)

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2021. 1. 7. 10:29 Posted by 문촌수기

영릉,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조씨의 능(쌍릉)
영조의 첫째 아들, 사도세자의 이복형, 정조의 호적상 아버지

 

영릉 정자각
영릉비각

 


영릉永陵(추존 진종과 효순황후)

위치 :경기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능의 형식 :쌍릉능의 조성 :1726년(영조 5), 1752년(영조 28), 1776년(정조 즉위)

능의 구성

영릉은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조씨의 능이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진종소황제, 오른쪽이 효순소황후의 능이다.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검소하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영릉의 비각은 총 2개로 비각 안에는 세 기의 능표석이 있다. 1비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비, 2비는 진종대왕(眞宗大王)의 비, 3비는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의 비로 진종이 추존될 때마다 능표석을 새로 세웠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1쌍씩 배치하였다. 문석인은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능의 역사

1728년(영조 4)에 진종이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29년(영조 5)에 파주 순릉 왼쪽언덕인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751년(영조 27)에 효순소황후가 왕세자빈(현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52년(영조 28)에 효장세자묘 왼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그 후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조의 계승상 아버지가 되는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영릉이라 하였다.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이야기

진종소황제(재세 : 1719년 음력 2월 15일 ~ 1728년 음력 11월 16일)는 영조와 정빈 이씨의 아들로 1719년(숙종 45)에 창의궁에서 태어났다. 1724년에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가 이듬해인 1725년(영조 1)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728년(영조 4)에 창경궁 진수당에서 10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세자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1776년(영조 52)에 영조의 명으로 이복동생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이 양자로 입적이 되자 효장승통세자(孝章承統世子)라 하였고,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그 후 1908년(융희 2)에 진종소황제로 추존되었다.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 이야기

효순소황후 조씨(재세 : 1715년 음력 12월 14일 ~ 1751년 음력 11월 14일)는 본관이 풍양인 풍릉부원군 조문명과 완흥부부인 이씨의 딸로 1715년(숙종 41)에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27년(영조 3)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1729년(영조 5)에 진종이 세상을 떠나자 1735년(영조 11)에 현빈(賢嬪)에 봉해졌다. 이후 1751년(영조 27)에 창경궁 건극당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왕세자빈에게 효순(孝純)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세손 정조가 진종의 양자로 입적되자 효순승통세자빈(孝純承統世子嬪)이라 하였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 효순왕후로 추존되었고, 1908년(융희 2)에 효순소황후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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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릉ㆍ健陵
-조선 제22대 정조선황제와 효의선왕후의 능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1752~1800, 재위 1776~1800)는 장조의 둘째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英祖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 천명하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규장각을 두어 학문 연구에 힘썼으며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城을 건축하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재위 24년(1800)에 세상을 떠나자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올렸으며, 광무 3년(1899) 정조선황제로 추존하였다.
효의황후 (1753~1821)는 청원부원군高原院君 김시묵金時의 딸로 영조 38년(1782) 왕세손빈에 책봉되었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천성이 공손하고 온화하였으며, 왕대비시절 여러 차례 존호에와 잔치를 베풀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고 한다. 순조 21년(1821)에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의왕후王后라 올렸으며, 광무 3년 1899) 효의선황후로 추존하였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호학군주가 고하는 기막힌 반전” (정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정조는 온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군주이다. 그런데 화성행궁 화령전에 봉안된 정조의 초상화는 곤룡포가 아닌 군복 차림이다. 틀에 박힌 정조의 이미지에서 살짝만 벗어나면, 우리가 익히 알던 호학군주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 족보 『선원보략』에서 볼 수 있는 간략한 그림과 '우뚝한 콧마루,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순조실록」의 기록을 따르면 정조의 실제 얼굴은 다부진 모습일 확률이 높다. 그 모습을 상상하건데, 의외로 정조에게서 늠름하고 호방한 무인의 기상이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무비를 닦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하지 않고 군병이 연습하지 않아서 번번이 조금만 달리면 다들 숨이 차서 진정하지 못한다. 이를 장수는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군병은 예사로 여기니, 어찌 문제가 아니겠는가. 훈련대장 홍국영과 병조판서 정상순은 이에 힘쓰도록 하라."
「정조실록』 권8, 3년(1779) 8월 3일

정조는 문치 뿐만 아니라, 무예와 군사훈련 역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왕위에 오른 후 정조는 아주 의미심장한 정예부대를 육성하였는데, 국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그것이다. 왕궁이 있는 서울과 그 주변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장용영은 그 훈련부터 특별했다. 정조가 친히 활쏘기 시범을 보이며 훈련을 독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정조의 활쏘기 실력은 당시에 그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출중했다. 정조 16년 10월 26일에 정조가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50발(10) 중 49발을 명중시켰다는 기록이있다. 그 중 마지막 화살은 아예 쏘지 않고 두면서 "다 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니, 그의 여유 넘치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의 강단 있는 모습은 8일 간의 화성 행차에서 절정을 이룬다. 「정조실록』 권42,19년(1795) 윤2월 9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창덕궁을 나섰다. 115명 기마 악대의 웅장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6000여 명의 수행원이 그 뒤를 따랐다. 이거대한 행렬의 목적지는 수원 화성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선언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행차였지만, 그 이면에는 그간 다져왔던 왕권을 과시하고 정치개혁에 박차를 가하려는 정조의 야심찬 목적이 숨어 있었다. 이날 화려한 곤룡포를 벗고 군복으로 무장한 채 화성의로 향하는 정조의 모습에서 화성 행차의 감회가 어떤 것이었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2009년 2월에 공개된 '정조어찰첩은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당시 정치적으로 반대 입장에 있었던 신하 심환지와 주고 받은 비밀서신에서 치밀한 전략가였던 정조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껄껄대며 '배를 잡고 웃었
다[令人] 와 같은 가벼운 어투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편하게 표현한 정조의 새로운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정조를 온화하고 부드러운 호학군주로만 기억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기막힌 반전이다.

 

반시계 방향으로 융릉 뒤로 크게 돌아 건릉 뒤로 화산을 산책하면 말그대로 산림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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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융건릉)-정조의 부, 사도세자

카테고리 없음 2020. 11. 24. 12:34 Posted by 문촌수기

융릉(隆陵) : 추존 장조의황제(사도세자)와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의 능
추존 장조의황제 莊祖懿皇帝
(1735-1762, 사도세자)는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의 생부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글과 시를 잘 지었고, 무예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 (대리청정)를 보게 되며서 노론정권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급기야 영조 38년(1762) 나경언의 고변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된 후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곧 이를 후회하고 애도하는 뜻에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조는 즉위 후 존호를 장헌세자라 올렸으며, 광무 3년(1899) 장종莊宗을 거쳐 장조의 황제로 추존하였다.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1735 1815, 혜경궁 홍씨)는 영풍부원군永興府院君 홍봉한의 딸로 영조 20년(1744) 왕세자빈에 책봉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혜빈에 봉해졌고, 정조 즉위 후 혜경궁으로 칭호를 올렸다. 이후 자전적 회고록인 《한중록》을 직접 쓰기도 하였다. 광무 3년(1899) 헌경왕후王后를 거쳐 현경의황후로 추존하였다.

 

융릉, 연꽃봉오리와 연잎 모양의 인석
융릉 앞, 곤신지. 일반적으로 왕릉에서 보기 드문 원형 연못이다.
금천교
융릉, 홍살문과 정자각
융릉의 능침, 문ㆍ무석인이 한계단에 있다.
문석인
무석인
무석인의 뒷모습, 투구와 갑옷의 무늬가 섬세하다

 

혼유석과 귀면
고석의 귀면, 섬세ㆍ화려ㆍ선명하다

 

병풍석과 인석

 

장명등
망주석ㆍ세호
세호 細虎 - 이름대로 '작은 호랑이'를 닮은 듯하다.

* 인석: 병풍석의 구성요소 중에 인석은 병풍석 상단의 만석을 제자리에 있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데, 기다란 사각기둥 형태로 열 두 귀퉁이에 튀어 나와 그 끝에는 국화, 규화(접시꽃), 모란 같은 꽃들로 장식되어있으며, 『세종오례의』에 언급 되어 있다.
*세호(細虎): 망주석의 가운데 기둥에는 세호(細虎)가 새겨져 있다. 세호는 중국의 망주석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세호의 한자의 뜻풀이대로 하면 아주 '작은 호랑이'라는 뜻이나, 실제는 호랑이 모습과 닮지는 않았다. 세호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국조상례보편』(1752)에서 인데, “세호를 조각하여 왼쪽의 망주에는 오르게 하고 오른쪽의 망주에는 내려가게 하였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즉,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에 보이는 명칭인 ‘세호’는 그 정체나 새긴 목적이 밝혀지지 않아 상징성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장식화 되었고 조선 중기부터는 구멍이 막혀 있으며 꼬리가 긴 동물이 조각되었다. 또한 세호가 동물의 형태로 바뀌며 운동성이 생겼는데, 대체로 좌승우강(左陞右降)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망주석 명칭

 




융릉 곤신지에 연잎이 덮혀있다.

 

<조선왕조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뒤주의 비극 속에 가려진 아버지의 마음”(추존 장조 - 사도세자)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자결하라!"

영조의 노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격해졌다. 땅에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선 피가 흘렀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영조의 노여움은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려만 달라는 세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영조는 끝내 명을 내린다.

"세자를 폐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깊이 가두라!"

『영조실록』 권99, 38년(1762) 윤5월 13일의 기록이다. 역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사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비극을 실록은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 사로잡힌 나머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세상 단 하나뿐이었던 아들, 더욱이 대리청정을 시켰을 정도로 기대가 크고 귀하게 여긴 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맏아들 효장세자를 일찍이 떠나 보내고 7년 간 후사가 없어 애태우던 영조는 마흔 둘에 이르러 아들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러니 영조의 아들 생각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즐겁고 기쁜 마음을 어찌 말하랴! 내전에서 아들로 취하고 원자의 호를 정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겠는가? 즉시 이를 거행해 종묘와 사직에 고하도록 하라.”
-『영조실록』 권40, 11년 1월 21일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왕위를 물려줄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조금도 망설임 없이 사도세자가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하고 신하들에게 온 정성을 다해 교육에 힘써줄 것을 부탁했다.
세자가 3세이였던 영조 13년 '세자가 이미「효경』을 읽고 글을 쓸 줄 알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세자가 썼던 글이 '천지왕춘' 이다. 이에 놀란 여러 신하들이 앞 다투어 나와 세자의 글을 하사하여 줄 것을 청하니, 영조는 기쁜 나머지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하며 세자의 재간을 보았다고 하고 그 후에도 영조는 여러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 세자와 동행해 세자가 쓴 글씨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영조 역시 아들의 재능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여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세자의 대리청정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노론이 외면한 시도세자의 대리정정이 순탄할 리 없었고,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괴이한 행동을 하던 사도세자는 끝내 영조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히게 한 죄목은 다음과 같다. 정신질환으로 궁녀를 죽인 것, 여승을 궁녀로 만든 것, 그리고 아무도 몰래 20여일 동안이나 관서지방을 유람했던 수상한 행동을 한것.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일 뿐, 그 이면에는 더욱 무서운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처단해야 했던 아버지의 비극 또한 잠들어 있다. 왕과 세자이기 전에 부자 사이였던 두 사람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더욱 가슴 시린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임금이 열 살이 된 세자에게 묻기를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 하니, 세자가 한참 동안 있다가 대답하기를 "싫을 때가 많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의 이 말은 진실한 말이니, 내 마음이 기쁘다." 하였다.
영조실록, 권60, 20년(1744)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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