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의 역사를 찾아 온 김에 갈 때까지 가보자 싶었다. 해는 저물어도 우리 언제 다시, 이 부끄러운 역사산책을 더듬어 볼까 싶어서 석촌호수에 있는 삼전도비를 찾으러 갔다.
삼전도(三田渡)는 한강의 여의도와 같이 섬(도ㆍ島)이 아니라, 한강의 나루터(건널 渡)이다. 삼전도로 가는 길에 날은 어두워졌다.
부끄러운 과거도 역사다.
감추지 말고 잊지말며 드러내고 가르쳐서 두번 다시는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삼전도비(三田渡碑)
인조 14년(1636) 봄, 조선은 형제 관계를 군신 관계로 바꾸자는 후금의 요구를 물리쳤다. 국호를 대칭(大淸)으로 바꾼 청 태종은 이윽고 병자호란을 일으켰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항거하다가 당시 한강나루터였던 삼전도로 나와 청 태종의 신하가 되는 의례를 거행했다.
인조 17년(1639)에 세운 삼전도비의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清皇帝功德碑)이며 이러한 치욕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로 몸돌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용 모양으로 장식했다. 몸돌 앞면에 청에 항복했던 상황과 청 태종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만주문자(왼쪽)와 몽골문자(오른쪽)로 새겼고, 뒷면에는 한자로 새겨 놓았다. 비석 옆에는 작은 크기의 받침돌이 하나 남아있는데 이는 더 큰 비석을 세우라는 청의 요구 때문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삼전도비는 고종 32년(1895)에 청일전쟁이 끝난 뒤 땅속에 묻혔으나 1917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다시 세웠고 1956년에 문교부 주도로 또다시 땅속에 묻히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후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자리를 옮겨 다시 세웠고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원래 위치(현재 석촌호수 서호 내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201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설치했다.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조선후기 병자호란 관련 비.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
https://maps.app.goo.gl/PW8V9vcxPSkvHKDz6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서 옮김)
삼전도비
1963년 사적로 지정되었으며, 비신 높이 395㎝, 너비 140㎝이다. 1639년(인조 17)에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세워진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이며,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거비(巨碑)이다.
비양(碑陽)에는 왼쪽에 몽고문(蒙古文), 오른쪽에 만주문(滿洲文), 그리고 비음(碑陰)에는 약 2.1㎝ 크기의 한문 해서가 새겨져 있으며 비액(碑額)은 전서(篆書)로서 “大淸皇帝功德碑(대청황제공덕비)” 라고 적혀 있다. 비문(碑文)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해서로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전(篆)하였다.
이 비는 1636년 12월 청 태종이 대병을 이끌고 침공하였을 때, 남한산성에서의 항전을 뒤로하고 백성의 안위를 위해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한 사실을 보여주는 우리 민족 치욕의 유적이다.
본래 청 태조가 청나라와 조선은 형제로 보고 서로가 예우(禮遇)로써 대하고자 하였으나 조선의 조정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청 태종이 대노하여 쳐들어와 한강 상류 삼전도에 주필(駐蹕 : 임금이 잠시 머무름)하고 항복 받은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여야 한다는 강박(强迫)에 못 이겨 세우게 되었다. 따라서, 몽고문 · 만주문 · 한문의 3종 문자로 같은 내용을 담은 것은 이 비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