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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작의 작가 - “나를 깨달아 만물을 구원하려 한 선비의 공부, 경박한 현대인에 가르침”

by 문촌수기 2013. 10. 2.

“나를 깨달아 만물을 구원하려 한 선비의 공부, 경박한 현대인에 가르침”

 

 2012-05-25 19:43:08수정 : 2012-05-25 19:44:2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251943085&code=900308 에서

ㆍ‘천작’의 김기현 전북대 교수



조선시대 선비들은 왜 공부를 했을까. 흔히 과거를 봐서 벼슬길에 나가기 위한 수단쯤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새로운 의미를 읽어낸 시도들도 있었지만 선비들의 학문하는 자세와 방법을 칭송할 뿐이지 정작 그들이 왜 공부하는지를 묻는 천착은 드물었다.

김기현 전북대 교수(61)는 최근 내놓은 <천작(天爵)>에서 ‘그들의 공부’를 되짚어 본다. 김 교수가 인용한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은 학문을 “깊은 산 숲 속에서 종일토록 맑은 향기를 뿜으면서도 제 스스로 그 향기를 알지 못하는” 한 떨기 난초의 꽃피움에 비유했다. 난초는 남들의 찬탄을 받기 위해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지 않는다. 그렇듯 공부도 남에게 보이고자 하기보다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꽃피우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공부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향기’를 전한다.

김 교수는 지난 23일 전화 인터뷰에서 <중용>에 나오는 ‘성기성물’(成己成物)이란 말로 선비들의 학문하는 자세를 설명했다. “참자아의 완성과 타자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자신의 성취뿐만 아니라 타자, 즉 이 세상 만물을 성취시켜 준다는 의미입니다. 조선시대 정구(1543~1620)라는 학자는 학문에 있어서 네 가지 ‘온몸의 정신’을 강조했어요. 온몸으로 인식하고, 성찰하고, 실험하고, 실천하라는 것이죠. 단지 관념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머리로만 공부하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내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시대 삶을 지배하는 것은 한마디로 가벼움의 정신”이라고 말한다. 인간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사물이나 현실, 심지어는 자신의 존재 가치나 삶의 참가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마주하고 깊이 있게 접촉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질적 욕망이나 권력, 명예만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인 세태입니다. 결국 종교에 의지하지만 대체로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시에 이르기를,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다’ 하니, 이는 사랑과 의로움에 배부름을 말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돈과 권력, 학벌과 미모로 자긍하고 스스로를 치켜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빼앗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반면 사랑과 정의, 진리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본질이다. 그래서 맹자는 전자를 ‘인작(人爵·사람이 내린 벼슬)’이라 했고, 후자를 ‘천작(天爵·하늘이 내린 벼슬)’이라고 했다. 천작으로 우뚝 선 사람이 대장부다. 맹자는 대장부를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집에서 살고, 이 세상에서 가장 바른 자리에 서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길을 걷나니”라고 표현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길은 결국 개개인의 틀에 갇힌 자아를 넘어서는 삶의 자세를 뜻한다. 영화 <스타트랙>을 보면 순전히 의식적인 에너지로 존재하는 외계의 한 생명체가 사람의 몸에 들어가 육체를 갖자마자 ‘정말 외롭구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 교수는 “동서고금 인류의 스승들이 수행을 그토록 강조했던 이유는 육체로 말미암는 개인의 자폐성향을 겨냥한 것”이라며 “자아를 부단히 닦고 길러 존재의 본래성, 공동체적 존재성을 회복하고 이를 토대로 만물을 구원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공자는 한 제자에게서 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 “나를 초극하여 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맹자는 ‘역지사지를 통한 배려와 보살핌’을 강조했다. 곧 ‘자아의 초극’ 정신이다.

김 교수는 이런 가르침을 유학에서만 가져오지 않는다. 때로는 신동엽의 시구절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금강’)를 인용한다. 우리가 ‘먹구름’을 ‘하늘’로 착각하고 산다는 것이다. “사과 속에 벌레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벌레의 집과 밥과 옷을 빼앗고 나라에서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누가 사과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정했습니까”(짧은 이야기)라는 김용택의 시에서는 만물을 향한 인간 존재의 무한 확장을 보여준다.

중국의 주돈이(1017~1073)가 자기 집 뜨락의 풀을 베지 않고 자라나는 대로 둔 것이나, 조선 명종 때 안현(1501~1560)이 지렁이를 약으로 쓰라는 처방에 “어찌 내 병을 위해 생명 있는 것을 죽이겠는가”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우연히도 그런 시구에 꼭 들어맞는다. ‘나’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습관적으로 많이 하는 이들일수록 관상동맥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심리학자 래리 셔비츠의 연구결과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김 교수의 폭넓은 학문적 관심이 엿보이기도 한다.

“옛 선비들도 그랬지만, 이른바 인류의 스승들이라 불리는 예수, 부처, 공자 등이 결국 인간은 어떤 존재냐는 물음 속에서 도달한 결론은 사랑과 진리, 의로움입니다. 대개 오늘날 사람들이 선비를 얘기할 때 역사 속 인물로서 화석을 뒤지는 것처럼 조명하거나 당대의 사상사적 관점에서만 접근합니다. 저는 단지 그런 골동품 감상이 아니라 현재적 관점에서 이 시대까지 살아 내려오는 정신으로 되짚어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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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문고 : 천작 소개 글 > http://blog.naver.com/shmj21/13013944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