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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한시에 담긴 조선 선비의 삶

by 문촌수기 2013. 10. 2.

 두 편의 한시에 담긴 조선 선비의 삶 2013-09-04 08:18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저
솔 | 2005년 11월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 김인후(1510~1560)는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정월 대보름달을 보고 다음과 같은 오언절구 시를 지었다.

 

정월 대보름 저녁(上元夕)

 

땅 생김새 따라서 높고 낮지요

하늘 때가 저절로 이르거나 늦지요

사람들 말 무엇하러 신경쓰나요

밝은 달은 본래가 사사롭지 않아요

 

高低隨地勢 早晩自天時 人言何足恤 明月本無私

 

동산 위에 뜬 환한 보름달이 큰 구경거리였던 옛날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달을 바라보면서, “올해는 달이 높이 떴네, 낮게 떴네하기도 하고 지난 한가위 때보다 일찍 떴네, 더디 떴네하면서 시끌벅적 말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다섯 살배기 꼬마가 말했다. “어른들 말씀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밝은 저 달은 원래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항상 제때가 되면 제 높이에 환하게 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이 아이는 벌써 땅의 드넓음과 절후의 뒤바뀜을 의식하고 있다. 아이는 또 자연의 공간과 시간을 말한 후에 이어서 그 안에 사는 사람을 이야기한다. 첫 구절에 땅(), 둘째 구절에 하늘(), 셋째 구절에 사람()이 보인다. 우리 우주를 이루고 있는 세 바탕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말한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아이가 대자연의 운행 질서로부터 도덕심을 연상한 대목이다. “밝은 달은 본래 사사롭지 않다고 했을 때의 사사로움이란 제멋대로이기 쉬운 인간의 마음을 가리킨다. 뒤집어 말하면 사람도 저 달처럼 변함없이 제때에 제 높이에 떠서 세상을 환히 비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260~261쪽)

 

 

 

오주석의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오주석 저
솔 | 2006년 02월

 

이 『소학』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고 평생 실천했던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은 바른 선비를 호랑이에 비유한 다음 시를 지었다. 조식은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경상우도의 대학자였다. 퇴계가 여러 차례 세상에 나오기를 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일체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했던 큰선비였다.

 

사람들 바른 선비 사랑하는 것

범가죽 좋아함과 비슷하다네

살았을 땐 반드시 죽이려 하고

죽은 뒤에 아름답다 칭찬하니까

 

人之愛正士 好虎皮相似 生卽欲殺之 死後方稱美

 

생전에는 참 선비의 올곧음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죽이려만 들다가 죽은 다음에야 그 껍질을 두고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이율배반…… 이러한 세태는 예나 지금이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 시대에 우리가 짓고 있는 죄는 비단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이 벌써 산천초목 금수에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조국의 좁은 강토를 깎아 만든 골프장, 스키장은 연면적이 전국의 공장 부지보다 넓은데도 저 깊은 산속에는 호랑이 한 마리 없는 것이 현실이다.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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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는 조선의 선비들이 그린 옛 그림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들의 문집에서 뽑아온 한시(漢詩)도 여러 편 소개되어 있다. 그중에서 위에 인용한 두 편은 특히 내 마음에 다가와서 옮겨적어 놓았다.

 

첫번째 한시는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지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솜씨다. 아마도 김인후가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남달리 뛰어난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그렇더라도 그토록 어린 나이에 벌써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당시에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일찍부터 선비 수업을 시작했으니 조선의 선비들이라면 누구나 어지간하면 시서(詩書)의 실력은 기본으로 갖추었고 개인 문집 한 권쯤은 남기게 된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공부를 오래도록 많이 했어도 바른 선비로 살아가기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두번째 한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바른 선비를 그냥 놔두지를 않는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남들의 질시와 모함 속에서 죽어간 선비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아는 것과 올곧게 사는 것을 일치시키기란 참으로 지난한 일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