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뜻 동묘를 찾다.

한국문화유산의 길 2016. 4. 3. 21:52 Posted by 문촌수기
약속이 취소된 줄 모르고 나선 서울 나들이. 언뜻 떠올린 생각따라 동묘를 찾았다. 정식 명칭은 동관왕묘.
성균관의 대성전이 공자를 위한 문묘라면, 이곳 동관왕묘는 삼국지의 관우를 위한 무묘란다. 임진왜란에서 조ᆞ명의 연합군이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에 관우의 은덕이라 여겨 사당을 짓고 제사드렸다 한다.
올해 중국문화 동아리 학생들이 지도교사 되어 달라기에 덕분에 언뜻 생각이 나서 먼저 들렀다. 동묘 담장 둘레에는 골동품 시장이 열려있다. 늙고 닳은  중고 물건을 닮아 사람들도 모두 늙었다. 봄꽃도 벌써 바람에 흩떨어진다. 목마른 비둘기가 정겹게 모여 목을 축인다. 나도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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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정조의 뜰, 융릉과 건릉

(길 위의 인문학 산책)

경기도 인문교양교육자료개발연구회, 인문학 길 위에서 만나다.’의 원고입니다.

매홀고등학교 황보근영

 

3-2-융릉과건릉.pdf: 파일을 받아 읽어보세요.

융릉 건릉의 배치도와 관람 포인트 융릉의 원형 연못 곤신지 : 원형 연못은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정조가 아버지를 연모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넓은 참도 봉분 병풍석의 연꽃봉오리 인석 건릉에서 나오는 길 참나무 숲 길 재실의 향나무와 개비자나무

- 문화재청 융릉관리소 융릉 건릉안내지에서

 

융건릉의 정식 명칭은 융릉(隆陵)과 건릉(健陵)’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면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며 당당히 외쳤다. 역적으로 몰리며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며 복권시킨다. 먼저 양주의 배봉산에 있는 아버지의 수은묘를 영우원(永佑園)으로 높였다.

 

이후 존호를 장헌세자로 올린 다음,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통상 왕릉은 한양도성에서 10리 밖 100리 안에 두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정조는 이 원칙을 무시했다. 키 큰 장정들을 모아 한 걸음을 크게 잡은 뒤에 이곳 화산이 100리 안이라고 주장하며 천장을 강행하였다. 탕탕평평과 임기응변의 그의 도량이 돋보인다. 그 후 1899년 고종 때에 장헌의황제로 추존되면서 묘호를 장조(莊祖)라 하고 능호를 융릉으로 승격하며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혜경궁 홍씨도 장헌의황후로 봉해졌다.

 

홍살문에서 참도를 걸으면 정자각과 봉분이 일직선상에 있어 능침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융릉은 봉분이 훤히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즉 능침공간이 정자각에서 오른쪽으로 삐져나와 보인다.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돌아가실 적에 얼마나 답답했을까라며 안타깝게 여긴 아들의 효심에서 비롯되었다. 사초지도 다른 능과 달리 매우 낮다. 찾아오는 백성들을 조금이나마 가까이 보고자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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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뜰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길 위의 인문학 산책)

경기도 인문교양교육자료개발연구회, 인문학 길 위에서 만나다.’의 원고입니다.

매홀고등학교 황보근영

 

3-1-조선왕릉.pdf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이심전심 아니랄까? 정말 오랜만에 함께하는 아내와의 휴일이다. 아내가 융건릉에 가잔다. 또 가잔다. 오늘같이 조용히 비 내리는 휴일이면 제격이다. 비 내리지 않아도 산책하기에 참 좋은 곳도 이곳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가까운 융건릉이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고양시를 떠나 낯선 이곳 화성으로 이사 와서도 늘 마음 한 구석에 다행이라 여기는 것도 융건릉이 있기 때문이다. 고양시에는 서삼릉과 서오릉이 있고, 가까운 파주에는 파주삼릉이 있다. 그곳은 우리 가족의 당일치기 휴양지였다. 우리 부부가 특별히 왕릉나들이를 좋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전생에 우리가 왕족이었나? 하하하.

누구에게라도 그럴 거라며 권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들이하기에 왕릉만큼 좋은 곳은 없다고. 도심에서 가깝다. 그러면서도 사랑의 밀어를 나누기 좋을 만큼 조용하다. 시원한 숲길을 산책하기에도 좋고, 어린 아이들은 뛰어 다니며 놀아도 다치거나 잃어버릴 걱정이 없다. 지친 삶을 달래며 돗자리 펼쳐놓고 쉬다가 작은 책 한권 다 읽고 돌아오기에도 좋다. 그러다가 졸리면 그걸로 얼굴 덮고선 한 숨 자고와도 좋다. 무엇보다 푸른 숲 속과 그늘의 쉼터도 있고, 가슴 탁 트이게 넓고 푸른 곳에 왕족과 역사가 있어 좋다. 가끔 만나는 다람쥐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아내와 함께 했던 그곳을 선생님들과 같이 찾아가고, 선생님들과 함께해서 좋았던 곳을 다시 아내와 찾아간다. 뜻이 맞아 같은 길을 걸어가는 선생님들과 함께 공부하고 서로 다른 생각 나누기에도 이곳은 참 좋다. 그 때 나누었던 자료를 여기에 붙이고 지금의 생각을 또 더한다.

 

 

조선 왕릉에 대하여

1408년 조성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에서부터 시작되어 1926년 조성된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홍릉까지 500여년의 조선 왕릉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문화적 가치로 인정받아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내 삶의 주변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多幸)인가?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조선 왕릉의 가치는 무엇인지, 융릉과 건릉을 찾아가는 인문학 산책을 한다.

 

먼저 조선 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때 인정받은 인류의 탁월하고 보편적 가치란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자.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 친화적인 미학이 있다.

백성의 수고를 덜어주며 절제되고 검소하게 조성되었다.

유교적 풍수사상과 장례전통 그리고 아름다운 조경양식

600년 가까이 이어져 오는 왕릉의 제례의식

동아시아의 무덤 건축 발전 단계를 잘 보여줌

조선 왕릉 전체가 정부에 의해 통합적으로 관리 보존

왕릉 조성 과정과 장례식의 상세한 기록

 

참고로 왕릉의 조성과정과 장례식을 상세히 기록해둔 <조선왕조의궤><산릉도감의궤>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2007)에 등재 되었다. 이 중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는 그림인 능행도는 무려 길이가 15.4미터가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5번째이며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세계기록유산을 가졌다.

조선의 왕이 27명이니 왕릉은 27기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왕릉은 총 42기의 능과 2기의 묘가 있다. 왕세자와 왕세자비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인 원()13기이다. 이는 역대 국왕의 능 이외에 왕비의 능과 추존왕릉(사도세자의 융릉)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며, 2기의 묘란 임금이었지만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묘를 말한다. 현재 북한에도 태조 이성계의 첫째부인인 신의왕후의 제릉과 조선 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이 있다.

조선 왕릉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묘호와 능호를 알아야 한다. 묘호는 임금이 죽으면 붙어지는 이름이다. 즉 세종, 영조, 정조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능호는 그 임금이 묻히는 무덤의 이름이다. 세종의 영릉, 정조의 건릉 등을 말한다.

성명

묘호

시호

능호

이성계

이단()

태조

(太祖)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

건원릉

(乾元陵)

군진
(君晋)

송헌

(松軒)

이도()

세종

(世宗)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영릉

(英陵)

원정

(元正)

 

이산()

정조

(正祖)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

건릉

(健陵)

형운

(亨運)

홍재

(弘齋)

[조선조 역대왕의 묘호-시호-능호 구분]

무덤의 종류와 이름도 알아야 한다.

() : 왕과 왕비의 묘 [건릉 : 정조와 효의왕후능]

() :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왕세손비의 무덤 [소경원(서삼릉) : 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

() : 능과 원 이외의 일반인 무덤 [대빈묘(서오릉) : 숙종 후궁 희빈 장씨]

() : 무덤 주인공은 모르지만 벽화 등 특징적 무덤 [장군총, 천마총]

() : 주인공과 특징이 모두 없을 때 붙이는 이름 [고구려 고분]

[이하 생략 .........위의 pdf 파일 열거나 다운 받아서 읽어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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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 탐방 협조 공문 발송

한국문화유산의 길 2015. 10. 3. 21:48 Posted by 문촌수기

융건릉 관리 사무소로 협조공문 보냈습니다.  -  문화해설사와 함께 융릉(사도세자 능)의 능침공간 석물배치 해설을 듣기 위해서이죠.

본래 능침공간에는 개방을 하지 않는다기에 간곡하게 부탁드려 -문화재청-조선왕릉관리소-서부지구관리소장으로 공식 공문을 발송하여 허락을 구했습니다.

14:30부터 문화해설사 대동 - 융릉 해설 탐방 ....(1시간 내) 일정으로 문화해설사 하고도 방금 예약이 끝났습니다.

융릉 이후에는 제가 인솔하여 건릉(정조 능)으로 돌아서 참나무 숲길로 돌아오는 길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4시 30분이면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될 듯 합니다.

 

2015 학교안 전문적 학습공동체 직무연수에 따른 세계유산 ‘융릉·건릉’ 탐방 협조.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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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조대왕과 함께 사도세자ㅡ융릉에 제향하고 왔다. 지난 달 '길 위의 인문학 - 조선왕릉 융건릉 탐방기'의 글을 썼다. 그때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바로 왕릉의 제향 모습이었다. 오늘 마침,  "화성! 정조의 효가 꽃 피다." [2015 정조 효 문화제]에서 정조대왕의 융릉 제향이 재현된다기에 찾아 나섰다. 

[참조 >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 사도세자와 정조의 뜰(융건릉) 탐방 글 pdf파일 다운받아 보셔요.)

http://munchon.tistory.com/614 > 조선왕릉 이해

http://munchon.tistory.com/615 > 융건릉

 

굳이 '내가 정조대왕과 함께 융릉에 제향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자유롭게 가까이에서 전 과정을 살펴보았으며,

예필 후의 그 중요한 음복례를 정조대왕은 못 했지만 나는 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이 주신 복일거다.
호두 안주에 음복주까지 한잔 마셨더니 왕가의 기운을 받은 셈이다. 감사한 일이다.

[내가 미리 알고 있던 제향의식에서의 절차와 헌관인 왕(王 : 정조)의 동선과 제주(祭主)인 선왕(先王 : 사도세자)의 동선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먼저, 2007 문화재청에서 소개된 동선도를 참고한다. 동선도를 보면, 왕은 일주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옆으로 들어와 배위에 선다.

그리고 축함을 든 향관은 신도를 걷고 임금은 오른쪽 좀 더 낮은 어도를 걷는다. 향관은 운계(구름문양의 난간석이 있는 계단)로 오르고, 임금은 그 오른쪽 어계로 정자각에 오른다. 임금은 정자각 동문으로 정전으로 들어가 제향하고 서문으로 나와 서계로 정자각에서 내려온다. 분축하는 망료위(예감)이 이쪽에 있기 때문이다.]

 

이창환, 신의 정원 조선왕릉, 도서출판 한숲, 2014, p39에서

 

[10월 3일 융릉 제향의 절차] : 위의 동선도와 절차가 좀 다르다.

 1>제관들의 축함이 먼저 들어오고, 이후 풍악을 울리며 어가행렬이 금천교를 지나 홍살문 안으로 들어온다.

 

 

 

2> [전향례] 아들 정조는 홍살문 앞에서 어가에서 내려 배위에 올라 제향드리러 왔음을 아뢴다.

(배위에서 헌관 뿐 아니라 모든 제관들이 4배를 올리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었는데, 생략했는지? 내가 잘못 알고 있는지?) 그리고 축함을 축관에게 건낸다. 축함에는 아버지께 올릴 향과 축문이 들어 있다. 축함을 든 축관은 서쪽의 신도로 걷고, 임금은 동쪽의 낮은 길 어도로 걸어 정자각으로 들어간다.

 

 

 

 

 

 

 

 

 

3> 여러 제관 집사자들이 세수하고 제단인 정자각으로 오른다. 오르는 계단은 동계의 어계이다. 구름모양의 난간석이 있는 계단은 운계(향계, 신계)라 한다. 모든 집사들은 제각기 봉무할 곳에 자리 잡는다.

 

 

 

4> 이후, 면과 탕이 전사관과 능사에 의해 서계를 오른다. 통상 제례의식에서 메와 갱은 따뜻하게 제상에 올려져야 하기 때문에 늦게 제단에 오른다. 메와 갱일지도 모른다. 나중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고...메는 밥이고, 갱은 국이다.

 

 

 

5> [초헌례] 이제 초헌관인 정조대왕이 제단인 정자각을 오를 차례이다. 초헌관은 첫번째 제주를 드리고 배향하는 제례 진행의 주인이다. 정조대왕이 집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어계를 오른다. 서향하고 서서 제단에 올릴 술잔에 이작수주-두개의 술잔에 술을 따른다. 왕이 초헌관이 되는 경우를 친향례라 하며, 정승이 초헌관이 될 경우는 섭향례라 한다.

 

6> 수주한 이작은 두고 임금은 집사자의 안내에 따라 제향공간의 동문으로 들어가 북향하고 선다. 북향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능침 영역이다. 북향의 제단 문은 활짝 열려 있어 어버이의 능이 훤히 보인다. ㅡ 사도세자의 능은 다른 능에 비해 강(사초지의 언덕)이 낮아서 정자각안에서도 능침 봉분이 훤히 보인다. 어버이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했던 아들의 마음이 이런 능상을 조성하였을게다.

여기에서 아들은 향을 사르고 술잔을 올려 어버이를 제단(제상)으로 모시게 된다. 상징적이지만 정자각 바로 뒤에는 능침영역에서 내려와 제향공간인 정자각으로 건너 들어오게 되는 다리가 있다. 이를 신교라 부른다. 정자각 안에는 초대받은 부모와 찾아온 아들이 상면하는 거룩하고 애틋한 공간이다.

 

7>[봉축례] 아들(임금)이작수주한 제주가 들어간다.  이후 초헌관 정조의 제향 속에 축문을 올리는 예식이 있다.

[아헌례-종헌례] 이후 아헌관ㅡ종헌관의 헌주 사배예식이 따른다. 아헌관 - 종헌관은 두번째 세번째로 제향을 올리는 분들이다. 통상 종친에서 드리겠지만, 나라의 높은 분들이 드리기도 한다.

 

 

 

8> 정자각 제단 아래에서도 참여한 모든 종친이나 신하들이 제향의식을 따르게 된다.  

 

 

 

[국궁사배]

 

9> [망료례] 초헌관인 임금은 제단인 정자각 동계로 내려와서 거꾸로 ㄷ자 모양으로 걸으며 정자각 앞을 지나 서쪽에 있는 망료위 앞으로 가서 북향하여 서있는다. 그때, 축관이 제향했던 축문을 들고 서계로 내려와서 서향하며 선다.

(위의 문화재청 동선도에서는 초헌관인 왕은 정자각 위에서 서계로 내려오는 동선을 보이고 있는데....어느 것이 맞는지 좀 더 알아볼 일이다. 또한 예감에까지 가서, 분축-가료(可燎)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서 축문을 태우는데...형식적으로 태우는 시늉만 하였다. 아쉬웠다. 하늘을 오르는 축문의 향과 재와 연기를 봐야 더 실감나는 건데... 하기사 나는 가까이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지만 저 멀리 시민들에게는 실감이고 뭐고 알지 못할 일이다.

 

 

 

 

 

 

10>축문을 태운 대야그릇(?)을 들고 축관과 집사자가 사초지 안에 있는 예감 안에다 그 물과 재를 붓는다.
하늘과 땅에 올리는 아들의 기도이다. 융릉의 예감은 다른 능의 예감과 달리 능침 공간 안에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도 능침공간 안에 예감이 있다.) 그래서인지 축문을 태우는 대야가 정자각 서계 옆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여기에서 분축한 후에 사초지 안으로 들어가 예감에다가 분축한 물과 재를 비우는가 보다. (별도 가료 대야 설치 없이 예감까지 들어가서 분축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제사의 예법이 '가가례'라더니, 왕릉의 봉향제도 능능례인가? 농담이다.) 

 

 

11> 아들, 임금은 축관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이제 다시 정자각 앞을 돌아 원래의 동계 앞으로 돌아간다.

 

 

12> 예감 위로 사도세자의 능침 공간이 보인다. 석등, 석마, 무인석, 문인석, 망주석

그리고 곡장, 주인의 잠자리인 봉분이 보인다.

곡장 뒤에 다시 볼록한 언덕을 잉(孕)이라 한다. 아이를 밴 엄마의 볼록한 배꼴 모양이다.

산의 정기가 여기에 모여 마치 태아를 잉태할 자궁의 자리를 만들어주고 있다.

그 아래가 바로 새로운 삶과 탄생을 위한 명당이다.

나에게는 잉은 잉태를 위한 자궁의 자리이고, 강(岡)은 만삭의 엄마 배꼴 모양으로 보인다. 

그래서 왕릉의 능침 영역은 거룩한 모성의 자리이며 만삭의 엄마 모습이다.

 

 

13> [음복례] 모든 헌관, 제관, 참례자들이 사배로 제향의식이 끝난다. 알자(謁者)는 '예필(禮畢)아룁니다. 예필아룁니다.' 하며 행사가 끝났음을 선언한다. 실은 이후에도 매우 중요한 예식이 남았다.바로 음복례이다.
제향드리고 선조영령이 흠향하고 맛있게 드신 다음에 남겨 주신 제사음식을 나눠 먹어야한다.

음복ㅡ내려주신 '복을 먹는다'는 의미 지만, 같은 음식을 통하여 돌아가신 영령과 살아있는 후손이 하나로 만나고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모든 후손들이 같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한 울 안에서 한 음식을 먹으니, 우리가 되고 식구가 되는 것이다.
이 중요한 의식에 참여하지 않고 모든 헌관이 시키는대로 돌아서 내려 가버린 것이다.

 

 

 

 

 

14>나는 궁금했다. 제상의 음식배열과 정자각 안에서 흠향하고 다시 능침으로 돌아가시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뒷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얼른 정자각 위로 읍을 한 후에 올라 제단 안으로 들어갔다. 복 받았다.

뒷정리 하시는 집사자가 음복잔을 건내 주었다.

아! 정조대왕이 어버이께 올린 제주이지 않은가?!

 비록 술이 약하지만 이 술잔 만큼은 임금의 하사주이니 한방울도 남기지 않고 마셨다.

아직도 술기운이 뺨과 콧바람에 남아있다.

(음주운전 하고 돌아왔단 말인가???!!)

 

15> 어버이는 흡족히 흠향하시고 정자각의 뒤로 열린 문(신문)을 나가 신교를 건너 사초지의 볼록한 강(능침영역의 언덕)으로 들어가신다. 사도세자(장조)와 혜경궁 홍씨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 올라가는 모습은 상상에 맡긴다. 애틋하게 그리워하면 그림이 보인다.

 

 

 

 

16> 다시 왕릉에는 고요함만 남을 것이다. 아니...바람소리, 새소리가 왕릉을 벗 삼을 것이다.

 

 

* 어가 행렬에 참여 봉사한 화성반월고 학생들에게 감사하다. 기특한 아이들이다. 역사와 전통과 문화를 사랑하는 대한국인이 되길 바란다. (아침 8시 반까지 오라고 했단다. 행사는 두시부터 였는데...그리고 네시까지. - 봉사시간 6시간 인정한다고 했다. 남학생들보다 여학생들이 많았다. 바람부는 날, 펄럭이는 어기를 들고 다니느라 고생많았다.)

오늘! 하늘이 열리는 개천절 이었구나.

 

인정샷 ! 팜플렛과 임금님이 내려주신 복된 음식 - 호두 :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아쉬운 점이 많다. 좀 더시민들을 위한 배려, 교육적 의미 부여가 있었으면 했다. 제향의식 순서에 대한 안내지 한장이라도 배포되었으면 했다. 좀 더 욕심 난다면 정자각 안에서 이루어지는 제향의식을 스크린으로 볼 수 있도록 영상중계라도 했으면 정말 좋았겠다. 먼 발치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지 감감하기만 했을 것이다. 공식 지정 사진사들 조차 정자각 안에 들어가 촬영하지 못하니 (아니, 정자각 위에 조차도 못 올라가니...) 후세에 무엇을 전할 수 있을까? 더욱이 어린아이들에게는 먼 세상 딴 나라 이야기와 다름없이 여기고 행여 지겹고 따분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걱정된다. 단순히 종친이나 문화계 그들만을 위한 재현행사인가? 라는 의문이 남는다. 오늘 제향의식을 참관하러 모이신 모든 시민들에게 음복례로 한조각이나 밤 한 톨, 초코파이 한봉지라도 나누었다면, 백성들과 여민락(與民樂)하고 백성과 임금이 함께 어우러지며 하나되는 대동(大同)사회의 모습도 자연스럽게 재현되었을텐데,,, 아이들이 또 가보고 싶다 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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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영옥 2015.10.04 00: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석님, 대단하십니다. 사진촬영 솜씨도 수준급이고 글 또한 영화를 보듯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덕분에 좋은 것을 뱌웠습니다.

  2. 문촌수기 2015.10.04 15: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royaltombs-office.cha.go.kr/cha/idx/SubIndex.do?mn=KP

  3. 다늬 2015.10.05 1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제 같은 장소에서 지켜보았답니다.
    맨 아래 짚어주신 글에 백배 공감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왜 저 지루한 행사를 위해 학생들을 동원했는지...
    그저 답답한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어가의 행렬이 돌아가는 장면을 찍는 것으로 만족했거든요.
    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공간ㅡ조선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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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ㅡ조선왕릉

한국문화유산의 길 2015. 4. 26. 10:43 Posted by 문촌수기
조선왕릉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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