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마리아, 독립운동가

도덕윤리+철학 공부방 2019.02.02 11:55 Posted by 문촌수기
2월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국가보훈처는 김마리아(1892.6~1944.3)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가보훈처ㅡ2월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은 일본 유학중이던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유학생들과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이 계획은 ‘2·8 독립선언’으로 이어졌고, 선생도 도쿄 여자 유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장을 닥나무 껍질로 만든 얇은 종이에 복사해 옷 속에 감춰 부산에 도착했다. 교육·기독교·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도쿄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하고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3·1운동 배후 지도자를 지목받아 체포되기도 했다.

원문보기: 한겨레 신문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80784.html#cb#csidx90f5ea286f4d20ebee66307895f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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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 영상보기>
https://youtu.be/ySStGmqaJoI

이하는 '코리안스피릿' 에서 복사함
http://www.ikoreanspirit.com/news/articleView.html?idxno=53930
김마리아, 안창호, 차경신. [사진제공= 독립기념관]

김마리아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조실부모하고 서울로 와서 정신(貞信)여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 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다가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자,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인데, 여기에 김마리아 선생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는 대한해협을 건너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어 교육계·기독교계·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황해도 지역에 동지 규합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선생은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였고 선생은 그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정신여학교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해 8월 출감 후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고 정신여학교 동창과 교사들이 중심이 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알게 되었다. 선생과 임원들은 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뒤, 그를 위한 선행 조치로 선생을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적십자회 대한지부를 결성하고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로 보내고, 독립선언문을 배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1월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으며 6개월 여의 예심 중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중병에 걸려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니 원판결을 파기하고 1921년 3월 경성복심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병으로 해변에서 휴양하도록 승인 받은 기회를 이용하여 그녀는 상해로 탈출할 수 있었다.

상해에서 수개월의 치료 끝에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수학하였으며,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하여 성명서 발표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1923년에 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가 휴양하다가 미조리주의 팍대학을 졸업한 후 시카고대학 도서실에 근무하였다. 고학 생활 중에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2월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7월 귀국하였고,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1944년 3월 13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