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올해는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 1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이다.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로 선정하여 국민들에게 알렸다.
통일이 되지 않은 우리에게는 독립도 반쪼가리요, 평화도 반쪼가리다. 독립운동 교육은 평화교육과 통일교육과 함께 가야하는 동반자이다.
ㅡ조선일보 2019.01.18 금, A30면
[만물상] "뉴욕 3·1운동의 날" (스크랩)
▶엊그제 미국 뉴욕주 의회가 오는 3월 1일을 '3·1운동의 날'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상·하원 만장일치였다. 당초 '유관순의 날'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뉴욕주 의회는 올해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을 기념한다는 뜻에서 3·1운동의 날로 지정했다. 하지만 결의문에선 유관순을 최연소 여성 인권운동지도자로 치켜세웠다. 결의안은 한국계 뉴욕주 하원의원인 론 김과 비(非)한국계 의원 3명이 공동 발의했다. 뉴욕한인회를 비롯한 한인(韓人) 파워를 보여준 쾌거였다.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이 3·1 만세시위에 뛰어들었을 때 만 열여섯을 갓 넘긴 나이였다. 요즘 고1 나이다. 동료들과 3월 1일 탑골공원 시위에 참여했다.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에 돌아와 4월 1일 아우내 시위를 조직했다. 옥중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여 고문을 받았다. 이 때문에 여학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출소를 며칠 앞두고 옥사했다. 만 열여덟 생일을 두어 달 앞둔 채였다.
▶요즘은 3·1운동 하면 유관순을 떠올릴 만큼 독립운동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광복 전까지 "유관순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는 욕을 먹었다. 부모가 아우내 시위 당일 학살됐고 오빠는 물론 삼촌과 사촌도 옥에 갇혔다. 두 동생도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으니 그럴 만했다. 그를 되살린 건 소설가 전영택이 해방 후 낸 '순국소녀 유관순전'이다. 전영택은 유관순을 '조선의 잔다르크'로 높였다. 유관순 영화도 나왔다.
▶이런 유관순을 놓고 얼마 전 친일시비가 벌어졌다. 2014년 교육부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한 교수가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친일(親日) 패러다임'에 갇혀 유관순까지 왜곡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유관순기념사업회에 사과문을 보내고 직접 찾아가 사죄까지 했다. 이 교수는 지금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학술 분과를 책임지고 있다. '3·1운동의 날'을 만든 뉴욕주 의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다. ㅡ 김기철 논설위원
ㅡKBS 뉴스
미, 뉴욕주의회 "3.1운동의 날"결의안 확정
원문보기 http://m.hani.co.kr/arti/politics/defense/876394.html#cb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를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한국 정부는 1962년 유 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바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16일 충남 목천(현재 천안)에서 5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4월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입학했고 3·1운동이 있기 하루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해 만세 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했다. 1919년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모인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유관순 열사는 시위 결사대 동지 5명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최대 시위인 ‘남대문역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학교가 결국 문을 닫자 유관순 열사는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며 고향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유 열사는 3월13일 사촌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했다. 4월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시위 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용기를 북돋웠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볐다. 그러자 병천 주재소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둘렀다.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했다.
유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은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했다.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달려든 어머니도 일본 헌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유 열사는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저녁 유 열사와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됐다.
유 열사는 천안 헌병대와 서대문 감옥 등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지하 감방에 감금돼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고,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기도했다. 하지만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28일 오전 8시,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8살이었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ㅡ외국인들도 이렇게 추모하며 기리는데...
원문보기>http://m.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838355.html#cb
올해는 1919년 3월 1일,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 1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이다.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유관순 열사로 선정하여 국민들에게 알렸다.
삼일절은 국경일로 휴일이 되고, 학교는 매년 삼월에 학년제가 시작되며 삼일절 다음날부터 입학식, 개학식이 되다보니 계기교육도 없이 지나쳐 버린다. 올해만큼이라도 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개학 첫주 중이라도 그 의미와 정신을 전해주는 시간을 갖자.
통일이 되지 않은 우리에게는 독립도 반쪼가리요, 평화도 반쪼가리다. 독립운동 교육은 평화교육과 통일교육과 함께 가야하는 동반자이다.
뉴욕주의회가 올 3월 1일을 특별히 기념하여 '3ᆞ1운동의 날'로 정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ㅡ조선일보 2019.01.18 금, A30면
[만물상] "뉴욕 3·1운동의 날" (스크랩)
"내 손톱이 빠지고 귀와 코가 잘리고, 팔다리가 부서진다 한들 내 나라를 잃은 고통과 비교할 순 없다." 작년 3월 뉴욕타임스는 유관순의 항일투쟁을 소개한 장문의 기사를 내보냈다. 100년 늦은 부고(訃告) 기사였다. 이미 사망했지만 주목할 만한 여성을 재조명한다는 취지로 만든 '우리가 간과한 사람들'(Overlooked) 기획의 하나였다. 이름조차 낯선 유관순 얼굴과 생애가 미국 시민들에게 알려졌다.
▶엊그제 미국 뉴욕주 의회가 오는 3월 1일을 '3·1운동의 날'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상·하원 만장일치였다. 당초 '유관순의 날'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뉴욕주 의회는 올해 100주년을 맞은 3·1운동을 기념한다는 뜻에서 3·1운동의 날로 지정했다. 하지만 결의문에선 유관순을 최연소 여성 인권운동지도자로 치켜세웠다. 결의안은 한국계 뉴욕주 하원의원인 론 김과 비(非)한국계 의원 3명이 공동 발의했다. 뉴욕한인회를 비롯한 한인(韓人) 파워를 보여준 쾌거였다.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이 3·1 만세시위에 뛰어들었을 때 만 열여섯을 갓 넘긴 나이였다. 요즘 고1 나이다. 동료들과 3월 1일 탑골공원 시위에 참여했다.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에 돌아와 4월 1일 아우내 시위를 조직했다. 옥중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여 고문을 받았다. 이 때문에 여학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출소를 며칠 앞두고 옥사했다. 만 열여덟 생일을 두어 달 앞둔 채였다.
▶요즘은 3·1운동 하면 유관순을 떠올릴 만큼 독립운동의 상징이 됐다. 하지만 광복 전까지 "유관순 때문에 집안이 망했다"는 욕을 먹었다. 부모가 아우내 시위 당일 학살됐고 오빠는 물론 삼촌과 사촌도 옥에 갇혔다. 두 동생도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으니 그럴 만했다. 그를 되살린 건 소설가 전영택이 해방 후 낸 '순국소녀 유관순전'이다. 전영택은 유관순을 '조선의 잔다르크'로 높였다. 유관순 영화도 나왔다.
▶이런 유관순을 놓고 얼마 전 친일시비가 벌어졌다. 2014년 교육부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한 교수가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친일(親日) 패러다임'에 갇혀 유관순까지 왜곡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유관순기념사업회에 사과문을 보내고 직접 찾아가 사죄까지 했다. 이 교수는 지금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학술 분과를 책임지고 있다. '3·1운동의 날'을 만든 뉴욕주 의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다. ㅡ 김기철 논설위원
ㅡKBS 뉴스
미, 뉴욕주의회 "3.1운동의 날"결의안 확정
ㅡ 한겨레신문 스크랩
원문보기 http://m.hani.co.kr/arti/politics/defense/876394.html#cb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유관순 열사를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한국 정부는 1962년 유 열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바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16일 충남 목천(현재 천안)에서 5남매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18년 4월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입학했고 3·1운동이 있기 하루 전날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해 만세 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했다. 1919년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모인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유관순 열사는 시위 결사대 동지 5명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최대 시위인 ‘남대문역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학교가 결국 문을 닫자 유관순 열사는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며 고향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유 열사는 3월13일 사촌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귀향했다. 4월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시위 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용기를 북돋웠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볐다. 그러자 병천 주재소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둘렀다.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했다.
유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은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했다.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달려든 어머니도 일본 헌병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유 열사는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항의 시위를 계속했다. 이날 저녁 유 열사와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은 체포됐다.
유 열사는 천안 헌병대와 서대문 감옥 등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을 받으면서도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지하 감방에 감금돼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고,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기도했다. 하지만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28일 오전 8시,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18살이었다.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ㅡ외국인들도 이렇게 추모하며 기리는데...
원문보기>http://m.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838355.html#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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