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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에서 읽는 실록이야기

인릉ㅡ조선 제23대 순조

by 문촌수기 2020. 11. 22.
인릉ㆍ仁陵

조선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

인릉은 조선 제23대 순조(純祖 : 1790~1834, 1800~1834 재위)와 순원황후 김씨(純元皇后 金氏: 1789~1857)의 능이다.
순조는 정조와 유비 박씨의 아들로 1800년 11세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가 순조를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다. 이후 순조는 직접 정사를 돌보았으나 세도정치로 국정이 어지러워 부정부패가 생기고, 자연 재난, 홍경래의 난 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순원황후는 1802년(순조 2)에 왕비가 되었다. 헌종과 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수렴청정을 하여, 조선의 왕비 중 유일하게 2번 수렴청정을 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각각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와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추존되었다.
인릉은 처음 파주 장릉(인조와 인열왕후) 근처에 있었다가, 1856년(철종 7)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 수렴청정(垂簾聽政) : 대비가 발을 내리고 정치 상황을 듣는다는 의미로, 어린 왕을 도와 정치에 참여하는 것

* 인릉 연혁
- 헌종 1년(1835년) 경기도 파주에 순조숙황제 등 조성
- 철종 7년(1856년) 지금의 자리로 천릉 遷陵
- 철종 8년(1857년) 순원숙황후 안장安葬, 합장릉으로 조성
* 인릉 제향일
- 매년 1회 (10월 20일)
※ 제향일정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인릉 관람포인트 1>
인릉의 곡장 뒤 잉 부분은 꿈틀거리는 것처럼 봉분을 향하고 있다.
풍수에서는 산을 용으로 보는데 흔히 용이 아홉 번 꿈틀거리고 뻗어 나간 자리에 명당이 있다고 한다. 특히 왕릉을 택지할 때는 사초지 '강'과 봉분이 있는 '혈', 그리고 곡장 뒤의 ‘잉'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인릉의 잉 부분은 용이 꿈틀거림을
멈추고 생기를 모아 놓은 듯 봉분을 향하고 있어 명당이라 일컬어진다.

 

 

<인릉 관람포인트 2>
인릉의 문·무석인 4기의 생김새가 각각 다르다.
능 앞에 세워진 문관 형상의 석물 문석인과 무관 형상의 석물 무적인이 전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의 생김새도 각각, 석물의 생김새도 각각이다. 석물은 모두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보니 이렇듯 생김도 각각 다르게 조각된 것이다.

 

 

 [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이 아이가 타고난 운은 나에게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순조)


"오색 무지개가 종묘 우물에 뻗어 있으며 신비로운 빛이 궁궐 숲을 둘러싸고 있으니, 이 어찌 하늘이 주신 기쁨이 아니겠는가. 원자(순조) 울음소리가 나자마자 어린이 늙은이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어나와 좋아하는 빛이라든지 춤추는 모양이 자기 집안의 경사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정도이니, 이는 사람들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무
엇이겠는가.”
(정조실록 14년 6월 18일)

정조실록에 따르면 순조의 탄생 순간은 더없이 화려하다. 그만큼 정조는 아들 순조를 아끼고 귀하게 여겼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기억하는 정조이기에 그의 아들 사랑은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순조실록은 훗날 순조가 무럭무럭 자라 우뚝한 곳마루에 용의 얼굴을 하고 네모난 입에 겹으로 된 턱이 정조의 모습과 똑같았다. 이에 정조께서 매우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이 아이가 타고난 운은 나에게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하였다.'고 전한다. 정조의 기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정조는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갑작스레 승하하고 만다. 어린 순조가 후사를 잇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미처 여유 부릴 틈도 없이 왕좌에 올라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순조의 나이 11세. 한창 부모 품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을 나이에 왕위에 올라 신하를 거느리고 백성을 돌봐야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비록 시작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만 했던 어린 왕이었을지라도 순조는 한나라의 군주로서 덕목과 위엄을 잃지 않았다. 친정 이후에는 실무 관원들과 직접 만났고,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이 원하는 바에 귀 기울였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 정조의 빛나는 업적을 잇기 위해 <대학유의>, <만기
요람> 등 학문과 정사에 관한 다양한 서적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현실은 순조의 노력과 뜻대로 흐르지 않았다. 수렴청정의 그늘은 오랫동안 그의 뒤를 따라다녔고 두 왕비 집안(경주 김씨와 안동 김씨)의 권력 다툼은 국정의 어려움을 가속화했다. 세도정치와 탐관오리가 활개를 치자 생활이 궁핍해진 백성들이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고 거기에 천재지변까지 겹쳐 민생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순조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재 속에서 백성들의 아픔을 보듬으려 노력했다.

“세금 징수가 가난한 민가에 날로 가중되어 백성들의 걱정과 탄식이 들려오는데, 위에서는 이를 들을 길이 없다면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고 보호하려고 하더라도 될 수가 있겠는가?"

어린 나이에 즉위해 정권의 험한 물살에 휩쓸린 가엾은 임금이었을지라도 백성을 살피는 마음만큼은 어느 왕에 못지않았다. 1826년(순조 26) 봄, 굶주린 백성들을 보고 순조는 한탄한다.

"집집마다 들어가 보면 텅 비어 있고 마을마다 나가 보면 밥 짓는 연기가 끊겼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충분히 먹고 배를 두드리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흉년 들어 굶주려 죽는 이들조차 구제하지 못하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쌀밥과 비단옷을 편안하고 아름답게 느끼겠는가?"

순조는 왕실 곳간을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쓰이도록 했다. 또한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을 진정시킨 뒤에도 가장 먼저 살핀 것 역시 민생이었다. 그의 몸은 왕좌에 있었지만 두 눈과 귀는 늘 백성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ㅡ 서울 헌릉과 인릉 안내서에서.